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이 크루모의 그림자를 사냥하기 위해 떠나고.
다은은 아티샤의 관저에 혼자 남겨졌다.
심지어 집주인조차 집을 비우고 떠난 탓에, 다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티샤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님인 다은이 집주인이 없는 집을 멋대로 헤집고 다닐 순 없었으니까.
“하아….”
침대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보던 다은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봤더라면 ‘그러다 땅 꺼지겠어!’라고 외치며 등짝을 때릴 정도로 깊은 한숨이었다.
“약하니까….”
다은은 카나의 말을 곱씹었다.
‘그 녀석은 사천왕 중 최약체였지’에서 최약체를 맡고 있는 사람.
그녀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따라갔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으리란 것도.
아니.
도움이 안 되기만 하면 다행이지, 다은의 상냥한 동료들은 그녀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민폐 그 자체.
비유를 하자면 물을 잔뜩 머금은 통나무 정도가 아닐까.
“그치만… 마냥 지켜만 보고 있기는 싫었는걸.”
만약 크루모의 그림자를 토벌하러 간 일행이, 특히 카나가 다쳐서 오기라도 하면 가만히 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다은은 자신이 가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긴 하네….”
자신이 부린 고집 때문에 카나가 얼마나 곤란했을지.
다은은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작은 소녀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약ㅋㅋㅋ하니까ㅋㅋㅋㅋㅋㅋㅋ
-??? : 너는 우리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다
-약하다는 이유로 파티에서 추방당했더니 치트 능력을 각성해서 날 버린 파티원들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ㄴ어우; 이건 좀 빡세네;
-어차피 저니 님은 약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을 거예요ㅠㅠ 기운 내세요ㅠㅠㅠ
-그래도 방장 정도면 강한 편 아님?
-ㅇㅇ 아님
-강하긴 하지. 수틀리면 카나에몽 도와줘 하면 되자너~
-아ㅋㅋㅋ 이거였네
다은의 방 시청자들은 그녀의 불행을 보며 웃기 바빴다.
얼핏 보면 그녀를 위로하는 것 같은 채팅도 자세히 보면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
속히 말해 ‘돌린다’, 혹은 ‘멕인다’라고 하는 부류의 채팅.
후.
짧게 숨을 토한 다은이 방송 화면을 전환했다.
그녀가 방송을 종료할 때 쓰는 아웃트로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 이따 또 하게 되면 하고.”
-??
-?
-진짜 지랄 ㄴ;;;
-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감????
-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가지마
-엄마나추워엄마나추워엄마나추워엄마나추워
-응~ 방송 종료해봐~ 올 때까지 숨 참으면 그만이야~
-라고 써있는데요?
“그럼 안녕.”
시청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지만 다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송을 종료했다.
이따든 내일이든, 방송을 켜면 난리가 나겠지.
다은은 성난 시청자들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채팅창이 벌써부터 눈에 그려졌다.
‘미래의 나야, 부탁해!’
그러나 그건 미래의 자신이 감당할 몫.
미래의 그녀가 ‘멍청한 년… 무책임한 년…’ 등, 온갖 말로 그녀를 신나게 씹었지만 현재의 다은은 그저 상쾌하기만 했다.
“이제 뭘 할까….”
방송도 껐겠다, 로그아웃하고 집안일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다은의 손에 딱딱하고 기다란, 그리고 서늘한 물건이 만져졌다.
다은이 사용하는 롱소드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검을 바라봤다.
‘약하니까.’
다은의 머릿속에서 카나의 목소리가 녹음기를 튼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됐다.
“약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래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셀린까지 만류하는 것이 내심 충격이었던 다은이 볼멘소리를 했다.
“검술 연습이나 할까.”
두고 봐. 열심히 연습해서 카나의 오뚝한 콧대를 콱 눌러줄 테니까.
실현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운 다짐이었으나 어찌 됐든 동기 부여가 되면 그만 아니겠는가.
검을 집어 들고 관저를 나서는 다은의 기세는 출사표를 내고 전쟁에 나서는 장군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맹렬했다.
하루 사이에 소문이 돌았는지, 마족들은 어제와 다르게 다은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어제는 호기심 20, 경계심 80이었다면 오늘은 호기심 80, 경계심 20이 된 시선.
다은은 그 시선 중 하나를 붙잡고 수련할 만한 빈터가 있는지 물어봤다.
“아하, 저쪽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한 마족 덕분에 쉽게 빈터를 찾아온 다은.
그곳은 말 그대로 빈터였다.
“빈터를 알려달라고 했으니 당연한 거지만.”
수련을 하고 싶은 거라면 수련장을 알려주겠다는 마족의 말을 정중하게 거절한 건 다은이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습하는 건 조금 그래.”
