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발생했을 땐 가스와 전기를 차단하고 낙하물이 없는 공간으로 신속하게 이동해야 한다.
만약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경우, 튼튼한 탁자 등의 구조물 아래로 들어가서 몸을 보호한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큰소리로 화재가 발생했음을 알리고 코와 입을 젖은 수건 등으로 가린 후 낮은 자세로 대피한다.
다은은 그 외에도 태풍, 해일, 눈사태, 심지어 전쟁이 발생했을 때 행동 요령까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녀가 궁금해서 직접 찾아본 것도 있었고, 안전 교육 등을 통해 알게 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맹세컨대, 이런 상황에 관해 교육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드래곤이 습격했을 때의 행동 요령 같은 게 지구에 있을 리 없으니까.
‘아니… 찾아보면 있긴 하려나.’
좀비 사태 발생 시 행동 요령도 있는 마당에 없을 이유는 또 없지 않은가.
최근 헌터물이 유행했으니까 그런 걸 써놓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걸 본다고 해서 과연 도움이 될까.
다은은 회의적이었다.
“도, 도망쳐!”
“꺄아아악!”
커다란 날개가 스칠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입에서 뿜어낸 불덩이가 땅을 불태우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뜨거운 열기가 볼을 훑고 지나가자 다은이 정신을 차렸다.
“도망, 도망가야 해….”
하지만, 대체 어디로?
건물들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있는데?
“일단 어디로든 가자…!”
아무것도 없는 휑한 빈터에 있어봤자 노리기 좋은 표적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까지는 다은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관심이 없기를 바랄 순 없다.
때문에 다은은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나가 졌을 리 없어. 그냥 길이 엇갈린 것뿐일 거야.’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나선 다은 앞에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길거리의 광경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건 다은뿐만이 아니었다.
불타오르는 집에서 뛰쳐나와 어디론가 달려가는 마족, 아이를 꼭 끌어안고 숨을 죽이고 있는 마족.
그리고, 다은이 어제 봤던 마족도 있었다.
“빨리 공격해!”
“하, 하지만 공격이 닿지 않습니다!”
“이런 씨발! 마법은 장식이냐! 활이든 마법이든 써서 공격하라고! 이대로 마을이 불타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냐?!”
“대장님!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돌이라도 던져!”
하늘을 향해 마기로 이루어진 마법과 화살, 돌멩이 같은 것들이 솟구쳤다.
대부분은 날갯짓이 불러온 바람에 휘말려 스치지도 못했고, 겨우 닿은 것들도 먼 거리를 이동한 탓에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단한 비늘에 막혀 유의미한 피해를 낳지 못했다.
불합리해.
이래서 제공권이 중요하단 거구나.
“…도울 수 있을까?”
하늘과 땅의 거리.
드래곤과 자신의 거리.
그 둘을 가늠해 보던 다은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
길게 재볼 것도 없다.
검기를 날리는 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검기는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을 수 없다.
설령 닿는다 해도 비늘을 뚫지 못하고 사라지겠지.
마족들이 쏘던 마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심코 말아쥔 그녀의 주먹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 정말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린 거였구나.”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감정이 다은에게 성큼 다가왔다.
발끝부터 끈적하게 차오르는 무력감.
어린 시절의 다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 감정이 또다시 그녀를 좀먹으려 했다.
“아니야.”
짝!
그러나 다은은 그것에 매몰되지 않았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제 뺨을 때린 다은이 눈을 부릅떴다.
민폐를 끼친 거 맞아.
카나를 곤란하게 한 것도 맞고.
하지만, 그것들이 지금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되지는 않잖아.
그런 것들은 다시 만났을 때 사과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지, 이대로 주저앉아서 피해자 행세해 봤자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후, 하….”
다은이 심호흡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해도 싸우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도와주세요! 건물이 무너져서…!”
“바로 갈게요! 조금만 버티세요!”
끙차…!
다은이 힘을 주자 무거운 건물 잔해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강인한 육체로도 쉽지 않은 일.
그녀의 이마에 비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돼, 됐어요!”
쿵!
“하아… 하아… 켁, 콜록!.”
다은은 건물에 깔린 마족이 무사히 빠져나온 걸 확인하자마자 잔해를 손에서 놓았다.
