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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7

제아무리 자유분방한 용병들이라 해도 나름의 규칙은 있었으니.

리베리에서 정한 절대적인 규칙과 문서화 되어 있진 않지만 용병들 사이에서 떠도는 암묵적인 규칙이 바로 그러했다.

그중, ‘의뢰주의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주점에서 술 한 잔과 함께 무용담을 털어 넘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의뢰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행동은, 용병들 사이에서는 믿고 일을 맡긴 의뢰주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됐다.

기껏 일을 시켰더니 의뢰주의 정보를 팔아먹는 용병을 의뢰주들이 좋게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용병들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위법적인 일이 아닌 이상 사소한 결함 정도는 묵과한 채 넘기곤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나 ‘붉은 갈퀴 용병단’은 달랐다.

붉은 갈퀴의 용병들은 리베리에 속한 용병도 아니었고, 신뢰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 나쁜 양아치 무리.

그럼에도 붉은 갈퀴 용병단이 버젓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용병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

속히 말해 ‘더러운 일’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늘 하던 대로. 알지?”


“아유, 그럼요. 흔적도 없이 처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살인.


“크흠, 내가 최근에 생긴 취미가 있는데… 젊고 건강한 물건으로 하나 구해줄 수 있나?”

“이거이거, 알만한 분이 섭섭하게 왜 이러십니까? 당연히 되고 말고요! 수놈과 암놈. 어떤 놈으로 구해다 드릴깝쇼?”

“…크흠흠! 암놈으로 부탁하지.”

“예이~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납치.

그 외에도 절도, 강도, 방화 등.


돈만 주면 어떤 반인류적인 일도 선뜻 맡아서 하니, 뒤가 구린 이들에게 붉은 갈퀴 용병단이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였다.


“사람 하나를 찾고 싶은데.”


도시에서 꽤나 동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

멀쩡한 외관임에도 어딘가 불길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물 안에 들어간 아시에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막스라는 마법사를 아나?”


발토라에서 줄곧 써온 존댓말이 아닌, 하대에 가까운 반말.

타고난 권위와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말투에 다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왕자였구나….’


카나와 아시에의 말을 의심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친근하게 말을 거는 데다가 첫인상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그가 왕자라는 걸 쉽게 실감할 수 없었던 다은이었으나.

아시에에게서 풍기는, 감히 항거할 생각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에 다은은 그가 왕자라는 새삼스레 실감했다.

그리고 그건 다은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아시에의 앞에 선 용병도 사위를 장악한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 같았으면 누런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하잘것없는 너스레를 늘어놓았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저… 제국의 귀족분이십니까?”

“알 거 없다.”


‘…귀족이구나!’

용병의 머리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아하건대, 필시 제국의 귀족이다…!

그것도 그들이 심심찮게 마주하던 어중이떠중이 귀족이 아닌, 진짜배기 귀족이 분명했다.

실상은 제국의 귀족은커녕, 제국과 적이라고 해도 무방했지만 용병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알고 있나?”

“막스… 말입니까?”

“그래. 눈썹이 옅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그 말에 용병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찾아온, 상당히 큰 가방을 멘 로브 차림의 남자.

그 남자의 이름이 막스였던 것 같기도 했다.

꼭두새벽부터 찾아와서 자기를 다른 도시까지 데려다 달라고 급하게 의뢰하는 게 의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이 남자와 얽혀 있는 거겠지.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용병이 씨익 웃었다.


‘이거 어쩌면 한탕 칠 기회일 수도.’


그의 직위는 붉은 갈퀴 내에서 간부와 말단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위에서는 밑에 놈들을 관리 못 한다고 까고, 밑에서는 위에서 시킨 것도 모르고 개새끼니 뭐니 하며 욕한다.

하다못해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모르겠는데, 말단과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다.

중간에 끼여 이리저리 치이던 그에게, 간부가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의 상황은 간부들 몰래 거하게 챙길 기회로 보였다.

눈앞의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곳까지 몸소 찾아온 걸 보면 꽤나 급해 보인다.

높은 분이니 돈도 많을 테고….

구부정하게 굽었던 용병의 허리가 알게 모르게 쭈욱 펴졌다.


“그을…쎄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술을 마셨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용병.

아시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때 왕자 자리에서 용병보다 더한 사람을 수도 없이 상대했던 아시에는 그의 속셈이 투명할 정도로 훤히 보였다.


‘여기에 왔었군.’


또한 그는 막스가 붉은 갈퀴 용병단에 찾아왔다는 것도 꿰뚫어 보았다.

