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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9

마족들의 마을은 그라시스의 마을과 닮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그라시스와 마족들의 땅은 바로 옆에 붙어 있고, 그 때문에 예전부터 부대끼는 일이 많았으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거겠지.

“분위기가 묘하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다은의 소감은 이러했다.

“웃고는 있지만 뭔가 그늘진 느낌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글쎄.”

그렇게 물어봐도 난 모르는걸.

“척척박사 카나 님도 모르는 게 있어?”

“…놀리는 거야?”

“아니!”

아무리 봐도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다은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남자를 따라 길거리를 걷고 있으니 주변에서 경계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마족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마족들도 인간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낀 내가 케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남자가 슬쩍 운을 띄웠다.

“멀쩡한 사람을 보는 건 드문 일이라서 그런 거 같습니다.”

“멀쩡한 인간이요?”

“예. 저희가 본 대부분의 인간은 마기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상태였으니까요. 아니면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인간이거나.”

“…아.”

남자는 그가 본 인간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그가 꺼내지 않은 말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겠지.

다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재잘대던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 어떤 건물 앞에 도착한 남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여기는…?”

“영주님의 관저입니다.”

“관저?”

나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좀 더 크고 화려한 건 맞다.

맞긴 한데, 높으신 분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엄이 있지는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좀 잘 사는 상인의 집 같은 느낌.

끼이익.

그때, 관저의 문이 열렸다.

“영주님도, 관저도 아니라니까….”

관저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문이 열리며 나온 인물은, 목소리만큼이나 나른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가뜩이나 마족 특유의 핏기 없는 얼굴에, 거뭇한 다크서클까지 더해지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부스스한 흑단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긴 검은색 뿔이 삐죽 솟아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남자의 뿔보다 더 큰 크기였다.

“뿔이….”

그러나 그녀의 오른쪽 뿔은 누군가가 부러뜨리기라도 한 듯, 다른 쪽 뿔의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아, 이거…?”

거친 절단면을 그대로 보이는 뿔을 본 다은이 중얼거리자 여인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잘린 뿔을 매만졌다.

“잘렸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여쭤보면 실례일까요?”

“실례일 것까지야….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상처인걸….”

그 말 그대로, 여인의 얼굴엔 오롯이 자부심만이 어려 있었다.

“락시아에 있을 때 차원수와 싸우다가 생긴 상처야…. 꽤 강한 놈이었지…. 물론 내 손으로 쓰러뜨렸지만.”

엣헴.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가슴을 쭉 폈다.

상당히 당당한 몸짓이었지만, 다은보다 어려 보이는 데다가 나른한 인상 탓에 위엄있어 보이진 않았다.

꼭 그녀가 사는 관저처럼.

“영주님. 일단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 그럴까…?”

관저 앞에서 쑥덕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를 향하는 시선도 늘어났다.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했는지 주변을 맴도는 마족들이 확연히 많아졌다.

조심스러운 남자의 말에 여인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

“그럼 전 다시 가보겠습니다.”

“응. 수고….”

남자가 떠나가고, 관저에는 여인과 우리만 남았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에 우리를 안내한 여인이 주전자를 들다가 멈칫했다.

“차 줄까…? 아, 인간들은 이런 거 마시면 안 되려나…?”

“네? 왜요?”

“찻잎에 마기가 있으니까…. 여기 올 때까지 멀쩡한 걸 보면 괜찮을 거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전 그냥 물로….”

“난 마실래.”

“응…?”

내 말에 여인이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은 그녀의 눈이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마시겠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이거, 좀 쓴데 괜찮겠어…?”

“…달달한 건 없어?”

“원래 있었는데 다 떨어졌어….”

“그럼 안 마실래.”

“그래…. 그쪽은…?”

“부탁드릴게요.”

결국 차를 대접받은 건 셀린뿐이었다.

향긋하면서도 씁쓰름한 차 향기가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달칵.

“후우…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

찻잔을 내려놓은 여인이 긴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나는 아티샤…. 아티라고 부르든 티샤라고 부르든 상관없으니까 마음대로 불러….”

느릿하게 말을 마친 아티샤가 차를 홀짝 마셨다.

“저니예요. 편하게 저니라고 불러주세요.”

“카나리아.”

“셀린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를 따라 우리도 통성명을 마쳤다.

듣는 둥 마는 둥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티샤가 찻주전자를 들었다.

쪼르르…

그리고 빈 찻잔에 찻물을 채우며 우리에게 물었다.

