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을 지키겠다고 말한 브론딘을 제외한 나머지 셋, 나와 다은, 그리고 아시에는 공방을 나섰다.
다은의 손에 엉겁결에 끌려 나온 나는 길거리를 걸으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길을 나서게 된 전말을 들은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제휴를 맺은 마공학자에게 여분의 열쇠를 줬다고?”
…왜?
“매번 열어주기도 귀찮고, 자기 없을 때 공방에 들를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줬다는데?”
“스승님은 그 마법사를 믿고 있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겨우 그런 거로 납득할 수 있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지.”
드워프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 아닐까.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잘 믿지 않지만,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거든.”
“어? 그래? 의외네…. 호탕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친하다는 게 꼭 신뢰가 있다는 말은 아니니까.”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는 다은.
아무래도 이해를 못 한 게 분명해서 나는 그녀에게 가벼운 설명을 덧붙였다.
“드워프들의 ‘믿음’이라는 건 그냥 믿는다는 뜻이 아니야. 그것보다 좀 더 깊은… 으응….”
말하다가 말고 마땅한 단어를 고민하고 있으니 다은 쪽에서 먼저 답이 나왔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보다, 신뢰나 신의에 가깝다는 말이야?”
“응, 신의.”
개인차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드워프들은 호쾌하고 호방하다.
거기에 더해, 아까도 말했듯이 한번 믿은 사람과의 신의는 끝까지 지키는 성격까지.
이런 점 때문에 드워프를 두고 진국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이야, 그 친구 정말 진국이야.’ 이런 느낌으로.
드워프에게 신의란 목숨과 같은 것이어서, 배신을 당한다 해도 정말 웬만큼 큰일이 아니고서야 등을 돌리지 않았다.
유력한 용의자인 아시에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겠지.
“아… 그래서 브론딘이 말하기 꺼린 거구나. 믿음을 배신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아마 그렇겠지.”
“그것과 별개로 난 그 마법사라는 작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거든. 인상도 별로고.”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나는 “사건이 터졌다 하면 어디선가 등장하는 관상학 전문가들?” 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다은을 흘깃 봤다가 아시에에게 말을 걸었다.
“자세히 말해봐.”
분위기와 인상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
과학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입증되지 않은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비록 의심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는 데다가, 조국의 멸망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놈이라 해도….
으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신뢰도가 확 낮아지는데.
…아무튼,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몰라도 아시에가 그렇게 말한 이상 한번 짚어볼 필요는 있었다.
왕자였을 때 아시에의 안목은 명성이 자자했으니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직접 뽑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능력에 눈독을 들인 귀족이나 왕족이 제 밑으로 오라고 권유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꼬드김에 넘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시에 님을 평생 따르겠다’고 맹세했다며 거절했다.
“늘 웃고 다니는데 웃는 얼굴 뒤에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좋은 느낌은 아니었어.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니까 그냥 흘려들어.”
“음….”
문제는, 아무리 아시에의 안목이 적중률이 100%에 가깝다고 해도 결국 느낌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들을 납득시킬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에도 나에게 그냥 흘려들으라고 말하는 것이고.
“아니. 믿을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한 거니까.”
유념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가볍게 말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갑작스럽게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다은과 아시에가 걷는 것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나에게 쏘아지는 시선을 어리둥절하게 받아치고 있으니 아시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니까 내가 미련을 못 버리지.”
“…?”
“카나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오해할 수도 있어.”
“…??”
…뭔데?
한숨을 푹푹 쉬는 아시에와,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는 다은 사이에 낀 나.
무슨 말인지 계속 물어봐도 둘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짜 뭔데…?
* * *
카나가 본의 아니게 아시에를 스턴 상태에 빠트리는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일행은 무사히 브론딘과 제휴를 맺은 마법사의 공방에 도착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사히’라는 말을 쓸 정도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으나.
2고백 2차임을 달성하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누군가의 심장에는 무사히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막스의 공방.
다은은 미사여구 하나 없이 간결하게 쓰여 있는 간판을 유심히 살폈다.
“마법사 이름이 막스인가 봐요?”
“맞아. 막스 그라모프. 아르카 제국 귀족 출신의 남자야.”
“제국?”
쫑긋.
카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제국… 마법사…?”
누구나 귀엽다고 느낄, 그런 목소리인데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뭐,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만.’
아시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리드와 아시에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가리드는 그라시스에 맹목적이었고, 아시에는 그의 능력을 높게 사고 있었으니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아시에가 카나를 마음에 품기 전까지는.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품에서 놓고 싶지 않은 게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인 법.
때문에 아시에가 카나에게 구애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이가 미묘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를 ‘딸을 훔쳐 가는 도둑놈’으로 보는 가리드에게 아시에가 일방적으로 쩔쩔맸을 뿐.
