아시에 그라시스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왕족답지 않은 왕족.’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되, 위엄을 지켜 만만하게 보일 여지를 주지 않고,
얕보이지 않게 품위는 지키되, 사치는 부리지 않는다.
문(文)과 무(武).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았고, 허리를 숙여 낮은 곳의 사람들을 굽어살폈다.
아마, 왕실에서 행하던 구휼 제도의 대부분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엥? 바람직한 거 아니야? 그게 왕족답지 않은 거라고?”
검소하고 청렴하며 백성을 생각하는 왕족이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왕족의 표본 아닌가.
하지만, 내가 알던 그라시스의 왕족들은 그렇지 않았는걸?
내가 아는 왕족이란 사치와 향락에 빠져 흥청망청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제 배를 부풀리는 인간 말종을 뜻하는 말이었으니까.
이렇게 말하니 꼭 내가 기요틴을 부르짖는 혁명주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저기, 카나.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그래도 왕족이신데….”
“뭐 어때. 쟤도 그렇게 생각할걸.”
“음. 조금 아프긴 해도 저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그, 그래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아시에의 눈치를 살피던 다은이 안도인지 뭔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불경죄로 잡혀갈 거란 생각이라도 한 건가.
설령 아시에가 정말 그런 성격이라고 해도, 그라시스가 멸망한 이상 불경죄라는 걸 물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했잖아. 왕족 답지 않은 놈이라고.”
“응… 확실히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이제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네.
아시에의 저런 성격? 특징?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그는 왕실에서 내놓은 자식 내지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쉽게 말해, 못난 오리들 사이에 섞인 ‘오리인 줄 알았던 백조’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아시에를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글쎄.
뛰어난 수완 때문이었을지, 혈육 간의 마지막 정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이유가 뭐든 간에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와선 알 필요도 없고.
내가 정말 궁금한 건 다른 거야.
“어떻게 살아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란 건 알지만.”
아시에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별거 있겠어? 그냥 운이 좋았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왕성에만 처박혀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멸망의 날 왕성을 떠나 있었고,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야.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시간을 벌고, 그 덕분에 무사히 성을 떠나 도망칠 수 있었다,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으면 미안하게 됐어.”
“기대 안 했어.”
아시에가 직접 뽑은 그의 호위 기사면 몰라도, 왕실 기사단 놈들이 그럴 놈들도 아니고.
왕족의 안위가 아니라 제 안위를 생각해서 왕실 기사단에 들어간 놈들이 그런 기특한 짓을 하겠어?
“…그래서, 왜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대장장이 행세를 하고 있는 거야?”
“대장장이 행세가 아니라 아직은 제자인데.”
“뭐가 됐든.”
“…넌 정말 변하질 않았구나.”
아련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나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내 물음을 들은 아시에는 한참을 망설였다.
흘러간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아파 보이면서도 그윽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한테 차이고 나서.”
“엣?! 아, 아니… 죄송해요. 계속 말씀하세요.”
“-차이고 나서 계속 생각했어. 나한테 부족한 게 뭐였을까.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길래 네가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까. 얼굴? 재력? 성격? 곰곰이 생각했지만 그 어떤 것도 답이 아니었어.”
“…아니, 앞에 두 개는 그렇다 쳐도 성격은 맞는 거 같은데.”
그러나 내 말은 가볍게 묵살당했다.
“그러던 중 나는 깨달았어. 여자들은 남자의 남성적인 면모에 매력을 느낀다는 걸.”
“에?”
“…뭐?”
계단을 여러 개나 뛰어넘은 그의 결론에 다은과 내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그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우리가 벙쪄 있는 와중에도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남성적이란 무엇인가.”
남성적이란 건 여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라는, 다소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로 운을 띄운 아시에가 그의 주장을 설파했다.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
솔직히 별로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라서 중간부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틈틈이 시청자들에게 번역해 주는 것 같던 다은도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었고.
