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인물들로 인해 사태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 덕분에 목숨이 연장된 막스가 나무에 등을 기댄 상태 그대로 스르르 땅바닥에 흘러내렸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움직임은 부질없는 발버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했다.
도망칠 여력이 남았다 해도 도망칠 수 없었겠지만.
툭툭.
“아시에. 일어나 봐. 저거 맞아?”
“우, 우욱…! 아, 지에… 다….”
“응, 아지에.”
그래서 저게 막스란 놈 맞냐니까.
카나는 앙증맞은 손으로 아시에의 등을 툭툭 건드리며 재차 물었다.
그러나 아시에는 땅에 얼굴을 처박듯이 한 채로 헛구역질하기 바빴다.
‘…아지에?’
귓가에 들린 낯익은 이름과 자신의 이름에 가까스로 고개를 든 막스는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저놈이 벌써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는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까지 빨리 쫓아올 줄이야.
게다가 그 옆에서 나무를 붙잡고 구역질하고 있는 놈은 그의 옆 공방에서 일하던 마법사 아닌가.
“야, 야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망 잘 보라 하지 않았냐? 아랫놈들 똑바로 관리 안 해? 이게 아주 빠져가지고…. 요즘 살 만하지?”
“…죄송합니다 형님.”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지켜보던 몰든이 부하를 타박했다.
그러나 타박을 준 몰든도, 타박을 들은 부하도 실실 웃으며 이 상황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는 사람이 있나 망보라고 시켜놨는데 아무 소란 없이 통과시켜 놓고 보고도 하지 않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다.
또 어디 짱박혀서 농땡이 부리고 있겠지.
몰든은 끌어올린 입꼬리와 다르게 무감정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불청객을 살폈다.
마법사 한 명, 검사로 보이는 여자 한 명, 마음에 안 들게 생긴 남자 한 명.
그리고 꼬맹이 하나.
케이프를 두른 소녀의 외모를 본 몰든이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그의 취향을 알고 있는 부하들이 소녀의 외모를 보고 그냥 통과시켜 준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던 몰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보고하지 않고 몰래 빼돌렸으면 모를까, 그의 부하들은 그렇게 기특한 짓을 하는 놈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앞에 에델이 직접 빚은 것 같은 외모의 소녀가 나타난 것은 운명이다….
라고, 몰든은 생각했다.
“오늘은 운이 좋네.”
몰든이 누런 이를 사정없이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맛있는 과자를 줄 테니까 이리 오지 않으련?”
츳츳츳.
“…?”
“뭐야? 왜 반응이 없어?”
거리에 지나가는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혀를 튕기며 소녀에게 손짓하던 몰든이 의아하게 눈을 좁혔다.
보통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이면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기 마련인데, 소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그 외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눈치가 빠른 게 마음에 들어 데리고 다니던 부하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형님, 아무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거 같은데요? 아까 일행이랑 말할 때도 다른 말을 썼던 건 같습니다.”
“그래? 어디 대륙 구석에 있는 왕국에서 오기라도 했나?”
몰든의 말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아쉽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면서도,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말 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히려, 사소한 말조차 그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질척질척한 음심이 차오르기도 했다.
“나약해.”
“…그게 사람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 놈 입에서 나올 말이냐?”
“나는 놈이 아니라 년이라 괜찮아.”
“그래 이년아.”
“그치만 빨리 가달라고 했잖아.”
“사람을 짐짝처럼 들고 갈 줄 내가 어떻게 알았냐?”
기력을 조금 회복한 아시에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구역질하던 다른 둘 만큼은 아니지만 시체처럼 창백하던 다은의 안색도 어느 정도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구에에에엑!”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카나가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이래서 마법사들이란.’이라는, 검사우월적 발언을 하는 사이 아시에가 몰든에게 다가갔다.
“붉은 갈퀴의 단장, 몰든.”
“어라라? 얘들아, 나도 꽤 유명해졌나 보다. 이런 샌님도 나를 알아보는 걸 보면 말이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
용병단인지 산적 집단인지.