단순히 아는 거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시에를 보며 침을 삼키면서도, 용병은 막스의 행방을 순순히 털어놓지 않았다.

당연히 의뢰주를 지키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속이 칼칼~한 게, 시원한 게 있으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돈이 없어서 사 먹을 수도 없고. 참 곤란합니다.”


아시에를 진짜배기 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용병은 당당했다.

막스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그 혼자뿐이니, 함부로 해치지 못할 거란 생각으로 한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용기와 만용이 한 끗 차이이듯이, 배짱과 객기도 한 끗 차이였다.

아시에는 붉은 갈퀴 용병단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을 저버린 이들.

그는 그런 이들에게 금화를 나눠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카나.”

“응.”


타박.

아시에의 부름에 카나가 나섰다.

“…응? 꼬맹이?”

후드를 쓴 작은 체구의 소녀를 본 용병이 턱을 쓸었다.

아시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이 꼬마를 대가로 주시겠다는 겁니까?”


사람을 대가로 받고 일을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흔한 일도 아닐 뿐.

특히, 이렇게 작은 꼬마를 대가로 주는 일은 붉은 갈퀴 용병단에 오래 있었던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사고파는 건 꽤 품이 드는 일이기에, 간부진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용병은 한번 얼굴이나 보자면서, 다소 떨떠름하게 소녀가 쓴 후드를 젖혔다.

이윽고, 가만히 올려다보는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숨이 턱 막혔다.


“…어.”


그동안 수많은 여자를 보고, 또 안아본 그였지만 이런 외모의 소녀는 처음이었다.

풍만한 몸을 좋아하는 그조차 순간 혹하게 만드는 외모.

경매장에 세우면 금화로 꽉 찬 주머니를 몇 개나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참고 기다리면 극상의 미인으로 자라날 것이다.

돈을 받고 팔지, 아니면 집에 가둬두고 클 때까지 기다릴지.

돈을 원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흐, 흠!”


분에 겨운 고민을 하던 용병이 정신을 차렸다.

겨우 마법사 한 놈의 행방을 알려주고 이런 대가를 받을 수 있다니,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 아닌가.

행여나 마음이 바뀔세라 그는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아시에의 거래를 승낙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푸슉!


“더러워.”

“…어?”


내 손이, 왜 바닥에?

인지가 먼저였고, 통증이 그 뒤를 따랐다.


“으아아악! 내, 내 손이!”


피 분수가 솟는 손목을 붙잡고 절규하는 용병.

그의 손에 응당 붙어있어야 할 오른손은 더러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애초에 아시에는 그와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설령 그럴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거래할 일은 없었고, 그보다 강한 카나를 거래 품목으로 올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거듭된 오답의 대가를 치른 남자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제 입에 쑤셔 박힌 천 뭉치가 아니었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쉿.”


담담한 얼굴로 그의 입에 천 뭉치를 쑤셔 박은 소녀가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댔다.

소녀의 분홍색 눈동자에,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이 비쳤다.

용병은, 소녀의 얼굴이 더 이상 어여삐 보이지 않았다.


* * *


“흐, 흐으으….”


거대한 나무에 등을 붙인 막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좋게 좋게 갑시다, 형씨. 응? 서로 피곤하게 이러지 말고.”

“….”


껄렁껄렁한 목소리와 그 뒤를 잇는 웃음소리.

막스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용병, 용병, 그리고 용병.

사방을 둘러봐도 용병뿐, 도망칠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 돈이라면 더 준다고 했잖아!”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말이지?”


붉은 갈퀴 용병단의 대장, 몰든이 막스의 말을 비웃듯이 말했다.

몰든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어려 있었고,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거대한 배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어째서인지 내 직감은 형씨를 데려다주고 받는 푼돈보다, 형씨가 안고 있는 가방의 가치가 더 높다고 말하고 있거든.”

“…!”


본능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던 막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그 모습을 본 몰든이 킬킬 웃었다.

알고 있나? 아니면 정말 직감으로 하는 말인가?

막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 나를 이렇게 대하면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이제 우리 걱정까지 해 주는 거요?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는구만 그려.”

“…이익!”

“걱정하지 마. 형씨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고작 망해가는 가문의 자제 하나 죽었다고 해서 제국이 눈 하나 꿈쩍하겠어?’

“…!”