그렇기 때문에 아시에는 가리드의 죽음에 카나가 느꼈을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나 만큼은 아니어도 통탄스러운 심정인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또,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아서라. 여기서 칼부림이라도 했다간 좋은 꼴 못 본다.”
“나도 알아.”
카나가 뚱하게 대답했다.
참 믿음직스러운 대답이라고 아시에는 생각했다.
카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다은이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렇게 공방을 따로 차릴 필요 있어요? 제휴를 맺었다면 그냥 같은 공방에서 일하면 되는 거 아닌가…. 비용적으로 봐도 그렇고, 편의성으로 봐도 그편이 나을 거 같은데.”
땅값이 어쩌니, 집값이 저쩌니.
친절하게도, 다은은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생판 본 적 없는 타인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었다.
“협력과 합병은 다르지. 제휴를 맺었다고 해도 하는 일이 엄연히 다른데 어떻게 같은 공방에서 일하겠어?”
“…아하?”
“그리고 그렇게 하면 마법사들이 못 버틸걸.”
하루 종일 땅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문득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가 있다.
이제는 대장간 일이 제법 익숙해진 아시에도 그러한데, 보통 사람들보다 주변 자극에 예민한 마법사들에게 그 소리가 어떻게 느껴질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새기다 공방이 날아가는 꼴은 대장장이에게도, 마법사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대장장이의 제자인 아시에에게도.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살가운 사이는 아니어도 안면은 있는 아시에가 나서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세요?”
그의 노크에 나무문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도 없었고, 문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아시에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막스 씨, 접니다. 브론딘 님의 제자 아지에.”
“어? 가명을 쓰시네요?”
“뭐… 귀찮은 일은 피해야지.”
다은이 무슨 의도로 말한 건지 단번에 눈치챈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본명을 썼어도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왕자였던 사람이 대장장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아시에는 브론딘에게만 본명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가명을 대기로 결심했다.
“너무 비슷한 거 아니에요?”
“나를 보고 알아볼 사람이라면 다른 가명을 대도 알아볼 거야. 어차피 알아볼 거면 차라리 익숙한 게 낫지.”
그런가?
설득력 있는 말에 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납득하고 물러났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똑똑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쾅쾅으로 변하고, 어느새 노크를 하는 건지 그냥 때리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수준으로 변했다.
꽉 깨물어서 하얗게 변한 입술을 한 아시에의 이마에 땀방울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부술까?”
“아니.”
“….”
단호한 거절에 시무룩하게 다시 들어갔다.
검집에 손이 올라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라, 다은은 카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사심을 채울 마음과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막을 마음이 반씩 섞인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굳게 닫힌 문은 부서지지 않았고, 열리지도 않았다.
헉헉대는 소리를 내며 물러난 아시에.
차원수도, 마물도, 하다못해 사람도 아닌 것에게 패배한 그였지만 성과가 없진 않았다.
“…거, 시끄럽게 남의 공방 문을 왜 이렇게 두드립니까? 문이 닫혀 있으면 얌전히 돌아갈 것이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온 옆 공방의 마법사가 볼멘소리를 했다.
동시에 그를 향해 세 명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졸지에 세 명의 시선을 받게 된 마법사는 몸을 움찔거렸다.
“뭐, 뭡니까?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애써 센 척하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린 목소리.
점점 줄어들던 그의 목소리는 아시에가 앞에 섰을 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인 마법사의 앞에 평균보다 큰 체구인 아시에가 서자 흡사 양아치가 돈을 뜯는 것 같았다.
“막스 씨와 아는 사이입니까?”
“뭐, 마, 막스? 일단 아는 사이긴 한데….”
“저는 막스 씨와 제휴를 맺은 브론딘 님의 제자 아지에라고 합니다. 막스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문이 닫혀 있네요. 혹시 그가 어디에 가셨는지 아십니까?”
“그거까진 몰라. 나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래도 혹시 짚이는 게 있다거나….”
“글쎄.”
아시에에게 위협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챈 마법사의 태도가 단박에 시큰둥해졌다.
설렁설렁 대답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아시에가 주머니를 뒤적여 금화를 꺼내 들었다.
“…헉!”
“정말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쉽지만….”
“기, 기다려 봐…!”
언제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냐는 듯 180도 달라진 마법사가 등을 돌리던 아시에를 급하게 잡아챘다.
머리를 열심히 뒤적이며 있는 기억 없는 기억 모조리 헤집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생각났어! 어제 저녁에, 그가 큰 가방을 들고 가는 걸 봤어! 딱히 살가운 사이는 아니라서 어디 가는지 묻진 않았지만, 꽤 급해 보여서 안 그래도 의아하다고 생각했지.”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봤습니까?”
“…그거까지는 잘….”
“이렇게 합시다.”
팅!
아시에가 금화 하나를 더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더 이상 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법사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꿀꺽.
마법사의 목이 한차례 꿀렁였다.
“그를 찾는 것을 도와주시면 이 금화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긍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