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단다.”
여인의 형상을 한 신이 말했다.
듣기만 해도 황송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창조주, 만물의 어머니가 말씀하시는데 어찌 감히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 있겠는가.
거기까지 들은 나는 에델에게 말했다.
“…미화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야! 내 진신을 마주한 아이들은 다 그렇게 반응한다고!”
“흠….”
…왜지?
아무리 봐도 나사 서너 개는 빠진 것 같은 여신인데.
“네가 이상한 거야!”
…아무튼,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 앞에 선 여신은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권능을 나눠주었다.
더러운 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정화의 권능을.
“그런 권능이 있으면 직접 하면 되잖아.”
“신이라는 자리는 할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거든. 시스템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혹시 쳐들어오는 놈은 없는지 끊임없이 살펴보는 것만 해도 바쁘단 말이야.”
“근데 못 막았잖아.”
“…자꾸 그럴래?”
“미안. 계속 해.”
여신은 권능을 내리며 그들에게 사명을 주었다.
그 사명은 오염된 마나를 깨끗하게 정화하여 세계에 돌려놓는 숭고한 일이었다.
여신과 대면하고 권능을 받은 것도 모자라 세계를 유지하는 숭고한 사명을 맡게 되다니….
피조물들은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사명을 다하겠다고 여신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여신의 뜻에 따라 수십, 수백… 어쩌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사명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여신에게 받은 권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오염도 정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던 권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져 작은 티끌 하나 정화할 수 없게 되었고, 끝내는 그들의 안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절망했다.
“그 아이들은 권능을 잃어버린 게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자신들이 사명을 다하길 게을리했기 때문에 여신이 권능을 거두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차원수와 싸우던 에델이 수세에 몰리면서 그녀의 힘은 점점 약화됐다.
정화의 권능은 본래 에델이 가지고 있던 것.
정화자 일족의 힘은 그들과 이어진 에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때문에 에델의 힘이 약해지면서 그들이 에델에게 받은 권능도 약해지던 끝에 결국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연이은 공세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에델은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했다.
“그 아이들에겐 미안하다고 생각해. 내가 부족한 탓에 그런 아픔을 겪게 했으니….”
락시아는 오염된 마나가 모여드는 곳.
그것들을 깨끗하게 씻어 세계로 돌려보낼 정화의 권능이 사라지자, 마기가 점점 락시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화자 일족은 달랐다.
애초에 오염된 마나를 정화하기 위해 창조된 데다가, 오랜 시간 정화의 권능을 다룬 덕에 그들의 몸은 서서히 마기에 저항할 수 있게 변해갔다.
마기에 물든 머리카락과 눈이 검게 변했다.
그와 반대로 피부는 새하얗게 질렸으며, 머리 양쪽에 새까만 뿔이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새까만 뿔은 그들의 몸이 마기를 원활하게 다룰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덕에 마기에 잠식된 락시아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시간이 더 흘러 마기가 짙어지자 버틸 수 없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화자 일족이라고 해도 역량의 차이는 있었고, 정화의 권능을 잃은 후에 태어난 이들은 전 세대보다 마기에 더 취약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마기에 취약해지는 몸과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마기.
이대로 가다간 일족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렇기에 정화자 일족은 결단을 내렸다.
“에델이시여… 부디, 사명을 버리고 떠난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들을 아직 버틸 수 있는 이들, 그리고 죽어도 사명을 등지지 않겠다는 이들을 제외하고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나아갔다.
바다 건너, 그들이 살 수 있는 대륙을 향해.
그 결과-
“전쟁이 일어났구나.”
그것이 1차 종족 전쟁, 그리고 이어진 2차 종족 전쟁의 전말이었다.
에델에게 모든 진상을 전해 들은 나로서는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사명이 중요한가?
“네가 이상한 거라고 말했잖아. 내 손을 거쳐 태어난 아이들이니 나를 보면 본능적으로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
“…잘 모르겠어.”
부모 같은 느낌인 걸까.
가리드를 떠올렸던 나는 그 뒤를 이어 떠오르는 친부모의 얼굴에 얼굴을 구겼다.
에델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영혼의 본능이니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무튼 이 정도면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 충분한 설명이 됐지?”
“일단은.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는데?”
“간단해.”
그녀가 겹쳤던 두 손을 풀었다.
잡혀있던 나비가 풀려나듯, 그녀의 손에서 신성력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그 아이들을 해방해 줘.”
그 아이들을 감싸고 있는, 사명이라는 무거운 족쇄에서.
“직접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으면 진작 했지. 안타깝게도 내 힘은 이미 너무 약해져서 락시아에 영향을 줄 수 없어. 게다가, 직접 손을 썼다가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고 놈들에게 발각될 가능성도 있거든.”
“…무능력해.”
“네~ 네~ 무능력한 여신이라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능력 있는 카나 쨩이 무능력한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는데요~?”
“…카나 쨩은 또 뭐야.”
“요새 지구에서 유행하는 말인데? 귀엽지 않아?”
“우웩.”
“….”
에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었다.
* * *
“카나야?”