“인간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우리는 락시아에 갈 거야.”

멈칫.

“…락시아에…?”

잔으로 흘러 들어가던 찻물이 일순간 멈췄다.

“내가 아는 락시아는 하나뿐인데….”

“그 락시아 맞아. 너희들의 고향, 마대륙 락시아.”

“흐음….”

피곤한 기색을 걷어낸 아티샤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옆에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갈 수 있는 능력이 되냐 안 되냐는 차치하고… 인간들이 왜 거길 가려고 하는 걸까…?”

“경계심이 많네.”

“너 같은 강자가 락시아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으응, 일리 있는 말이야.”

내 경지를 꿰뚫어 본 듯한 말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강자가 나의… 나아가서 내 일족의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한다니.

이건 일단 의심할 수밖에 없겠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심에 억울함을 토로하는 대신 빠르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네 일족의 숙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왔어. …라고 하면 답이 되겠어?”

“…인간들이 알 만한 내용이 아닌데.”

탁.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아티샤의 눈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급기야는 부러진 뿔에서 불길한 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찮게시리.

나는 왱왱거리는 모기를 쫓아내듯, 손을 휘둘러 마기를 걷어내며 신분을 보증해 줄 사람을 불렀다.

“셀린.”

“네.”

내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셀린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강도로 신성력을 뿜어냈다.

황금색 물결이 방 안을 잠식했던 마기를 밀어냈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마기를 밀어내는 신성력을 본 아티샤의 눈이 왕방울처럼 변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니…. 성녀라도 되는 거야…?”

“아직은 아니랍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네에….”

아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라면 말이 되지….”

역시 셀린을 데려오길 잘했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신성력을 보여주면 알아서 수긍하니 얼마나 좋아.

물론 본 목적은 일행을 마기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다재다능하단 건 좋은 거니까.

“잠깐만요!”

“응…?”

자기만 쏙 빼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발을 동동 구르던 다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숙원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응…?”

얜 뭐지?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다은을 보는 아티샤.

차갑다면 차가운 그녀의 시선에 잠시 몸을 움찔거렸던 다은이었지만,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맞섰다.

“다른 둘은 아는 것 같은데… 너는몰라…?”

“저는 그냥 카나를 따라서 온 거라서요. 물어봐도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하면서 안 알려주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말하는 건 실례야.”

“…이럴 때 정론을 꺼내 들지 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담.

다은은 은근히 화가 많단 말이지.

나는 아티샤에게 허락을 구했다.

“말해줘도 돼?”

“상관없어….”

아티샤는 생각 이상으로 쿨하게 허락했다.

마족들은 락시아에서 떠나온 걸 부끄럽게 생각하니 허락한다 하더라도 조금은 주저할 줄 알았는데.

허락도 받았겠다, 더 이상 뜸을 들이면 다은이 삐질지도 모르니 슬슬 말해줄까.

“마족의 원래 이름은 ‘정화자 일족’이야.”

“정화자 일족?”

“응.”

이 말을 들으면 다른 의문이 덩달아 따라붙을 것이다.

“뭘 정화하는데?”

예상대로 다은은 몹시 정석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기.”

마기를 정화하여 일반적인 마나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마족, 정화자 일족이 에델에게 부여받은 숙명이자 의무였다.

실리아 세계에는 마나라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마나를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나 편리한 힘 정도로 착각하지만, 마나라는 에너지의 실상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기 같은 것이다.

문제는 공기가 그러하듯 마나 또한 오염된다는 것이었다.

여러 생명체의 몸을 거칠 때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는 오염되고 탁해졌는데, 이렇게 오염된 마나는 생명체에게 도리어 악영향을 미쳤다.

그걸 안 에델은 한 가지 시스템을 만들었다.

오염된 마나를 한곳으로 모으고 정화한 후, 정화된 마나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는.

실리아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순환하는 시스템을.

“그 오염된 마나가, 사람들이 말하는 ‘마기’야.”

“그러면 마대륙 락시아는….”

“응. 맞아.”

에델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종착지.

오염된 마나를 정화하여 원래의 마나로 돌려놓는 곳.

그것이 마대륙 락시아의 정체였다.

마기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 쓰레기장이라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물론 사람들이 그걸 알고 그렇게 불렀을 리는 없지만.

“그리고 그 거대한 정화소에서 정화를 맡고 있던 게-”

“바로 우리, 정화자 일족이야….”

“듣고 나니 별거 없지?”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은이 눈을 깜박였다.