충격으로 인해 일어난 뿌연 먼지를 잔뜩 들이마신 그녀가 거세게 기침했다.
“감사, 감사합니다!”
“인간들은 다 우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콜록…! 아, 아니에요. 그보다, 여긴 위험하니까 어서 도망가세요.”
반지 덕분에 마기에 오염될 걱정이 없는 다은으로서는 그들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녀를 향해 건네는 감사 인사를 대충 흘리며 그들을 보낸 다은이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드래곤이라는 재난을 맞이한 마을을 숨 돌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인명 구조에 힘쓰는 다은.
그녀의 노력 덕분에 큰 난리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
그럼에도 구하지 못한 사람은 있었지만.
건물 잔해 사이로 삐져나온 팔.
힘없이 축 늘어진 팔 아래로 붉은 피 웅덩이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후우.”
다은은 핏기 하나 없는 팔을 애써 외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거 알잖아.
지금은 다른 곳에 집중하자.
그녀는 최면하듯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으아아앙! 엄마아!”
“-아이?’
별안간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다은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흙먼지와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한 아이가 한때는 골목이었던 곳에 서서 목청껏 울고 있었다.
단순히 엄마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러나 다은에게 아이의 사정을 추측할 정도로 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
거대한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크다고 한들, 비명과 고함 소리에 비해 특출나게 큰 것도 아닐 텐데.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져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동공은 아이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은도 그것을 눈치챘다.
“-위험!”
차마 내뱉지 못한 뒷말을 삼키며 다은이 몸을 날렸다.
쿠당탕!
“윽…!”
급하게 몸을 날린 탓에 착지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몸에서 올라오는 미약한 통증을 무시하며 다은이 품 안의 아이를 살렸다.
많이 놀랐는지 울음도 멈추고 그녀를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이.
꽤 격한 움직임이었지만 최대한 보호하려고 한 게 도움이 됐는지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다은의 옷자락을 적셨다.
“괜찮아?”
“응, 으응….”
카나보다 두어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아이.
물론 실제 나이는 훨씬 어리겠지만, 외형만 따지면 그랬다.
“엄마를 잃어버린 거야?”
다은은 아이에게 질문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만약 단순히 엄마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면.
무너지는 집에서 아이를 내보내고,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머리 위로 건물의 파편이-
‘꺄아아아!’
비극적인 장면을 상상하던 다은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거라면 상처가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랑 손잡고 있었는데 엄마가 없어졌어….”
“그랬구나.”
아무래도 피난하던 중 손을 놓친 모양.
급박한 대피 상황에 가족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심심찮게 있는 일이라 다은은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언니가 엄마 찾아줄까?”
“…정말?”
“그럼. 정말이지.”
하지만 그 전에….
다은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린 땅이 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는 불길한 눈동자도.
드래곤에게 대항하던 마족들도 그녀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뭐라 뭐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거리가 먼 탓에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대충 도망치라거나 그녀 쪽에 시선이 끌리지 않게 뭐라도 해보라는 뜻 아닐까.
그녀는 매캐한 연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미친 로리콘 새끼.”
많고 많은 마족 중 이 아이를 콕 집어 노리는 걸 보면 심히 의심스러운 취향을 지닌 게 틀림없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아르디나 대륙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간 악룡.
그 악룡의 이름을 일부나마 지닌 몬스터가 로리콘이 되는 덴 고작 한마디의 말로 충분했다.
“‘크루모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지…!”
그냥 변태는 무섭지 않지만 능력 있는 변태는 무섭다.
하물며 불을 뿜고 하늘을 나는 플라잉 변태라면 무서워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
다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니 등 뒤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으응….”
다은이 입은 옷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평균보다 살짝 웃도는 그녀의 체구는 작은 아이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아이를 등 뒤에 숨긴 다은은 고민했다.
이대로 숨을까?
하지만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숨는 건 불가능.
이미 표적이 된 이상 도망친다 해도 쉽게 놓아줄 거 같진 않은데….
“으… 어쩔 수 없나.”
마족들을 믿을 수밖에.
스릉-!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크루모의 그림자가 뱉은 불덩이 때문에 주변은 뜨거운데, 다은이 든 검은 여전히 서늘하기만 했다.