“아, 응.”
에델과의 대화를 생각하던 나는 나를 부르는 다은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나를 ‘카나 쨩’이라고 부르는 에델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었어.
“그럼 마족… 아, 정화자 일족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한 대로 불러….”
“앗, 네. 그러면 마족들의 숙원은 락시아로 돌아가서 원래의 사명을 다하는 건가요?”
“글쎄에…. 일단 난 그렇긴 해….”
“일단?”
아티샤의 말에 다은뿐 아니라 나도 의문을 표했다.
“요즘 애들은 딱히 사명감 같은 걸 갖고 있지 않거든…. 개중에는 에델 님을 원망하는 녀석들도 있고…. 세상이 어떻게 될련지….”
쯧.
아티샤가 혀를 찼다.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해 세상 걱정까지, 연계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낯선 사람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들어….”
“…왜. 뭐.”
“아, 아니야! 난 절대 카나 같다고 생각 안 했어!”
나를 흘깃거리던 다은이 내 말에 화들짝 놀랐다.
생각 안 했기는.
근거 없는 험담을 한 죄에, 거짓말로 인한 괘씸죄까지 추가해 벌을 내렸다.
“꾸엑!”
다은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아티샤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다은에게 눈길 한 점 보내지 않았다.
“나도 뿔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락시아에 남아 있었을 거야….”
뿔은 마족들이 마기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기관.
아직 한쪽이 남아 있어서 마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쪽이 망가진 탓에 아티샤는 락시아 전체에 깔린 짙은 마기를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족도 아니고 인간이 우리의 숙원을 들어준다고 하다니….”
이거 참 신기한걸.
아티샤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홀짝였다.
“카나 님은 그냥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인간이지, 다를 게….”
“에델 님과 직접 대면하고 그분의 부탁을 받으신 분인걸요.”
“…에델 님이? 이런 꼬마한테 부탁을 하셨다고…?”
“네. 정말이에요.”
“….”
…꼬마.
뭐, 그럴 수 있지.
내 외형이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니까 아티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는 내 면전에다 대고 꼬마라는 말을 한 그녀를 용서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꼬마라는 말에 앙심을 품어서 하는 게 아니야.
“왜. 못 믿겠어 할망구?”
“…할망구?”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예의가 부족한 꼬마네에….”
“어렸을 때 가정 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
“…헉! 피, 필살기를 쓰다니!”
어느새 일어난 다은이 제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
내 자학 아닌 자학에 아티샤도 말문이 막혔다.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지.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꿀릴 게 뭐가 있겠어?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
아티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 그보다 카나! 이렇게 젊은 분한테 할망구가 뭐야! 나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 아니지…? 헉, 그렇다면 언니라고 부르지 않던 것도 설마…!”
“설마는 무슨.”
나는 망상 열차에 탑승한 다은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렸다.
“마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어. 노화 속도는 굉장히 느리고.”
그러니 외형은 어려 보여도 정말 어린 게 아니다.
물론 실제로 나이가 어릴 수도 있으니 물어는 봐야겠지만.
“카나처럼?”
“응?”
“카나도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잖아.”
“…응. 나처럼.”
비록 한쪽 뿔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그녀가 풍긴 기세는 상당히 흉흉했다.
나는 그를 통해 전성기 때의 그녀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필시 마족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했겠지.
에델의 말에 의하면 실리아 세계에 속한 생명체가 강해지는 덴 제한이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마족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테니, 아티샤는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많은 시간을 쏟았을 것이다.
…라고 나는 추측했고, 내 말을 들은 아티샤가 발끈하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맞는 듯했다.
아티샤가 꼬리를 내리자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화해할까?’
‘응….’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하던 아티샤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믿기는 힘들지만 믿어볼게….”
“도와주시겠다는 거예요?”
“일단 들어는 보고….”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모르는데 수락부터 할 순 없잖아.
아티샤의 말에 몸을 반쯤 일으켰던 다은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크게 두 가지야.”
“두 가지…?”
“락시아까지 타고 갈 배. 그리고 항로를 알고 있고 배를 몰 수 있는 선장.”
락시아 안에서 길을 찾는 건 어떻게든 되겠지.
마기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이에게 그런 걸 부탁할 순 없잖아.
“그런 거라면 들어줄 수 있어…. 배는 충분히 있고, 배 운전은 내가 해주면 되니까….”
“아티샤가 직접요?”
“싫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티샤는 영주님이잖아요. 영주님이 배를 몰 줄 안다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너희들이 생각한 영주 같은 게 아니라 마땅히 부를 명칭이 없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야….”
“그렇군요…. 그래도,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거예요?”
“어차피 락시아 인근의 마기를 버틸 정도로 강한 녀석을 찾기도 힘들걸….”
거기에서 배를 몰 줄 아는 녀석을 찾는 건 더 힘들 거고.
아티샤는 그렇게 말하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러면 부탁드려도-”
“아, 그런데 지금은 안 돼….”
“…에?”
잘 흘러가는 분위기에 제동을 거는 말.
고개를 갸웃하며 아티샤의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