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래?’
빤히 보고 있길래 먹고 싶은 건가 해서 통 크게 다리 하나를 줬더니 또 멀뚱멀뚱 보고만 있고.
독이라도 탔을까 걱정하는 건가?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거였으면 아까 멱을 땄을 텐데 말이야.
쫓아오는 것을 알면서도 눈 감아 주고 먹을 것까지 줬더니 쓸모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네.
어차피 죽어도 부활하면서.
“에, 그러니까… 아씨, ‘먹으라고요’를 어떻게 말하지?”
아르키쉬로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여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고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고기를 유심히 관찰하더라.
‘그냥 뺏을까.’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마침내 여자가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정신없이 먹는 게 아닌가.
너무 맛있게 먹는 통에 나도 모르게 먹는 것도 잊고 쳐다보게 되더라.
응, 코카트리스 고기가 맛있긴 하지.
혹여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했는데 역시 내 입맛은 정상이었어.
“아, 크흠!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신나게 먹던 여자가 내 시선을 느끼고 멋쩍게 웃었다.
먹으라고 준 거라 딱히 멋쩍게 굴 필요 없는데 말이지.
“이거 말이 안 통하니까 답답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할걸. 혹시 여기 그라닉 아는 사람 없어? …그래, 있을 리가 없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는 여자.
이내 무언가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니.”
“…?”
“못 알아들은 건가? 저. 니.”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다시 한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자기소개인가?
“저니.”
“…!”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아마도 이름이 저니인 듯한 여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
“….”
“…?”
이어지는 침묵에 밝아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의문으로 물들었다.
통성명이란 서로 이름을 알려주는 것.
따라서 한쪽이 먼저 이름을 말했으면 다른 한쪽도 이름을 말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만, 난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제가요? 이름을요? 왜요?
케이프를 뒤집어쓰고 가리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과 통성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른 사람과 더 엮이고 싶지도 않고.
‘너는 너무 딱딱해. 생긴 건 이렇게 귀여운데 하는 행동을 보면 꼭 남자애 같다니까.’
…나도 알아 가리드.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무의식적으로 목에 찬 초커를 향해 가던 손을 멈췄다.
그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꽃밭으로 향했다.
‘왜 꽃을 키우냐고? 예쁘니까 키우는 거지, 이유가 꼭 필요해? 넌 네 외모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해. 네 얼굴이 귀엽지 않았으면… 어후, 말을 말자. …악!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말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심통이 나서 부러 꽃을 힘주어 꺾었다.
가리드가 유독 좋아하던 분홍색 꽃을 꺾어 든 나는 묘 앞으로 걸어갔다.
묘 앞에 꽂힌 크림슨 이지스가 오늘따라 더 붉게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라시스… 최…. 그다음은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애지중지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도 놓고 쭈뼛거리며 내 뒤를 따라온 저니가 비석에 적힌 글귀를 더듬더듬 읽었다.
“그라시스 최고의 방패. 여기 잠들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 특별히 알려주었다.
친구를 데려온 건 아니니까 착각하진 마.
그라닉을 할 줄 아는 걸 보면 좋아할 거 같아서 따라오는 걸 봐준 것뿐이니까.
크림슨 이지스 앞에 분홍색 꽃들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
안타깝게도, 방패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 * *
“아무리 봐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지?”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오며 저니가 말했다.
동서남북 상하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저니와 대화를 나눌 만한 일행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이 있었으니까.
“비석에 적힌 글은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뭘 할지부터 정할까?”
묘지기가 친히 읽어주었다고 해도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계어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 외계어를 들이밀고 읽어주었다고 해서 뜻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라시스 최고의 방패. 여기 잠들다.’라는 뜻이라 함
“오, 뭐야? 벌써 해석한 사람이 있어?”
-능력자들 많네
-하긴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ㅋㅋ
-최고의 방패?
“그거부터 수소문해 보는 것도 괜찮겠네.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무한테나 붙진 않을 테니까.”
물론 묘비에 글귀를 적은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일 수도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지 어쩌겠어.’
한편으로는 한 손에는 파이프 담배를 들고 다른 손에는 돋보기를 든, 추리 소설 속 탐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밌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가장 앞에 서서 나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더 짜릿한 일이었다.
미친 듯이 뻥튀기된 시청자 수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젠 체념한 지 오래인 저니였다.
-근데 왜 내려옴? 걍 거기 계속 있으면 안 됨?
-ㄹㅇ 묘지기 보고 싶었는데
“친구네 집에 묵으려고 해도 눈치 보이는데 친분도 없는 사람 집에 묵을 순 없잖아. 그리고 내가 계속 있고 싶다고 해서 있을 수 있남? 묘지기가 허락해야지.”
무엇보다,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걸겠어.
저니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묻힌 묘지 앞에 서 있던 묘지기의 등을 떠올렸다.
수많은 플레이어를 좌절하게 만들던 냉혹한 모습과 다르게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분위기.
