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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8

쓰레기장.

사전적 의미로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도록 정하여 놓은 곳’이지만.

대륙의 서부… 한때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지역에 사는 이들이 말하는 쓰레기장에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인간과 상종 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모여 사는 곳.

락시아에서 넘어온 마족들이 모여 사는 곳.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장이었다.

* * *

소란스럽던 도시에서 나와 락시아로 향하는 길.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은이 불쑥 말을 걸었다.

“카나는 알고 있었어? 마족들이 사는 곳을 쓰레기장이라고 부른다는 거.”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거였어?”

난 또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있나 했는데, 별것도 아니었네.

“알고 있었어. 그게 왜?”

“으음…. 그냥,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더 마족을 싫어하는구나 싶어서.”

“쓰레기장이면 약과지. 더 심한 말도 많은걸.”

“이게 약과라고?”

“응. 이를테면-”

‘삐───’라든가, ‘삐이이이이─’라든가.

“…잠깐 카나야!”

“‘삐이이──’ 같은 것도 있고, 읍-”

“나, 나쁜 말 멈춰!”

가늘고 길쭉한 손바닥이 내 입을 막았다.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나를 억죄는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은의 손은 집요하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으브브브-”

“그런 나쁜 말은 쓰면 안 돼! 알겠지?”

“…푸하!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알려준 건데.”

“아무튼 안 돼. 나쁜 말을 쓰면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리고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머리도 나빠지고 귀여운 얼굴도 못생겨진다구.”

“효능이 대단하네.”

그런데, 귀족과 왕족 놈들을 보면 머리가 나빠지는 건 딱히 나쁜 말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치들이 쓰는 말에 담긴 의도는 불순했지만 말투 자체는 고상했거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천박하게 생각하는 놈들이라 간단한 말도 이중삼중으로 꼬아서 말하곤 했지.

칭찬인가 싶으면 욕이었고, 욕인가 싶으면 욕이었고.

어라, 생각해 보면 욕밖에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듣고 있으면 화났던 건가?

“저니.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 거 같아?”

“어… 재능이 있다는 말이면 칭찬 아닌가? 나라면 기분 좋을 거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저 말의 의미는, ‘너는 너무 무식해서 평생 검이나 휘두르면서 살겠네’라는 뜻이다.

내 말을 들은 다은이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너무 비약 아니야? 순수하게 칭찬하는 걸 수도 있잖아.”

“글쎄. 직접 겪어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올걸.”

원래 사람은 어떤 말을 들어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와 닿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딱히 그녀를 설득할 생각은 없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정확히는 화제를 다시 원래의 궤도에 돌려놓았다.

“아무튼 왜 약과라고 했는지 알겠어?”

“뭐, 뭐…. 확실히 그런 것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긴 한데….”

다은이 마족에 대한 악감정이 그득그득 담긴 말들을 떠올렸는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도 쓰레기장이라니. 조금 그렇긴 하네.”

상대적으로 낫다는 거지, 결국 거기 사는 마족들을 싸잡아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이니 다은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건, 마족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인간들이 매도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자책하는 부류도 있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거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수많은 아르디나 대륙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죄인.

그리고, 책무를 등지고 도망친 죄인.

그렇기에 마족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죄인인 자신들은 이름을 붙일 자격도 없다는 이유로.

“…책무? 무슨 책무?”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피이….”

애초에 우리가 락시아로 가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니까.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다은에게 대꾸하며 앞을 보았다.

지평선 저 끝으로, 짙은 마기와 함께 죄인들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죄인들의 땅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마기가 나를 위협했지만, 겉에 두른 마나를 뚫지 못해 애꿎은 혓바닥만 날름거렸다.

언뜻 살펴본 셀린이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이 정도 마기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거기까지는 예상했고, 문제는 다은인데….

우리 중 가장 약한, 그렇기에 가장 걱정되는 인물인 다은을 돌아보았다.

“후우…. 괘, 괜찮아. 별문제 없을 거야.”

다행히 일행 중 최약체인 다은도 아직까지는 멀쩡해 보였다.

얼굴에 핏기가 좀 없긴 한데, 그건 긴장해서 그런 것 같고.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이고 있는 걸 보면 마도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드래곤 오브로 만들었는데 아무 효과도 없었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정말로 중요한 건 락시아에 들어가서도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지.

“어둡네요….”

“어둡네요?”

“어둡다는 뜻이야.”

“아하.”

그 말대로, 아직 해가 질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은 상당히 어두웠다.