장황하게 이어지던 아시에의 목소리에 마침표가 찍혔다.
자의는 아니고 타의에 의해.
내버려두었다간 끝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든 나는 굽이굽이 흐르는 물결을 틀어막았다.
“…대충 알겠어.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면 여자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거고, 그 말인즉 남성적인 직업이라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래. 남자 대장장이는 많지만 여자 대장장이는 찾아보기 힘들잖아. 몇십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으음….”
다은의 표정은 이미 해괴해질 대로 해괴해진 상태였다.
“이딴 게 왕자?”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러 눈치를 줬다.
글쎄.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운동해서 몸을 키우는 남자들도 있는 걸 생각하면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긴 한데 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일국의 왕자였던 놈이 그런 이유로 대장장이가 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사랑의 대상이 나라는 걸 떠올리면 꺼림칙함이 앞섰다.
“설마 웃통을 벗고 다닌 것도 그런 이유야?”
“남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의 일환이지.”
“아니. 웬만한 남자들은 반나체로 다니고 싶어 하진 않을걸.”
아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라시스의 멸망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게 분명하다.
내게 추근대는 걸 빼면 나름대로 멀쩡한 녀석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하긴 미우나 고우나 피가 이어진 혈육을 모두 잃고 나라까지 잃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없겠지.
아시에가 이십 년만, 하다못해 십 년만 일찍 태어나서 왕권을 잡았더라면 그라시스가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저 녀석도 참 불쌍한 녀석이긴 하다.
“그러니까 카나, 다시 한번 물어볼게. 내 반려가 되어주지 않을래?”
“꺼져.”
…이런 점만 빼면.
* * *
-아시에 페도페도야…
-이게 진짜로 고백박는 사람이 있네ㅋㅋㅋㅋ
-판타지적 관점으로 보면 이상한 게 아닐수도?? 원래 판타지 세상에선 어릴 때부터 약혼하고 결혼하고 그러잔슴
-나 실리아인인데 이말 맛다ㅇㅇ
-ㄴ실리아인은 그런 말투 안 써요..
-아무리 그래도 카나는 너무 애 아니냐; 연애대상으로 절대 못볼거 같은데
-그렇게 보는애들 많던데?
아시에는 2고백 2차임라는 화려한 전적과 함께 다은의 시청자들에게 ‘페도’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았다.
물론 아시에가 그걸 알 방도는 없었지만, 그에게 닿는 다은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실연의 아픔을 추스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드래곤 오브 도난‘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브론딘과 다은에게 상황을 전해 받은 아시에.
누구와 달리, 그라시스의 왕족임에도 아르키쉬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았던 그였기에 소통의 어려움은 없었다.
“짚이는 거 있어요?”
“흠.”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아시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딱히 없는데.”
“언제 없어졌는지도 짐작이 안 돼요?”
“난 어제 물건을 받아서 스승님께 드린 후로 상자에 손을 댄 적도 없어. 허락도 없이 스승님의 물건에 손을 댈 리 없잖아.”
“으음!”
브론딘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로서는 백 점짜리라고 해도 무방한 훌륭한 답변이었지만, 사견 해결에 도움이 되는 대답은 아니었다.
“끄응….”
심부름을 마친 아시에가 돌아왔음에도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 다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카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흘깃 쳐다본 카나는 그저 눈을 멀뚱멀뚱 뜨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셋이서 대화를 나눌 때 브론딘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 카나의 얼굴을 보며 다은은 생각했다.
‘…귀여워.’
아, 이게 아니지…!
다은이 뺨을 짝짝 두드려 정신을 차렸다.
전투에선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카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선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일은 카나가 저지르고, 수습은 그녀가 하는 형세.
그러나 다은의 의욕은 오히려 불타올랐다.
‘이건 기회야. 카나한테 내 능력을 입증할 기회. 만약 카나의 도움 없이 이 일을 해결한다면….’