사람은 때론 아무 방해 없이 혼자 상념에 잠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저니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내려온 건 그 때문이었다.
“그라닉 공부, 그라시스 역사 탐구, 정보 획득… 히야, 할 거 많다. 일복 터졌네.”
손가락을 접으며 할 일을 꼽던 저니가 혀를 내둘렀다.
누가 칼을 들이밀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 하기 싫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익명의 후원자’ 님의 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다시 올라가면 안 돼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Atomic’ 님의 십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저 사람 벌써 50만 원은 쓰지 않았나?;
-저거 진짜 아토믹임?
-그런 것 같은데
-해외 유명 스트리머도 보는 방송ㄷㄷㄷ
‘…칼은 아니어도 비슷한 걸 들이밀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여기서 물러나면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굿바이, 스트리머 저니. 헬로우, 일반인 신다은.
같은 느낌으로.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이를 좀 더 먹었을 때라면 몰라도 저니는 아직 스트리머를 은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기세가 많이 죽긴 했지만 아직 해가 떠 있는 하늘.
울창한 나무 때문에 조금은 어둑한 산속을 거닐던 저니의 눈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들어왔다.
줄기에 삐죽삐죽한 가시가 달린, 붉은색의 꽃.
“만약 오후 네 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ㅖ?
-아 사막여우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채팅창이 일제히 의문을 표했다.
저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오늘부터 내 목표는 여우 길들이기야!”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 주변에서 맴돌아라.
경우에 따라선 귀찮은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라닉 공부도 짬짬이 하고.”
여러 언어를 익힌 경험이 있는 저니인지라 그라닉을 익히는 건 나름 자신 있었다.
어차피 묘지기가 있는 산에 주야장천 박혀 있을 순 없을 테니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정보 수집은 너희들도 도와줄 거라고 믿어.”
-저희요??
-???
-돈 주나요?
“너희들도 궁금할 거 아냐. 상부상조 하자 이거지. 돈? 그런 건 열정으로 때워.”
-🔥🔥🔥🔥
-재주는 우리가 넘고 돈은 방장이 흠…
-레볼루숑.. 해야겠지?
-🔥🔥🔥🔥
-당당하게 열정페이를 말하시는 걸 보니 역시 헬조선 스트리머답네요~ 라고 하면 안 되겠죠?
“어허, 나쁜 말 금지야.”
불타오를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불길이 거세다.
‘그래도 다른 말들은 쏙 들어갔네.’
다시 올라가지 않겠다는 의견을 확실히 표명했음에도 생떼를 부리던 이들이 사라졌다.
카메라에 보이지 않게 웃은 저니가 큼큼 헛기침했다.
“알았어. 팬카페에 도움이 되는 정보 올려주면 기프티콘 쏠게. 다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도움이 된 오십 명 정도 뽑아서.”
-흠 나쁘지 않네
-오십 명 정도면 꽤 널널한 듯
여론은 꽤 괜찮았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트리머에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당첨 인원도 오십 명으로 상당히 넉넉한 수라서 조금의 수고를 들이면 뽑힐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근데 무슨 기프티콘?
“음… 그러게. 뭘 주면 좋을까. 가능하면 실리아 온라인과 관련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 그래!”
잠시 고민하던 저니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눈을 빛냈다.
“실리아 온라인 이용권은 어때? 10개월 이용권.”
-오
-오
-555
실리아 온라인의 월간 이용권 가격은 만 원.
여러 개월 구매 시 할인이 있다고 해도 10개월이면 무려 십만 원에 육박하는 돈이다.
그걸 오십 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뿌린다고 하니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저니에게도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투자를 통해 얻을 민심을 생각하면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이벤트를 통해 새로 안착하는 시청자들도 있을 테니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득인 묘수.
그러나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니 이벤트 한다는데?]
팬카페에 그라시스에 대한 유용한 정보글 쓰면 실리아 온라인 10개월 이용권 뿌린다고 함
기간은 오늘부터 일주일
꼭 그라시스에 관한 게 아니라 묘지기에 대한 단서가 될 거 같으면 허용
50명이나 뽑는다고 하니까 관심 있으면 ㄱㄱ
[Korea 스트리머 어디서 봐야 합니까?]
검색해도 찾을 수 없다.
도움을 원한다.
[듣보 스트리머 하나 때문에 개 시끄럽네]
그럴 시간에 겜이나 해라ㅡㅡ
그래야 내가 뽑힐 확률이 올라가지
그녀의 방송을 시청하던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그리고 서구권의 사람들까지.
국적과 관계없이 묘지기에 관심 있는 이들은 그녀의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 모든 시청자가 그녀가 개최한 이벤트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부라 해도 어마어마한 수였다.
상품을 탐내고 달려든 사람, 묘지기의 정체를 하루빨리 밝히고 싶은 사람, 그저 팬심으로 저니를 돕고 싶던 사람.
각자의 목적을 품고 온갖 사람이 달려들었으니 저니의 팬카페가 국경 없는 팬카페가 된 것은 어쩌면 자명한 순리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