실제로 하는 일은 산적 무리보다 더하지만, 아무튼 아시에는 그런 그들을 복잡한 심경을 담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너희 뒤에 있는 그 녀석에게 볼일이 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지 않겠나?”
“이런. 우리 의뢰주님한테 볼일이 있는 분이셨구만.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스승님의 공방에서 물건을 훔쳐 갔다.”
“스승님? 공방? 뭐야, 하도 고개가 뻣뻣하길래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도제였어?”
아시에의 곱상한 외모와 훤칠한 키가 내심 마음에 안 들던 몰든은 김빠지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작 도제 따위가 자신을 하대하다니.
몰든의 마음속에 열등감에서 비롯된 저열한 분노가 차올랐지만 그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화를 낼 순 없지.
그렇기에 몰든은 짐짓 차분한 어조를 연기했다.
“…어쭙잖은 마법사와 검사를 믿고 당당한가 본데, 미안하지만 이쪽은 자기를 지켜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말이지.”
“지켜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설마.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뿐이야.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그렇지?”
“도, 도와줘! 날 도와주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 테니…!”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구만.”
세상이 이렇게나 야박하다니까.
어깨를 으쓱인 몰든이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톱니 같은 검날에 부딪힌 햇살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제안을 하나 하지. 여자들과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꺼진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흐. 제법 성질이 나쁜 스승을 모셨나 봐? 눈치가 상당히 빠른걸.”
“불같은 성미가 있는 분이긴 하지.”
“그런 스승을 모시다니 안 됐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
스릉-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병들이 그들의 주변을 포위하며 무기를 빼 들었다.
“이제 그럴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얘들아, 알지?”
“여자들은 내버려두란 말 아닙니까?”
“에이 형님, 저희가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십니까.”
“결국 힘든 길을 가려 하는군.”
“엉?”
공포에 정신이 나가 버린 걸까.
머리를 긁적인 몰든은 영문 모를 아시에의 말을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로 치부했다.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는 얼굴도 분명 그 때문이리라.
“으, 으흐흐흐…! 이제 다 끝이야….”
마법사와 검사. 그리고 몸만 좋은 도제와 꼬맹이 하나.
그에 반해 상대는 수도 훨씬 많은 데다가 하나하나가 사람 죽이는 데 도가 튼 용병들이다.
불청객들의 등장에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막스는 끝내 정신을 놓고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할 거야?”
“어쩌긴. 다 죽여야지.”
“주, 죽여요?”
“살아있어 봤자 사람들에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쓰레기들이다. 쓰레기는 미리미리 치워야지.”
“난 청소부가 아닌데.”
카나가 볼멘소리와 함께 검을 빼 들었다.
그제야 몰든을 비롯한 용병들은 카나에게 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작은 소녀와, 소녀의 몸만한 롱소드.
휘두르기는커녕 제대로 들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마당인데, 그걸 보고 겁을 집어먹는 겁쟁이였다면 남을 해치며 돈을 벌지도 않았을 것이다.
팔이 짧은 탓에 소녀가 든 검의 끝이 땅에 질질 끌리며 흔적을 남겼다.
‘귀여운 것.’
저런 위험한 물건은 얼른 치워버리고 잔뜩 귀여워해 주마.
몰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붉은 갈퀴 용병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꼬마야, 착하지? 그거 내려놓고 이리 오지 않으련?”
“괜히 반항하다 상처라도 나면 아프잖아. 그렇지?”
“…뭐라는 건지.”
“신경 쓰지 마라. 죄다 헛소리뿐이니.”
“그럴 거라곤 생각했어.”
“카, 카나야 화이팅…!”
“으응.”
화이팅해야 할 정도인가?
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은의 응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용병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
어린 소녀를 사지로, 혹은 그보다 더한 지옥으로 몰아넣은 일행의 반응이 지나치게 덤덤했다.