다은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다은… 대단해.’라고 말하는 카나를 상상하며 으헤헤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했다.
“도와줘 얘들아!”
시청자들의 도움을 받기로.
인간이란 본디 사회적 동물.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기에 마을을 이루고 사회를 이뤄 사는 거 아니던가.
그렇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다은에겐 한 점 부끄럼도 없었다.
-말은 청산유수네요
-저니를 국회로!!
-어어; 그거 맞냐?
-절름발이가 범인인 듯
-당신이 한국의 홈즈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 생각에 범인은… [더보기]’ 같은 채팅이나 보던 다은이 혀를 찼다.
“평소에 추리 소설 같은 것 좀 읽고, 하다못해 추리 게임이라도 해서 추리력을 키웠어야지!”
스무스한 책임 전가에 채팅창이 갈고리로 가득 찼다.
금방이라도 다은을 갈고리에 걸고 불을 활활 지필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
아시에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양 입을 열었다.
“스승님. 어제 공방에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엉? 그랬었지.”
받아놓은 의뢰는 없었고, 물건을 사러 온 손님도 없었다.
애초에 문짝에 대놓고 ‘오늘 영업 안 함!’이라고 적힌 팻말을 걸어놨는데 구태여 문을 두드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드워프들의 도시, 발토라.
대장장이 한 명이 문을 닫았다고 해도 예비 구매자들을 반길 공방은 수두룩했으니까.
“그리고 스승님은 잠을 주무실 때 꼭 문을 잠그고 주무시고요.”
“암, 그렇지.”
브론딘의 공방 문은 그가 직접 만든 물건이다.
철로 된 문이라 튼튼하고 잠금장치도 세밀하게 만들어서 어지간한 도둑은 침입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고작 삼류 도둑놈들이 쓰는 락픽 따위에 뚫릴 문이 아니었으므로.
“근데 뚫렸잖아요.”
“….”
신나게 떠들던 브론딘이 다은의 한마디에 격침당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가 만든 물건을 보고 감탄하던 다은이었던지라 그녀의 일침은 브론딘에게 더 큰 데미지를 입혔다.
아시에가 크흠, 헛기침하여 주의를 집중시켰다.
“도둑이 훔쳐 간 게 맞다면 범행이 일어난 건 제가 퇴근하고 출근하기까지의 시간, 그러니까 밤에 일어난 일이겠죠.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스승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 주무시고요.”
“그래. 어제도 문을 잠그고 확인까지 한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잠긴 문을 열 방법은 안에서 열어주거나, 열쇠를 통해 여는 방법밖에 없죠. 하지만 스승님이 열어주셨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열쇠를 갖고 있을 거다?”
다은의 막타에 아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 만든 문은 견고해서, 만약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열고 들어왔다면 분명 흔적이 남았을 거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뚫을 수 있는 문은 아니니까.”
브론딘이 후다닥 문을 향해 달려갔다.
잠금장치를 살폈다가 문고리를 보고, 다시 잠금장치를 봤다가 한 걸음 물러나서 문짝을 보고.
부산스럽게 문을 살피던 그가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 흔적도 없군! 설마 도둑놈의 실력이 나보다 좋았던 건가!”
“아뇨, 스승님. 스승님의 실력을 따라가는 도둑놈이 있을 리 없습니다!”
“…제자야!”
“스승님!”
‘…꼴값을.’
두 남정네의 땀내 나는 포옹에 다은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꼴값을 떠느라 아시에가 미처 하지 못했던 뒷말을 대신 이어받았다.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봐야겠네요.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
아시에와 부둥켜안고 있던 브론딘이 팔을 풀었다.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로 머뭇거리는 브론딘은 계속되는 다은의 재촉을 이기지 못했다.
“제자를 제외하면 딱 한 명 있다네.”
“그게 누구예요?”
그는 여전히 껄끄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