분명히 위에서는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는데, 정작 시야는 공기 중의 마기 때문에 불투명한 가림막을 통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곳에 왔으면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지 않을까.

“아, 마을이 보여요.”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살포시 찡그리고 있던 셀린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짙은 마기 사이로 보이는 목책.

셀린도 아마 저걸 발견하고 외친 거겠지.

저 멀리 보이는 목책은 얼핏 보면 성벽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았고, 또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응, 상당히 견고해 보이긴 하는데… 무너뜨리고자 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카나야?”

“아니, 내가 한다는 게 아니야.”

마물이라든가, 몬스터라든가… 혹은 인간들을 말한 거지, 나를 말한 게 아닌걸.

내가 행동하는 걸 전제로 말한 거였으면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추측성 말을 하지 않았겠지.

성벽도 가를 수 있는데 저깟 목책을 못 부수겠어?

“하긴 그렇겠네.”

이런 말로 납득시키니 기분이 묘하긴 한데, 아무튼 다은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저 멀리 보였던 목책이 우리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정지!”

어렵지 않게 목책의 입구를 찾아 마을로 들어가려고 할 때, 머리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과 머리 양옆에 검은색 뿔이 달린 남자가 감시탑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배 타러 왔는데.”

“뭐라고?!”

남자가 버럭 소리치자 흠칫 몸을 움츠린 다은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락시아를 침공한다고 오해한 거 아니야?”

그녀가 걱정스레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 안 들린다! 크게 말해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러게….”

이어진 남자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다은.

나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니가 대신 말해줘.”

“왜? 못 알아듣겠어?”

“그랬으면 대답도 안 했지.”

“그렇네. …어라? 그라닉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빨리. 기다리고 있잖아.”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굳이 재촉할 필요 없이 카나가 직접 말하면 되잖아.”

“크게 말하기 귀찮아.”

언성을 높여야 한다니. 그런 귀찮은 짓이 또 있을까.

당당하게 말하니 다은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내가 옷자락을 쭉쭉 당기니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얄미운 꼬맹이…’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은데, 아마 기분 탓이겠지?

“락시아로 향하는 배를 타러 왔어요!”

“…락시아?”

고래고래 소리치던 남자가 조용해졌다.

댕-

대앵-!

그리고 그 대신 감시탑에 있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책 안에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쿠구구구-

묵직한 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목책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당연히 마족들의 무리였다.

어림잡아 열 명 정도로 보이는 마족들은 무기를 꼬나쥔 채 우리에게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 카나야… 손 좀 빌려줄래?”

경계심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는지, 다은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얼굴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그녀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왜 긴장해?”

“왜냐니…? 싸움이라도 나면 어떡해….”

“저번엔 잘만 싸웠잖아.”

“아, 아니 그건….”

다은이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외팔 검사를 만났을 때 자신만만하게 싸우겠다고 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겁쟁이로 돌아온 모습.

봐. 역시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니까.

잠시 승리의 기쁨을 누린 나는 다은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 정도 수준에 내가 질 리 없으니까.

멍하니 나를 보던 다은이 말갛게 웃었다.

“카나야. 나, 너한테 반해도 돼?”

“…그건 좀 곤란한데.”

“아하하, 농담이야! 동생한테 반할 리 없잖아!”

그래도, 멋졌어.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정말 긴장할 필요 하나 없었네. 이렇게 듬직한 동생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

제법 낯부끄러운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어찌 됐든 긴장은 풀렸으니 된 거 아닐까?

“락시아엔 무슨 용무지?”

그러는 사이 우리 근처까지 다가온 마족 중 한 명이 나서서 물었다.

무장으로 보건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남자가 이 자리에 모인 마족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듯했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내가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셀린이 나섰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신성력이 부드럽게 주변을 맴돌더니 마족들에게 향했다.

갑자기 날아든 신성력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들은, 나긋하게 몸을 어루만지는 신성력을 느끼곤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며 무기를 내렸다.

“어때요. 설명이 됐을까요?”

“…에델 님을 모시는 수녀님이셨군요.”

다소 강압적이던 남자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에?”

언제 적대했냐는 듯 정중하게 변한 태도에 다은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하던 행동을 이어갔다.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손짓하는 남자.

남자의 손짓을 따라 우리를 포위했던 마족의 무리가 양옆으로 물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해야 할 일을 하신 거죠. 그것보다, 들어가서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에델 님을 모시는 분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셀린이 우리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허락받았으니 어서 들어가요.”