“…아뇨. 완전 별거 있는데요?”


           


Chapter 89

Chapter 89

마족들의 마을은 그라시스의 마을과 닮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그라시스와 마족들의 땅은 바로 옆에 붙어 있고, 그 때문에 예전부터 부대끼는 일이 많았으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거겠지. “분위기가 묘하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다은의 소감은 이러했다. “웃고는 있지만 뭔가 그늘진 느낌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글쎄.” 그렇게 물어봐도 난 모르는걸. “척척박사 카나 님도 모르는 게 있어?” “…놀리는 거야?” “아니!” 아무리 봐도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다은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남자를 따라 길거리를 걷고 있으니 주변에서 경계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마족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마족들도 인간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낀 내가 케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남자가 슬쩍 운을 띄웠다. “멀쩡한 사람을 보는 건 드문 일이라서 그런 거 같습니다.” “멀쩡한 인간이요?” “예. 저희가 본 대부분의 인간은 마기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상태였으니까요. 아니면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인간이거나.” “…아.” 남자는 그가 본 인간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그가 꺼내지 않은 말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겠지. 다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재잘대던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 어떤 건물 앞에 도착한 남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다 왔습니다.” “여기는…?” “영주님의 관저입니다.” “관저?” 나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좀 더 크고 화려한 건 맞다. 맞긴 한데, 높으신 분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엄이 있지는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좀 잘 사는 상인의 집 같은 느낌. 끼이익. 그때, 관저의 문이 열렸다. “영주님도, 관저도 아니라니까….” 관저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문이 열리며 나온 인물은, 목소리만큼이나 나른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가뜩이나 마족 특유의 핏기 없는 얼굴에, 거뭇한 다크서클까지 더해지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부스스한 흑단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긴 검은색 뿔이 삐죽 솟아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남자의 뿔보다 더 큰 크기였다. “뿔이….” 그러나 그녀의 오른쪽 뿔은 누군가가 부러뜨리기라도 한 듯, 다른 쪽 뿔의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아, 이거…?” 거친 절단면을 그대로 보이는 뿔을 본 다은이 중얼거리자 여인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잘린 뿔을 매만졌다. “잘렸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여쭤보면 실례일까요?” “실례일 것까지야….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상처인걸….” 그 말 그대로, 여인의 얼굴엔 오롯이 자부심만이 어려 있었다. “락시아에 있을 때 차원수와 싸우다가 생긴 상처야…. 꽤 강한 놈이었지…. 물론 내 손으로 쓰러뜨렸지만.” 엣헴.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가슴을 쭉 폈다. 상당히 당당한 몸짓이었지만, 다은보다 어려 보이는 데다가 나른한 인상 탓에 위엄있어 보이진 않았다. 꼭 그녀가 사는 관저처럼. “영주님. 일단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 그럴까…?” 관저 앞에서 쑥덕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를 향하는 시선도 늘어났다.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했는지 주변을 맴도는 마족들이 확연히 많아졌다. 조심스러운 남자의 말에 여인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 “그럼 전 다시 가보겠습니다.” “응. 수고….” 남자가 떠나가고, 관저에는 여인과 우리만 남았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에 우리를 안내한 여인이 주전자를 들다가 멈칫했다. “차 줄까…? 아, 인간들은 이런 거 마시면 안 되려나…?” “네? 왜요?” “찻잎에 마기가 있으니까…. 여기 올 때까지 멀쩡한 걸 보면 괜찮을 거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전 그냥 물로….” “난 마실래.” “응…?” 내 말에 여인이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은 그녀의 눈이 다시 내 얼굴로 향했다. “마시겠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이거, 좀 쓴데 괜찮겠어…?” “…달달한 건 없어?” “원래 있었는데 다 떨어졌어….” “그럼 안 마실래.” “그래…. 그쪽은…?” “부탁드릴게요.” 결국 차를 대접받은 건 셀린뿐이었다. 향긋하면서도 씁쓰름한 차 향기가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달칵. “후우…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 찻잔을 내려놓은 여인이 긴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나는 아티샤…. 아티라고 부르든 티샤라고 부르든 상관없으니까 마음대로 불러….” 느릿하게 말을 마친 아티샤가 차를 홀짝 마셨다. “저니예요. 편하게 저니라고 불러주세요.” “카나리아.” “셀린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를 따라 우리도 통성명을 마쳤다. 듣는 둥 마는 둥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티샤가 찻주전자를 들었다. 