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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6

콰직!

발톱이 이미 숨이 멎은 몬스터의 사체를 내려찍었다.

조금의 저항감도 없이 가죽을 파고든 발톱은 손쉽게 근육을 찢어 사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으적으적.

그것은 한때 용병들의 공포로 군림했지만, 이제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한 몬스터를 야만스럽게 씹어먹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남은 반쪽도 남김없이 먹어 치운 그것이 신경질적으로 땅을 긁었다.

-부족해….

이 정도로는 그것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고작 이것들로는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없었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

인간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먹잇감들.

처음 그 먹잇감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은 본능에 경종을 울리는 불길함에 무심코 도망쳐 버렸다.

그것들과 가까이하면 할수록, 제 존재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그러나 그것은 이제 알게 되었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그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먹잇감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에게도 그들과 같은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있는, 고요한 마을의 정경을 향해.

* * *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밍 좋게 마을에 크루모의 그림자가 찾아온 건…

…너무 길어서 번거로우니까 그냥 그림자라고 할까.

아무튼, 그림자가 찾아온 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마을이 취약할 때를 노린 걸까.

‘음, 모르겠네.’

개인적으로는 우연이라면 좋겠는데.

후자라면 그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말이니 상대할 때 더 골치 아플 거 아니야.

이러나저러나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지만.

“돌아가야 해.”

최대한 빨리.

그렇게 말하는 아티샤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힘없이 늘어지던 말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서, 잠깐이지만 아티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말을 똑바로 하는 아티샤라니, 이상하잖아.

아티샤와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내 머릿속 아티샤는 이미 한없이 나른한 이미지로 잡혀버렸는걸.

물론, 그거와 별개로 아티샤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 둥지 주변의 몬스터들을 찢어발겨 놓은 놈이 좋은 의도로 마을을 찾아갔을 리 없으니까.

갑자기 마을에 찾아와서 ‘이번에 이사 온 크루모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같은 말을 하길 기대하는 건 긍정적인 게 아니라 그냥 멍청한 거지.

“카나리아.”

아티샤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도와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도 그걸 위해서였는데 새삼스럽게 부탁할 것까지야.

멋대로 날뛰게 두었다가 락시아에 타고 갈 배들이 망가지면 나도 곤란한걸.

무엇보다, 지금 저 마을에 있는 건 마족들만이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나오는 건데….’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최선이 아니었던 경우는 종종 있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야.

출정에 나서기에 앞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내게 따뜻한 온기가 와 닿았다.

“…셀린?”

셀린과 나는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다.

어색하거나 껄끄러운 것은 아니었고,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셀린이 나에게 말할 때든, 내가 셀린에게 말할 때든 다은을 거쳐서 말해야 하는 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어야지.

다은이 만들어 준 단어 카드 덕분에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어도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힘든 건 여전했다.

그러니, 셀린이 이렇게 다가와서 나를 토닥이는 것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길지 않은 말.

오히려 그 때문일까.

나는 말에 담긴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응.”

하기야, 마도구도 있으니 괜찮겠지.

드래곤 오브로 만든 것인 만큼 마나를 쓰는 공격에는 어느 정도 저항이 있을 테니까….

무식하게 큰 몸집으로 깔아뭉개면 소용없긴 한데, 최소한의 지능이 있다면 섣불리 지상으로 내려오진 않겠지.

그러라고 있는 날개인데.

‘으음, 그건 아닌가.’

만약 그림자가 정말 드래곤 같은 성격이라면 또 모르겠다.

내가 아는 놈이라면 고작 인간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리 없다고 코웃음 치면서 달려들었을 거거든.

“후우….”

잡생각은 여기까지만 할까.

여기서 아무리 걱정하면서 난리를 쳐봤자 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갈게.”

나직한 숨을 내뱉으며 마나를 끌어올린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쏘아 보냈다.

‘아, 셀린은 데려올걸 그랬나.’

셀린이 쓰는 성법은 도움이 됐을 텐데.

아쉬워도 어쩔 수 있나,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는데.

다시 돌아가서 셀린을 업고 오는 것보다 먼저 도착해서 싸우는 편이 훨씬 낫겠지.

지금도 불꽃이 번쩍, 마기가 화아악 솟구치고 있는 게, 여간 난리인 게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주변 풍경이 이리저리 뭉개지고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내 눈은 목표를 똑똑히 응시했다.

마을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점점 놈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확실히 드래곤은 아니네.’

덩치가 작은 것도 작은 거지만,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서 탈락이다.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드래곤이 마법을 못 쓴다니.