           


Chapter 88

Chapter 88

쓰레기장. 사전적 의미로는 ‘쓰레기를 내다 버리도록 정하여 놓은 곳’이지만. 대륙의 서부… 한때 그라시스의 영토였던 지역에 사는 이들이 말하는 쓰레기장에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인간과 상종 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모여 사는 곳. 락시아에서 넘어온 마족들이 모여 사는 곳.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장이었다. * * * 소란스럽던 도시에서 나와 락시아로 향하는 길.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은이 불쑥 말을 걸었다. “카나는 알고 있었어? 마족들이 사는 곳을 쓰레기장이라고 부른다는 거.”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거였어?” 난 또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있나 했는데, 별것도 아니었네. “알고 있었어. 그게 왜?” “으음…. 그냥, 사람들이 내 생각보다 더 마족을 싫어하는구나 싶어서.” “쓰레기장이면 약과지. 더 심한 말도 많은걸.” “이게 약과라고?” “응. 이를테면-” ‘삐───’라든가, ‘삐이이이이─’라든가. “…잠깐 카나야!” “‘삐이이──’ 같은 것도 있고, 읍-” “나, 나쁜 말 멈춰!” 가늘고 길쭉한 손바닥이 내 입을 막았다.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나를 억죄는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은의 손은 집요하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으브브브-” “그런 나쁜 말은 쓰면 안 돼! 알겠지?” “…푸하!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알려준 건데.” “아무튼 안 돼. 나쁜 말을 쓰면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리고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머리도 나빠지고 귀여운 얼굴도 못생겨진다구.” “효능이 대단하네.” 그런데, 귀족과 왕족 놈들을 보면 머리가 나빠지는 건 딱히 나쁜 말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그 치들이 쓰는 말에 담긴 의도는 불순했지만 말투 자체는 고상했거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천박하게 생각하는 놈들이라 간단한 말도 이중삼중으로 꼬아서 말하곤 했지. 칭찬인가 싶으면 욕이었고, 욕인가 싶으면 욕이었고. 어라, 생각해 보면 욕밖에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듣고 있으면 화났던 건가? “저니.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 거 같아?” “어… 재능이 있다는 말이면 칭찬 아닌가? 나라면 기분 좋을 거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저 말의 의미는, ‘너는 너무 무식해서 평생 검이나 휘두르면서 살겠네’라는 뜻이다. 내 말을 들은 다은이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너무 비약 아니야? 순수하게 칭찬하는 걸 수도 있잖아.” “글쎄. 직접 겪어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올걸.” 원래 사람은 어떤 말을 들어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잘 와 닿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딱히 그녀를 설득할 생각은 없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정확히는 화제를 다시 원래의 궤도에 돌려놓았다. “아무튼 왜 약과라고 했는지 알겠어?” “뭐, 뭐…. 확실히 그런 것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긴 한데….” 다은이 마족에 대한 악감정이 그득그득 담긴 말들을 떠올렸는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도 쓰레기장이라니. 조금 그렇긴 하네.” 상대적으로 낫다는 거지, 결국 거기 사는 마족들을 싸잡아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이니 다은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건, 마족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인간들이 매도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자책하는 부류도 있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거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수많은 아르디나 대륙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죄인. 그리고, 책무를 등지고 도망친 죄인. 그렇기에 마족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죄인인 자신들은 이름을 붙일 자격도 없다는 이유로. “…책무? 무슨 책무?”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피이….” 애초에 우리가 락시아로 가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니까.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다은에게 대꾸하며 앞을 보았다. 지평선 저 끝으로, 짙은 마기와 함께 죄인들의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죄인들의 땅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마기가 나를 위협했지만, 겉에 두른 마나를 뚫지 못해 애꿎은 혓바닥만 날름거렸다. 언뜻 살펴본 셀린이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이 정도 마기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거기까지는 예상했고, 문제는 다은인데…. 우리 중 가장 약한, 그렇기에 가장 걱정되는 인물인 다은을 돌아보았다. “후우…. 괘, 괜찮아. 별문제 없을 거야.” 다행히 일행 중 최약체인 다은도 아직까지는 멀쩡해 보였다. 얼굴에 핏기가 좀 없긴 한데, 그건 긴장해서 그런 것 같고.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이고 있는 걸 보면 마도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드래곤 오브로 만들었는데 아무 효과도 없었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정말로 중요한 건 락시아에 들어가서도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지. “어둡네요….” “어둡네요?” “어둡다는 뜻이야.” “아하.” 그 말대로, 아직 해가 질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은 상당히 어두웠다. 분명히 위에서는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는데, 정작 시야는 공기 중의 마기 때문에 불투명한 가림막을 통해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곳에 왔으면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지 않을까. “아, 마을이 보여요.”