쪼르르… 그리고 빈 찻잔에 찻물을 채우며 우리에게 물었다. “인간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우리는 락시아에 갈 거야.” 멈칫. “…락시아에…?” 잔으로 흘러 들어가던 찻물이 일순간 멈췄다. “내가 아는 락시아는 하나뿐인데….” “그 락시아 맞아. 너희들의 고향, 마대륙 락시아.” “흐음….” 피곤한 기색을 걷어낸 아티샤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옆에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갈 수 있는 능력이 되냐 안 되냐는 차치하고… 인간들이 왜 거길 가려고 하는 걸까…?” “경계심이 많네.” “너 같은 강자가 락시아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으응, 일리 있는 말이야.” 내 경지를 꿰뚫어 본 듯한 말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강자가 나의… 나아가서 내 일족의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한다니. 이건 일단 의심할 수밖에 없겠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의심에 억울함을 토로하는 대신 빠르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네 일족의 숙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왔어. …라고 하면 답이 되겠어?” “…인간들이 알 만한 내용이 아닌데.” 탁.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아티샤의 눈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급기야는 부러진 뿔에서 불길한 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찮게시리. 나는 왱왱거리는 모기를 쫓아내듯, 손을 휘둘러 마기를 걷어내며 신분을 보증해 줄 사람을 불렀다. “셀린.” “네.” 내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셀린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강도로 신성력을 뿜어냈다. 황금색 물결이 방 안을 잠식했던 마기를 밀어냈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마기를 밀어내는 신성력을 본 아티샤의 눈이 왕방울처럼 변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니…. 성녀라도 되는 거야…?” “아직은 아니랍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네에….” 아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라면 말이 되지….” 역시 셀린을 데려오길 잘했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신성력을 보여주면 알아서 수긍하니 얼마나 좋아. 물론 본 목적은 일행을 마기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다재다능하단 건 좋은 거니까. “잠깐만요!” “응…?” 자기만 쏙 빼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발을 동동 구르던 다은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숙원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응…?” 얜 뭐지?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다은을 보는 아티샤. 차갑다면 차가운 그녀의 시선에 잠시 몸을 움찔거렸던 다은이었지만,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맞섰다. “다른 둘은 아는 것 같은데… 너는몰라…?” “저는 그냥 카나를 따라서 온 거라서요. 물어봐도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하면서 안 알려주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말하는 건 실례야.” “…이럴 때 정론을 꺼내 들지 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담. 다은은 은근히 화가 많단 말이지. 나는 아티샤에게 허락을 구했다. “말해줘도 돼?” “상관없어….” 아티샤는 생각 이상으로 쿨하게 허락했다. 마족들은 락시아에서 떠나온 걸 부끄럽게 생각하니 허락한다 하더라도 조금은 주저할 줄 알았는데. 허락도 받았겠다, 더 이상 뜸을 들이면 다은이 삐질지도 모르니 슬슬 말해줄까. “마족의 원래 이름은 ‘정화자 일족’이야.” “정화자 일족?” “응.” 이 말을 들으면 다른 의문이 덩달아 따라붙을 것이다. “뭘 정화하는데?” 예상대로 다은은 몹시 정석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기.” 마기를 정화하여 일반적인 마나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마족, 정화자 일족이 에델에게 부여받은 숙명이자 의무였다. 실리아 세계에는 마나라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마나를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나 편리한 힘 정도로 착각하지만, 마나라는 에너지의 실상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기 같은 것이다. 문제는 공기가 그러하듯 마나 또한 오염된다는 것이었다. 여러 생명체의 몸을 거칠 때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는 오염되고 탁해졌는데, 이렇게 오염된 마나는 생명체에게 도리어 악영향을 미쳤다. 그걸 안 에델은 한 가지 시스템을 만들었다. 오염된 마나를 한곳으로 모으고 정화한 후, 정화된 마나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는. 실리아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순환하는 시스템을. “그 오염된 마나가, 사람들이 말하는 ‘마기’야.” “그러면 마대륙 락시아는….” “응. 맞아.” 에델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종착지. 오염된 마나를 정화하여 원래의 마나로 돌려놓는 곳. 그것이 마대륙 락시아의 정체였다. 마기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 쓰레기장이라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물론 사람들이 그걸 알고 그렇게 불렀을 리는 없지만. “그리고 그 거대한 정화소에서 정화를 맡고 있던 게-” “바로 우리, 정화자 일족이야….” “듣고 나니 별거 없지?”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은이 눈을 깜박였다. “…아뇨. 완전 별거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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