농담도 정도가 있지, 그런 말은 싸구려 주점에서 해도 욕 먹을걸.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면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달린 결과,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인다고 해도 실제 거리는 꽤 멀었지만 이 정도 거리는 금방 주파할 수 있다.

다행히 늦진 않았구나.

하고, 안도하려던 때.

나는 문득, 그림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걸 보았다.

“브레스…?”

…그러고 보니 마법은 못 쓰는 주제에 브레스는 쓸 수 있다고 했지.

뭐가 그리 열받은 건지, 놈이 불덩이를 쏘아대던 걸 멈추고 브레스를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건 좀 곤란한데.

단순히 모양만 브레스인 게 아니라, 놈 주변으로 모이는 마기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마기… 브레스….”

알면 알수록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나 어이없는 건 둘째 치고, 나는 놈이 뿜는 브레스를 막아야 했다.

그림자의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내가 익히 아는 인물이 서 있었으니까.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아니, 대충 예상은 된다.

다은의 성격이라면 분명 오지랖을 부린 거겠지.

그게 나쁘다고는 안 하겠지만….

그림자 앞에 당당히 서서 검을 들고 버티려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장한 표정을 한 걸 보면 놈이 숨을 들이마신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걸 막겠다고 저러고 있다니.

아무리 드래곤 오브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될 리가 없잖아.

‘…하는 수 없지.’

몸에 두르고 있던 마나를 일부 빼내어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웅-

작은 진동이 울리며 반지가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흉포한 마나가 솟구치며 바늘로 마구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몸 안을 내달렸다.

“흐윽…!”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이래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드래곤의 마나란 건 흉포하기 짝이 없다.

발동할 때마다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니, 제아무리 드래곤이 직접 하사한 물건이라고 해도 애물단지가 될 수밖에 없지.

성격이 아주 지랄맞은 게, 누가 만들었는지 아주 잘 만들었네.

-오랜만에 불러서 왔건만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사람은 원래 변하면 죽어.”

-아니, 생긴 거 말이다.

“….”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대충 대꾸하며 손을 뻗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얼핏 분홍색으로도 보이는 연한 적색의 검이 들려 있었다.

“…푸흐.”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라시드의 힘을 빌린 채로 악룡과 맞서다니.

꼭 옛날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잖아.

물론 난 지그리드가 아니고, 지그리드처럼 직접 계약한 것도 아니지만, 저기 하늘에 떠 있는 놈도 그때의 악룡이 아닌 건 마찬가지인걸.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익숙한 감촉의 검을 쥔 채 마나를 불어넣었다.

화르르륵-!

내 원래 마나보다 붉은 마나가 검신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을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이미 놈이 뿜은 브레스가 다은에게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탓!

가벼운 도약으로 다은의 머리 위를 껑충 건너뛰었다.

마기와 뒤섞인 열기가 잡아먹을 듯이 나에게 닥쳐왔다.

가짜 드래곤이 뿜는 브레스치고 제법 뜨겁지만.

“진짜한테는 안 되지.”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

검로를 따라 붉은색 불꽃이 피어난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불꽃은 검붉은 브레스 앞에서 금방이라도 질 것처럼 유약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거센 불길 속 피어난 작은 불꽃은 시들지 않았다.

촤아아악-!

오히려, 불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브레스를 게걸스럽게 잡아먹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갈수록 불꽃의 기세는 거세지고 흉포해졌다.

브레스를 불태우며 나아간 불꽃이 그 끝에 닿을 무렵.

후욱-

제 목 바로 앞에 들이닥친 위험을 느낀 그림자가 브레스를 멈추고 황급히 몸을 피했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아등바등 다급하게 피하는 꼴이 상당히 우스웠다.

…일단 이건 해결됐고.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다은을 쳐다보자, 다행히 그녀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내가 앞에서 막아 줬으니 다칠 일도 없었겠지만.

꼭 감겨 있던 다은의 눈이 살짝 벌어지며 주변을 살폈다.

“아, 아하하…!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브레스가 멈춘 걸 확인한 그녀가 방방 뛰었다.

여실히 흘러들어오는 다은의 감정을 느낀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해내기는.”

…살아 있어서 기쁜 건 알겠는데 말이야,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그녀의 눈길이 절묘하게 내 위만 스쳐 지나가는 게, 고의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타 죽을 뻔한 거 겨우 살려놨더니 말이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잿더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텐데.