서늘한 감촉을 느끼자 다은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던 물건에서 안정감을 찾게 되다니.
세상일 참 모를 일이야.
그녀가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불덩이가 날아왔다.
일반적인 검으로 불덩이를 베려고 했다간 숯덩이가 될 것이다.
“하앗!”
그러나 다은이 휘두른 검은 손쉽게…까지는 아니어도 불덩이를 양단하는 데 성공했다.
구심점을 잃고 반으로 갈라진 불꽃이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마나를 다룰 줄 모르니 스킬의 힘이라도 빌릴 수밖에…!”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로 연달아 날아드는 검붉은 불꽃을 막아냈다.
사도 특유의 무식한 스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빨라…. 그래도, 못 쳐낼 정도는 아니야.’
이것보다 빠른 공격은 이미 수도 없이 당해봤다고!
다은의 마음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버티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지원이 오겠지.
그녀의 생각대로, 드래곤을 향해 공격을 쏟아내던 마족들의 일부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나도 도망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다은의 볼에 거센 바람이 스쳤다.
“읏…?!”
어디론가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공기.
그 목적지를 찾아 고개를 든 다은이 아연실색했다.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오른 흉곽.
쩍 벌리고 있는 입과, 이빨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검붉은 화염.
다은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브레스…!”
지금껏 날리던 불덩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공격이 온다…!
“저건 막을 수 없어….”
브레스 앞에 서면 마나를 두른 검이고 뭐고 공평하게 잿더미가 되어 버릴 것이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그것을 직감한 다은이 급하게 몸을 숨길 곳을 찾았지만.
반쯤 폐허가 된 마을에 브레스를 피할 만한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어, 언니….”
고사리 같은 손이 다은의 옷자락을 쥐었다.
불안감에 찬 아이의 표정을 본 그녀가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친 상태로 마족들을 가리켰다.
“하나 둘 셋 하면 저쪽으로 달려가는 거야. 알았지?”
“언니는 어떡해…?”
“난 괜찮아.”
계속 훼방을 놓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이를 노리던 눈동자는 이제 다은을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아이는 무사하겠지.
그녀는 흙먼지로 얼룩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나….”
혹시나 모르니 놈의 시야에 아이가 들어오지 않게 조심해서 몸을 일으켰다.
“둘….”
몸을 반 바퀴 돌리며 옷자락을 펼쳤고.
“셋!”
그녀가 신호하는 동시에 아이가 뛰어갔다.
다행히 눈동자는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도 도망가야 하는데….”
…도망갈 곳이 없네.
그렇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결연한 표정을 지은 다은이 검을 들어 올렸다.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다은은 곧바로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몇 초나 버티기는.
“난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그녀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빨려 들어가던 공기가 멈추고.
끝없이 부풀어 오르던 흉곽도 팽창을 멈췄다.
푸화아아아악!
직후, 검붉은 브레스가 지면을 향해 쏟아졌다.
‘…흐으윽!’
신음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강한 압력이 검을 타고 전해진다.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처럼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다은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치이이익-
브레스에 닿은 옷자락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다은은 살이 익을 것 같은 강렬한 열기 속에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또 바랐다.
몇 초나 지났을까.
초를 셀 겨를도 없이 검을 붙잡은 채로 버티던 그녀는, 문득 그녀를 괴롭히던 열기가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또한 검을 부러뜨릴 것처럼 압박하던 압력이 사라진 것도.
“해, 해낸 거야…?”
…정말로, 브레스를 버텨냈다고?
다은이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꼭 감은 눈꺼풀 너머로도 전해지던 불꽃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것은 분한 듯이 날개를 펄럭이는 크루모의 그림자뿐.
“아, 아하하…!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다은이 환호성을 질렀다.
브레스에서 살아남다니, 말 그대로 위업 아닌가.
다은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몸을 맡기-
“해내기는.”
…려는 찰나.
다은의 아래에서 쏘아붙이듯 새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타 죽을 뻔한 거 겨우 살려놨더니 말이야.”
“…어?”
다은이 끼긱,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위를 올려다보느라 미처 보지 못한 아래쪽.
매우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연한 적색의 검을 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