다은은 그녀가 헬스장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헬스장 고인물들이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아직도 기억했다.
물론 결은 좀 다르겠지만…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같은 시선을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건 익숙하다.
“분명 이렇게…였지?”
자세를 교정해 주던 작은 손을 떠올리며 다은이 자세를 잡았다.
예전에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검 손잡이의 감촉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스스로 수련하는 날이 오다니….
그야말로 시청자들이 놀라고, 친구들이 경악하며, 카나가 질투하…지는 않겠지.
다은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는 검.
다른 사람이 봤다면 감탄했을, 상당히 위력적인 검격이었으나 정작 검술을 펼친 다은은 얼굴을 살포시 찌푸렸다.
“…여전히 모르겠어.”
마나는 어떻게 다루는 걸까.
스킬을 사용하면 검에 마나가 실리긴 하지만 다은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것.
그것이 다은이 원하는 경지였으나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언젠가, 카나에게 어떻게 해야 마나를 잘 다룰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마나?’
‘응. 나도 카나처럼 마나를 쓰고 싶어서.’
‘이미 마나를 쓰고 있…. 아, 그랬지.’
다은의 말을 들은 카나는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달라면 알려줄 순 있는데.’
‘-있는데?’
‘일단 검부터 연습해.’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카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못 깨우치면 직접 알려줄게.’
‘으, 으응…. 부탁할게.’
분명 고마운 말인데 불안감이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아무튼, 그렇게 카나에게 도움을 약속받은 다은이었지만 여전히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도움 없이 해내는 걸 카나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유키 님은 알고 있으려나….”
왠지 유키 님은 알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다은은 중얼거리며 마나를 다루기 위해 이리저리 용을 썼다.
물론, 그녀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갔다.
“후우….”
수련에 집중하던 다은은 내내 검을 휘두르던 어깨와 팔이 뻑적지근한 걸 느끼며 검을 집어넣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어쩌면 몇 시간일지도.
몸은 고단해도 무아지경으로 수련에 몰두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 다은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로 열심히 했으니 한 걸음, 아니 반걸음 정도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꼬르륵-
“앗.”
택도 없는 생각이라고 지적하는 듯이 다은의 배가 타이밍 좋게 울렸다.
근처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벌써 배가 꺼졌다니. 얼른 돌아가서 밥이나 먹어야겠….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다은은 어차피 돌아가봤자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관저에 있는 식재는 다 마기에 물들어 있고….
그냥 여기서 먹는 게 나을지도.
“아니야. 사실 크루모의 그림자라는 놈이 이름만 거창한 놈이라서 벌써 해치우고 돌아와 있을 수도 있잖아.”
응응, 카나는 강하니까 정말 그럴지도 몰라.
좋아. 관저로 돌아가자.
우왕좌왕.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빈터를 수놓던 다은의 발자국이 마침내 행선지를 정했다.
관저를 향해 돌아가려던 다은은 문득, 하늘이 어두워진 걸 눈치챘다.
“…응?”
비가 오려고 그러나?
“비 오면 골치 아픈데….”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다은.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후우웅-
세찬 바람이 다은의 머리카락을 때렸다.
그러나 다은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추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늘을 뒤엎은 거대한 그림자.
다 타버린 재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저게….”
뭐야?
다은이 의문을 표하려고 할 때.
콰아아아-
검붉은 화염이 지상에 쏟아져 내렸다.
* * *
갸웃.
“여기가 맞는데….”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던 아티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해?”
“확실해…. 봐…. 여기 흔적이 남아 있잖아….”
“으음.”
나는 거대한 발톱 자국과, 여기저기 널린 몬스터들의 사체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그래 보이긴 하는데.
녀석의 둥지로 보이는 곳에는 크루모의 그림자는커녕, 크루모의 그림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의 그림자라니. 뭔가 이상한 말이네.
“찾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드래곤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둥지에 침입한 걸 느끼고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 우리 일행은 주변을 수색하며 몇 시간째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안 오네.”
“안 오네….”
“안 오네요.”
여전히 녀석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둥지를 옮긴 게 아닐까요?”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아티샤가 말했다.
“음….”
원래 같았으면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고 아티샤를 타박했겠지만.
예감이 좋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굳이 입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사기가 떨어지는 효과밖에 더 있겠어?
“그나저나 정말 마을이랑 가까이 있긴 하네.”
이제까지 마찰이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로.
집중하면 마을도 보일 거 같은데.
시험 삼아 마을 방향을 보던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티샤.”
“응…?”
“혹시 크루모의 그림자라는 게, 검은색 비늘을 가진 와이번처럼 생긴 몬스터야?”
“응… 그런데…?”
“응.”
아티샤와 내가 느낀 불길한 예감의 원인이 이거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망했어.”
공격 당하기 전에 공격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무래도 우리만이 아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