아니, 재조차 남기지 않고 타버렸으려나.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애써 숨기며, 투덜거리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Chapter 96

Chapter 96

콰직! 발톱이 이미 숨이 멎은 몬스터의 사체를 내려찍었다. 조금의 저항감도 없이 가죽을 파고든 발톱은 손쉽게 근육을 찢어 사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으적으적. 그것은 한때 용병들의 공포로 군림했지만, 이제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한 몬스터를 야만스럽게 씹어먹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남은 반쪽도 남김없이 먹어 치운 그것이 신경질적으로 땅을 긁었다. -부족해…. 이 정도로는 그것의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고작 이것들로는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없었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 인간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먹잇감들. 처음 그 먹잇감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은 본능에 경종을 울리는 불길함에 무심코 도망쳐 버렸다. 그것들과 가까이하면 할수록, 제 존재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그러나 그것은 이제 알게 되었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그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먹잇감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에게도 그들과 같은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있는, 고요한 마을의 정경을 향해. * * *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밍 좋게 마을에 크루모의 그림자가 찾아온 건… …너무 길어서 번거로우니까 그냥 그림자라고 할까. 아무튼, 그림자가 찾아온 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마을이 취약할 때를 노린 걸까. ‘음, 모르겠네.’ 개인적으로는 우연이라면 좋겠는데. 후자라면 그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말이니 상대할 때 더 골치 아플 거 아니야. 이러나저러나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지만. “돌아가야 해.” 최대한 빨리. 그렇게 말하는 아티샤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힘없이 늘어지던 말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서, 잠깐이지만 아티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말을 똑바로 하는 아티샤라니, 이상하잖아. 아티샤와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내 머릿속 아티샤는 이미 한없이 나른한 이미지로 잡혀버렸는걸. 물론, 그거와 별개로 아티샤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 둥지 주변의 몬스터들을 찢어발겨 놓은 놈이 좋은 의도로 마을을 찾아갔을 리 없으니까. 갑자기 마을에 찾아와서 ‘이번에 이사 온 크루모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같은 말을 하길 기대하는 건 긍정적인 게 아니라 그냥 멍청한 거지. “카나리아.” 아티샤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도와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도 그걸 위해서였는데 새삼스럽게 부탁할 것까지야. 멋대로 날뛰게 두었다가 락시아에 타고 갈 배들이 망가지면 나도 곤란한걸. 무엇보다, 지금 저 마을에 있는 건 마족들만이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나오는 건데….’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최선이 아니었던 경우는 종종 있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야. 출정에 나서기에 앞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내게 따뜻한 온기가 와 닿았다. “…셀린?” 셀린과 나는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다. 어색하거나 껄끄러운 것은 아니었고,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셀린이 나에게 말할 때든, 내가 셀린에게 말할 때든 다은을 거쳐서 말해야 하는 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어야지. 다은이 만들어 준 단어 카드 덕분에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어도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힘든 건 여전했다. 그러니, 셀린이 이렇게 다가와서 나를 토닥이는 것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길지 않은 말. 오히려 그 때문일까. 나는 말에 담긴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응.” 하기야, 마도구도 있으니 괜찮겠지. 드래곤 오브로 만든 것인 만큼 마나를 쓰는 공격에는 어느 정도 저항이 있을 테니까…. 무식하게 큰 몸집으로 깔아뭉개면 소용없긴 한데, 최소한의 지능이 있다면 섣불리 지상으로 내려오진 않겠지. 그러라고 있는 날개인데. ‘으음, 그건 아닌가.’ 만약 그림자가 정말 드래곤 같은 성격이라면 또 모르겠다. 내가 아는 놈이라면 고작 인간들이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리 없다고 코웃음 치면서 달려들었을 거거든. “후우….” 잡생각은 여기까지만 할까. 여기서 아무리 걱정하면서 난리를 쳐봤자 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갈게.” 나직한 숨을 내뱉으며 마나를 끌어올린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쏘아 보냈다. ‘아, 셀린은 데려올걸 그랬나.’ 셀린이 쓰는 성법은 도움이 됐을 텐데. 아쉬워도 어쩔 수 있나, 이미 한참이나 멀어졌는데. 다시 돌아가서 셀린을 업고 오는 것보다 먼저 도착해서 싸우는 편이 훨씬 낫겠지. 지금도 불꽃이 번쩍, 마기가 화아악 솟구치고 있는 게, 여간 난리인 게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주변 풍경이 이리저리 뭉개지고 일그러지는 와중에도 내 눈은 목표를 똑똑히 응시했다. 마을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점점 놈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확실히 드래곤은 아니네.’ 