‘뭐, 상관없나.’
잡것들이 끼어들었다면 일이 꽤 귀찮게 흘러갔을 것이다.
어쩌면 소녀에게 생채기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몰든은 편안하게 서서 부하들이 그의 앞에 소녀를 대령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 초, 이 초, 이어서 십 초가 훌쩍 넘었음에도 그의 부하들은 소녀에게 다가간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것들이….”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뻐서 홀리기라도 한 걸까.
부하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자신의 것을 눈에 들이는 부하들에 몰든이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빨리빨리 안 움직여?!”
그러나 여전히 부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가 직접 나서기 위해 한 걸음을 디뎠을 때.
그걸 기다렸다는 양, 소녀에게 다가갔던 부하들의 몸에 비스듬한 실선이 그어지고.
푸슈슈슉-!
털썩!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부하들.
본디 하나였던 그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따로 널브러졌다.
데굴…
“…!”
영혼이 떠난 몸뚱아리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몰든은 헛숨을 삼켰다.
기분 나쁜 웃음을 걸친 얼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죽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사실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닐까.
몰든은 현실을 부정했지만, 그의 몸은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버럭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엔 아까까지 느껴지던 여유의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마법, 그래! 저 마법사가 무슨 수를 썼구나…!”
“저, 저 말입… 우에엑엑!”
몰든은 작은 소녀가 이런 참상을 만들었을 거란 상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픽션에 익숙해진, 다은과 같은 플레이어들도 놀라는 게 카나의 무력인데.
하는 짓이 반인륜적일 뿐, 실리아인의 상식을 지닌 몰든에게는 비상식적인 걸 넘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한편, 몰든의 삽질을 보던 카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엑스퍼트라.’
좀스러운 짓이나 하는 놈답게 보잘것없는 경지네.
엑스퍼트들이 들었다면 뒷목을 붙잡고 쓰러질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카나였다.
부하들보단 강해 보이지만 딱 그 정도.
힘을 합쳐 덮친다면 못 이길 놈들도 아닌 거 같은데 부하들은 왜 이런 놈을 따른 걸까.
‘으음, 모르겠네.’
아무튼 이유가 있었으니까 따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나는 눈으로 남은 놈들을 훑었다.
남은 놈들은 대장을 포함해서 일곱.
방금 해치웠던 놈들보다 강한 놈들이었지만 카나에게 위협이 될 만한 놈들은 아니었다.
‘카나에게’는.
“저니.”
“으, 응?”
뒤에서 마음 편히 감상하던 다은이 갑작스러운 카나의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가, 갑자기 왜 나를 부르는 거지?
무심코 대답했던 다은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나야, 아니지? 응? 난 카나가 상냥한 아이라고 믿어.”
“응. 고마워.”
“헤, 헤헤.”
카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무해한 웃음에 다은이 마음을 놓으려던 찰나.
“빨리 와. 훈련해야지.”
“….”
그녀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는 말이 들려왔다.
“오늘은 이미 했잖아!”
“원래 훈련은 많이 할수록 좋아.”
“그…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돈만 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라며!”
그야말로 정론 그 자체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다은이 정신을 차렸다.
“걱정하지 마. 절대 죽게 놔두진 않을 거야.”
“…감동적이긴 하지만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해?”
“그건 마음대로 하고, 빨리 와.”
결국 카나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다은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그녀를 불쌍하게 보는 아시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미적대며 검을 뽑아 드는 그녀의 행동엔 의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나가 상냥하다는 말 취소야….”
“…왜?”
“…몰라서 물어?”
갸웃.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하는 카나.
말랑하고 얄미운 볼을 꼬집어 주겠다는 생각이 다은의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게 어딜 봐서 상냥한 거야!”
“으응….”
목숨의 위협 없이 실력을 늘릴 수 있게 도와주는 거니 상냥한 거 아닌가?
무심한 말에 다은은 참지 못하고 카나의 양볼을 잡고 쭈욱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