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살포시 찡그리고 있던 셀린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짙은 마기 사이로 보이는 목책. 셀린도 아마 저걸 발견하고 외친 거겠지. 저 멀리 보이는 목책은 얼핏 보면 성벽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았고, 또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응, 상당히 견고해 보이긴 하는데… 무너뜨리고자 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카나야?” “아니, 내가 한다는 게 아니야.” 마물이라든가, 몬스터라든가… 혹은 인간들을 말한 거지, 나를 말한 게 아닌걸. 내가 행동하는 걸 전제로 말한 거였으면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추측성 말을 하지 않았겠지. 성벽도 가를 수 있는데 저깟 목책을 못 부수겠어? “하긴 그렇겠네.” 이런 말로 납득시키니 기분이 묘하긴 한데, 아무튼 다은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저 멀리 보였던 목책이 우리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정지!” 어렵지 않게 목책의 입구를 찾아 마을로 들어가려고 할 때, 머리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과 머리 양옆에 검은색 뿔이 달린 남자가 감시탑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배 타러 왔는데.” “뭐라고?!” 남자가 버럭 소리치자 흠칫 몸을 움츠린 다은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락시아를 침공한다고 오해한 거 아니야?” 그녀가 걱정스레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 안 들린다! 크게 말해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러게….” 이어진 남자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다은. 나는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니가 대신 말해줘.” “왜? 못 알아듣겠어?” “그랬으면 대답도 안 했지.” “그렇네. …어라? 그라닉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빨리. 기다리고 있잖아.”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굳이 재촉할 필요 없이 카나가 직접 말하면 되잖아.” “크게 말하기 귀찮아.” 언성을 높여야 한다니. 그런 귀찮은 짓이 또 있을까. 당당하게 말하니 다은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내가 옷자락을 쭉쭉 당기니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얄미운 꼬맹이…’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은데, 아마 기분 탓이겠지? “락시아로 향하는 배를 타러 왔어요!” “…락시아?” 고래고래 소리치던 남자가 조용해졌다. 댕- 대앵-! 그리고 그 대신 감시탑에 있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목책 안에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쿠구구구- 묵직한 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목책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당연히 마족들의 무리였다. 어림잡아 열 명 정도로 보이는 마족들은 무기를 꼬나쥔 채 우리에게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 카나야… 손 좀 빌려줄래?” 경계심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는지, 다은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얼굴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그녀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왜 긴장해?” “왜냐니…? 싸움이라도 나면 어떡해….” “저번엔 잘만 싸웠잖아.” “아, 아니 그건….” 다은이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외팔 검사를 만났을 때 자신만만하게 싸우겠다고 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겁쟁이로 돌아온 모습. 봐. 역시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니까. 잠시 승리의 기쁨을 누린 나는 다은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 정도 수준에 내가 질 리 없으니까. 멍하니 나를 보던 다은이 말갛게 웃었다. “카나야. 나, 너한테 반해도 돼?” “…그건 좀 곤란한데.” “아하하, 농담이야! 동생한테 반할 리 없잖아!” 그래도, 멋졌어.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정말 긴장할 필요 하나 없었네. 이렇게 듬직한 동생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 제법 낯부끄러운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어찌 됐든 긴장은 풀렸으니 된 거 아닐까? “락시아엔 무슨 용무지?” 그러는 사이 우리 근처까지 다가온 마족 중 한 명이 나서서 물었다. 무장으로 보건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남자가 이 자리에 모인 마족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듯했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내가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셀린이 나섰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신성력이 부드럽게 주변을 맴돌더니 마족들에게 향했다. 갑자기 날아든 신성력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들은, 나긋하게 몸을 어루만지는 신성력을 느끼곤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하며 무기를 내렸다. “어때요. 설명이 됐을까요?” “…에델 님을 모시는 수녀님이셨군요.” 다소 강압적이던 남자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에?” 언제 적대했냐는 듯 정중하게 변한 태도에 다은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하던 행동을 이어갔다.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손짓하는 남자. 남자의 손짓을 따라 우리를 포위했던 마족의 무리가 양옆으로 물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해야 할 일을 하신 거죠. 그것보다, 들어가서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에델 님을 모시는 분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셀린이 우리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허락받았으니 어서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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