덩치가 작은 것도 작은 거지만,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서 탈락이다.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드래곤이 마법을 못 쓴다니. 농담도 정도가 있지, 그런 말은 싸구려 주점에서 해도 욕 먹을걸.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면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달린 결과,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인다고 해도 실제 거리는 꽤 멀었지만 이 정도 거리는 금방 주파할 수 있다. 다행히 늦진 않았구나. 하고, 안도하려던 때. 나는 문득, 그림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걸 보았다. “브레스…?” …그러고 보니 마법은 못 쓰는 주제에 브레스는 쓸 수 있다고 했지. 뭐가 그리 열받은 건지, 놈이 불덩이를 쏘아대던 걸 멈추고 브레스를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건 좀 곤란한데. 단순히 모양만 브레스인 게 아니라, 놈 주변으로 모이는 마기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마기… 브레스….” 알면 알수록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나 어이없는 건 둘째 치고, 나는 놈이 뿜는 브레스를 막아야 했다. 그림자의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 내가 익히 아는 인물이 서 있었으니까.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아니, 대충 예상은 된다. 다은의 성격이라면 분명 오지랖을 부린 거겠지. 그게 나쁘다고는 안 하겠지만…. 그림자 앞에 당당히 서서 검을 들고 버티려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장한 표정을 한 걸 보면 놈이 숨을 들이마신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걸 막겠다고 저러고 있다니. 아무리 드래곤 오브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될 리가 없잖아. ‘…하는 수 없지.’ 몸에 두르고 있던 마나를 일부 빼내어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웅- 작은 진동이 울리며 반지가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흉포한 마나가 솟구치며 바늘로 마구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몸 안을 내달렸다. “흐윽…!”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이래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드래곤의 마나란 건 흉포하기 짝이 없다. 발동할 때마다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니, 제아무리 드래곤이 직접 하사한 물건이라고 해도 애물단지가 될 수밖에 없지. 성격이 아주 지랄맞은 게, 누가 만들었는지 아주 잘 만들었네. -오랜만에 불러서 왔건만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사람은 원래 변하면 죽어.” -아니, 생긴 거 말이다. “….”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대충 대꾸하며 손을 뻗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얼핏 분홍색으로도 보이는 연한 적색의 검이 들려 있었다. “…푸흐.”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라시드의 힘을 빌린 채로 악룡과 맞서다니. 꼭 옛날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거 같잖아. 물론 난 지그리드가 아니고, 지그리드처럼 직접 계약한 것도 아니지만, 저기 하늘에 떠 있는 놈도 그때의 악룡이 아닌 건 마찬가지인걸.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익숙한 감촉의 검을 쥔 채 마나를 불어넣었다. 화르르륵-! 내 원래 마나보다 붉은 마나가 검신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을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이미 놈이 뿜은 브레스가 다은에게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탓! 가벼운 도약으로 다은의 머리 위를 껑충 건너뛰었다. 마기와 뒤섞인 열기가 잡아먹을 듯이 나에게 닥쳐왔다. 가짜 드래곤이 뿜는 브레스치고 제법 뜨겁지만. “진짜한테는 안 되지.”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 검로를 따라 붉은색 불꽃이 피어난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불꽃은 검붉은 브레스 앞에서 금방이라도 질 것처럼 유약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거센 불길 속 피어난 작은 불꽃은 시들지 않았다. 촤아아악-! 오히려, 불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브레스를 게걸스럽게 잡아먹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갈수록 불꽃의 기세는 거세지고 흉포해졌다. 브레스를 불태우며 나아간 불꽃이 그 끝에 닿을 무렵. 후욱- 제 목 바로 앞에 들이닥친 위험을 느낀 그림자가 브레스를 멈추고 황급히 몸을 피했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아등바등 다급하게 피하는 꼴이 상당히 우스웠다. …일단 이건 해결됐고.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다은을 쳐다보자, 다행히 그녀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내가 앞에서 막아 줬으니 다칠 일도 없었겠지만. 꼭 감겨 있던 다은의 눈이 살짝 벌어지며 주변을 살폈다. “아, 아하하…!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브레스가 멈춘 걸 확인한 그녀가 방방 뛰었다. 여실히 흘러들어오는 다은의 감정을 느낀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해내기는.” …살아 있어서 기쁜 건 알겠는데 말이야,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그녀의 눈길이 절묘하게 내 위만 스쳐 지나가는 게, 고의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타 죽을 뻔한 거 겨우 살려놨더니 말이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잿더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텐데. 아니, 재조차 남기지 않고 타버렸으려나.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애써 숨기며, 투덜거리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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