막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유일한 무기마저 빼앗긴 막스는 후회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비싼 건 맞지만 있는 돈을 탈탈 털면 못 낼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그들에게 의뢰하지 않고 혼자 산에서 내려갈걸. 아니면 제대로 된 용병에게 의뢰할걸.

수많은 후회가 있었지만, 그중에 ‘드래곤 오브를 훔치지 말걸’이라는 후회는 없었다.


“…내 모든 걸 줄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결국 막스는 자존심을 꺾고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 오브가 비싸긴 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야 마침내 그는 탐욕과 자존심을 버렸다.


“흠….”

“만약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당신들의 장비에 마법도 새겨드리겠습니다.”

“오, 마법~”


긍정적인 반응에 막스의 얼굴이 펴졌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일단 살기만 하면 복수할 기회도 생긴다.

그는 속내를 숨긴 채 몰든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무참하게 꺾였다.


“그게 끝이야?”

“…예?”

“마법, 좋지. 근데 그게 형씨를 살려서 후환을 남겨둘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제, 제 마법은 분명 도움이 될-”

“그래. 그건 안다니까?”


몰든의 눈에 번뜩이는 살기를 본 막스는 그제야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을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아지트에 찾아간 그 순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도.

막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도와주세요!”

“어어? 이 새끼 봐라?”

“형님, 죽일까요?”

“내버려둬.”


이 깊은 숲속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알고 그를 습격한 몰든이었기에 막스의 다급한 구조 요청을 재롱부리는 아이를 보듯이 감상했다.

몰든의 예상대로, 꽤 큰 고함이 숲을 가득 메웠지만 그를 도우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났어?”

“허억… 허억…!”


몰든의 움직임에 맞춰 한 발 뒤로 물러나려던 막스가 나무에 가로막혔다.


“오, 오지 마!”


그가 발작하듯 외치며 가방에서 마도구를 꺼내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몰든의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남은 마나를 모두 짜내서 펼친 쉴드도 몰든이 휘두른 검에 파괴되자, 막스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마침내, 막스의 턱 끝까지 차오른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할 때.

“찾았다.”


여린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우욱.”

“우웨에에엑!”

“….”


다 죽어가는 시체 세 구와 함께.


‘좀비…?’

좀비 세 마리와 그들을 이끄는 소녀의 조합에 막스는 죽음의 공포도 잊은 채 벙쪄버렸다.


           


Chapter 77

Chapter 77

제아무리 자유분방한 용병들이라 해도 나름의 규칙은 있었으니. 리베리에서 정한 절대적인 규칙과 문서화 되어 있진 않지만 용병들 사이에서 떠도는 암묵적인 규칙이 바로 그러했다. 그중, ‘의뢰주의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주점에서 술 한 잔과 함께 무용담을 털어 넘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의뢰주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행동은, 용병들 사이에서는 믿고 일을 맡긴 의뢰주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됐다. 기껏 일을 시켰더니 의뢰주의 정보를 팔아먹는 용병을 의뢰주들이 좋게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용병들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위법적인 일이 아닌 이상 사소한 결함 정도는 묵과한 채 넘기곤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나 ‘붉은 갈퀴 용병단’은 달랐다. 붉은 갈퀴의 용병들은 리베리에 속한 용병도 아니었고, 신뢰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 나쁜 양아치 무리. 그럼에도 붉은 갈퀴 용병단이 버젓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용병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 속히 말해 ‘더러운 일’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늘 하던 대로. 알지?” “아유, 그럼요. 흔적도 없이 처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살인. “크흠, 내가 최근에 생긴 취미가 있는데… 젊고 건강한 물건으로 하나 구해줄 수 있나?” “이거이거, 알만한 분이 섭섭하게 왜 이러십니까? 당연히 되고 말고요! 수놈과 암놈. 어떤 놈으로 구해다 드릴깝쇼?” “…크흠흠! 암놈으로 부탁하지.” “예이~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납치. 그 외에도 절도, 강도, 방화 등. 돈만 주면 어떤 반인류적인 일도 선뜻 맡아서 하니, 뒤가 구린 이들에게 붉은 갈퀴 용병단이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였다. “사람 하나를 찾고 싶은데.” 도시에서 꽤나 동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 멀쩡한 외관임에도 어딘가 불길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물 안에 들어간 아시에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막스라는 마법사를 아나?” 발토라에서 줄곧 써온 존댓말이 아닌, 하대에 가까운 반말. 타고난 권위와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말투에 다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왕자였구나….’ 카나와 아시에의 말을 의심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친근하게 말을 거는 데다가 첫인상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에 그가 왕자라는 걸 쉽게 실감할 수 없었던 다은이었으나. 아시에에게서 풍기는, 감히 항거할 생각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에 다은은 그가 왕자라는 새삼스레 실감했다. 그리고 그건 다은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아시에의 앞에 선 용병도 사위를 장악한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 같았으면 누런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하잘것없는 너스레를 늘어놓았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저… 제국의 귀족분이십니까?” “알 거 없다.” ‘…귀족이구나!’ 용병의 머리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아하건대, 필시 제국의 귀족이다…! 그것도 그들이 심심찮게 마주하던 어중이떠중이 귀족이 아닌, 진짜배기 귀족이 분명했다. 실상은 제국의 귀족은커녕, 제국과 적이라고 해도 무방했지만 용병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알고 있나?” “막스… 말입니까?” “그래. 눈썹이 옅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그 말에 용병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찾아온, 상당히 큰 가방을 멘 로브 차림의 남자. 그 남자의 이름이 막스였던 것 같기도 했다. 꼭두새벽부터 찾아와서 자기를 다른 도시까지 데려다 달라고 급하게 의뢰하는 게 의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이 남자와 얽혀 있는 거겠지.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용병이 씨익 웃었다. ‘이거 어쩌면 한탕 칠 기회일 수도.’ 그의 직위는 붉은 갈퀴 내에서 간부와 말단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위에서는 밑에 놈들을 관리 못 한다고 까고, 밑에서는 위에서 시킨 것도 모르고 개새끼니 뭐니 하며 욕한다. 하다못해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모르겠는데, 말단과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다. 중간에 끼여 이리저리 치이던 그에게, 간부가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의 상황은 간부들 몰래 거하게 챙길 기회로 보였다. 눈앞의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곳까지 몸소 찾아온 걸 보면 꽤나 급해 보인다. 높은 분이니 돈도 많을 테고…. 구부정하게 굽었던 용병의 허리가 알게 모르게 쭈욱 펴졌다. “그을…쎄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술을 마셨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용병. 아시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때 왕자 자리에서 용병보다 더한 사람을 수도 없이 상대했던 아시에는 그의 속셈이 투명할 정도로 훤히 보였다. ‘여기에 왔었군.’ 또한 그는 막스가 붉은 갈퀴 용병단에 찾아왔다는 것도 꿰뚫어 보았다. 단순히 아는 거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시에를 보며 침을 삼키면서도, 용병은 막스의 행방을 순순히 털어놓지 않았다. 당연히 의뢰주를 지키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속이 칼칼~한 게, 시원한 게 있으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돈이 없어서 사 먹을 수도 없고. 참 곤란합니다.” 아시에를 진짜배기 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용병은 당당했다. 막스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그 혼자뿐이니, 함부로 해치지 못할 거란 생각으로 한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용기와 만용이 한 끗 차이이듯이, 배짱과 객기도 한 끗 차이였다. 아시에는 붉은 갈퀴 용병단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을 저버린 이들. 그는 그런 이들에게 금화를 나눠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카나.” “응.” 타박. 아시에의 부름에 카나가 나섰다. “…응? 꼬맹이?” 후드를 쓴 작은 체구의 소녀를 본 용병이 턱을 쓸었다. 아시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이 꼬마를 대가로 주시겠다는 겁니까?” 사람을 대가로 받고 일을 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흔한 일도 아닐 뿐. 특히, 이렇게 작은 꼬마를 대가로 주는 일은 붉은 갈퀴 용병단에 오래 있었던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사고파는 건 꽤 품이 드는 일이기에, 간부진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용병은 한번 얼굴이나 보자면서, 다소 떨떠름하게 소녀가 쓴 후드를 젖혔다. 이윽고, 가만히 올려다보는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숨이 턱 막혔다. “…어.” 그동안 수많은 여자를 보고, 또 안아본 그였지만 이런 외모의 소녀는 처음이었다. 풍만한 몸을 좋아하는 그조차 순간 혹하게 만드는 외모. 경매장에 세우면 금화로 꽉 찬 주머니를 몇 개나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참고 기다리면 극상의 미인으로 자라날 것이다. 돈을 받고 팔지, 아니면 집에 가둬두고 클 때까지 기다릴지. 돈을 원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흐, 흠!” 분에 겨운 고민을 하던 용병이 정신을 차렸다. 겨우 마법사 한 놈의 행방을 알려주고 이런 대가를 받을 수 있다니, 아무리 봐도 남는 장사 아닌가. 행여나 마음이 바뀔세라 그는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아시에의 거래를 승낙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푸슉! “더러워.” “…어?” 내 손이, 왜 바닥에? 인지가 먼저였고, 통증이 그 뒤를 따랐다. “으아아악! 내, 내 손이!” 피 분수가 솟는 손목을 붙잡고 절규하는 용병. 그의 손에 응당 붙어있어야 할 오른손은 더러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애초에 아시에는 그와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설령 그럴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거래할 일은 없었고, 그보다 강한 카나를 거래 품목으로 올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거듭된 오답의 대가를 치른 남자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제 입에 쑤셔 박힌 천 뭉치가 아니었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쉿.” 담담한 얼굴로 그의 입에 천 뭉치를 쑤셔 박은 소녀가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댔다. 소녀의 분홍색 눈동자에,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이 비쳤다. 용병은, 소녀의 얼굴이 더 이상 어여삐 보이지 않았다. * * * “흐, 흐으으….” 거대한 나무에 등을 붙인 막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좋게 좋게 갑시다, 형씨. 응? 서로 피곤하게 이러지 말고.” “….” 껄렁껄렁한 목소리와 그 뒤를 잇는 웃음소리. 막스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용병, 용병, 그리고 용병. 사방을 둘러봐도 용병뿐, 도망칠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 돈이라면 더 준다고 했잖아!”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말이지?” 붉은 갈퀴 용병단의 대장, 몰든이 막스의 말을 비웃듯이 말했다. 몰든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어려 있었고,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거대한 배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어째서인지 내 직감은 형씨를 데려다주고 받는 푼돈보다, 형씨가 안고 있는 가방의 가치가 더 높다고 말하고 있거든.” “…!” 본능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던 막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그 모습을 본 몰든이 킬킬 웃었다. 알고 있나? 아니면 정말 직감으로 하는 말인가? 막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 나를 이렇게 대하면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이제 우리 걱정까지 해 주는 거요?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는구만 그려.” “…이익!” “걱정하지 마. 형씨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고작 망해가는 가문의 자제 하나 죽었다고 해서 제국이 눈 하나 꿈쩍하겠어?’ “…!” 막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유일한 무기마저 빼앗긴 막스는 후회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비싼 건 맞지만 있는 돈을 탈탈 털면 못 낼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그들에게 의뢰하지 않고 혼자 산에서 내려갈걸. 아니면 제대로 된 용병에게 의뢰할걸. 수많은 후회가 있었지만, 그중에 ‘드래곤 오브를 훔치지 말걸’이라는 후회는 없었다. “…내 모든 걸 줄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결국 막스는 자존심을 꺾고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 오브가 비싸긴 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야 마침내 그는 탐욕과 자존심을 버렸다. “흠….” “만약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당신들의 장비에 마법도 새겨드리겠습니다.” “오, 마법~” 긍정적인 반응에 막스의 얼굴이 펴졌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일단 살기만 하면 복수할 기회도 생긴다. 그는 속내를 숨긴 채 몰든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무참하게 꺾였다. “그게 끝이야?” “…예?” “마법, 좋지. 근데 그게 형씨를 살려서 후환을 남겨둘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제, 제 마법은 분명 도움이 될-” “그래. 그건 안다니까?” 몰든의 눈에 번뜩이는 살기를 본 막스는 그제야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을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아지트에 찾아간 그 순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도. 막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도와주세요!” “어어? 이 새끼 봐라?” “형님, 죽일까요?” “내버려둬.” 이 깊은 숲속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알고 그를 습격한 몰든이었기에 막스의 다급한 구조 요청을 재롱부리는 아이를 보듯이 감상했다. 몰든의 예상대로, 꽤 큰 고함이 숲을 가득 메웠지만 그를 도우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났어?” “허억… 허억…!” 몰든의 움직임에 맞춰 한 발 뒤로 물러나려던 막스가 나무에 가로막혔다. “오, 오지 마!” 그가 발작하듯 외치며 가방에서 마도구를 꺼내 집어던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몰든의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남은 마나를 모두 짜내서 펼친 쉴드도 몰든이 휘두른 검에 파괴되자, 막스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마침내, 막스의 턱 끝까지 차오른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할 때. “찾았다.” 여린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우욱.” “우웨에에엑!” “….” 다 죽어가는 시체 세 구와 함께. ‘좀비…?’ 좀비 세 마리와 그들을 이끄는 소녀의 조합에 막스는 죽음의 공포도 잊은 채 벙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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