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록….”
행여나 들릴세라, 작게 새어 나오려는 기침을 입안 가득 느껴지는 비릿한 쇠 냄새와 함께 억지로 눌러 담았다.
‘몸은….’
활력이 넘치는 것과 별개로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타인의 마나를 받아서 강제로 도핑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좋을 수가 없지.
하물며 그 타인이라는 게 무려 드래곤이니 말이야.
그래도 처음 가호를 발동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형편이 괜찮았다.
그때는 반동 때문에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기절했으니까.
‘그때 이걸 만지지 말아야 했는데.’
호기심이 죄지.
장신구엔 관심도 없는 아빠가 반지를 갖고 있는 게 신기해서 만져봤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경지가 높지 않아서, 몸을 휘젓는 흉포한 레드 드래곤의 마나를 다루기는커녕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아직 영글지 못한 몸에 그것은 맹독… 아니, 맹독보다 더한 흉터를 남겼다.
가뜩이나 영양이 부족한 몸에 큰 부담까지 더해진 결과….
이런 짤막한 몸을 갖게 되었다.
성장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지만, 성장에 쓸 에너지를 회복으로 돌린 탓에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느려진 것이다.
…라고, 나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만지자마자 냉큼 좋다고 달려든 주제에.’
심지어 그때는 말 그대로 그냥 만지기만 했을 뿐, 가호를 발동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반지에 변태 도마뱀이 깃들어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네가 나쁜 거다. 그렇게 탐나는 영혼을 가지고 다가오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나.
‘….’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먼저 유혹했잖아.’라는 그라시드의 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대꾸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전혀 달갑지 않은 관심에 예전부터 수도 없이 꺼지라고 했지만.
만난 순간부터 내 것이 될 생각 없냐느니, 영혼이 마음에 들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인 그라시드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라시드의 가호는 사실상 내게 귀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카, 카나…? 카나 맞지…?”
“벌써 잊어버릴 나이가 된 거야?”
저런. 안타깝게도….
“아니야! 아직 창창하다구”
측은하게 바라보자 다은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네 일행인가? 낯선 냄새가 풍기는군.
‘신경 꺼.’
-질투하는 건가? 걱정하지 마라. 난 너 말고 다른 녀석에게 갈 생각 없으니.
‘…제발 좀 가주면 안 될까?’
-싫다.
내가 언젠가, 기필코 이걸 내 손에서 빼서 펄펄 끓는 화산 속에 던져버리고 말 거야.
…아니, 레드 드래곤이니까 오히려 좋아하겠구나.
그냥 깊은 바다 밑바닥에 처박아 버려야겠다.
“옷차림 때문에 순간 카나가 아닌 줄 알았어….”
“아, 이거.”
절그럭.
펄럭.
가볍게 몸을 움직이자 몸에 걸친 경갑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엄청 멋져…! 갑옷도 그렇고 망토도 그렇고, 꼭 기사님을 보는 거 같은걸!”
“그, 그래…?”
나는 볼을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는데.
-활발한 여자군.
‘응. 나도 동의해.’
그라시드의 말에 동의하며 나를 선망하는 눈으로 보는 다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앗, 그, 그래! 하긴 지금은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지….”
다은과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몸이 욱신거렸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후폭풍이 찾아오면….
다가올 후폭풍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빨리 이 사태를 정리해야겠어.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건 물어보고.
‘그라시드.’
-뭐냐.
‘저 녀석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저것 말이냐? 제법 신기한 녀석이긴 하다만, 알고 있는 놈은 아니군.
‘자기 입으로 자기가 크루모라고 했다는데.’
-…크루모?
과연 그 말은 쉽게 넘길 수 없었는지, 심드렁하던 그라시드의 목소리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비음을 흘리며 녀석을 살피는 듯한 그라시드.
곧 그에게서 답이 나왔다.
-아니. 저 녀석은 크루모가 아니다. 애초에 내 눈으로 직접 녀석이 죽는 걸 지켜봤는데 살아 돌아왔을 리 없지.
‘…그렇구나.’
-그래도 저 녀석의 정체가 뭔지는 알 것 같군.
‘정체?’
-그래.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생물.
그들이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마나를 다루는 능력과 감응력이 그 어떤 생명체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육체를 갖고 있지만, 한없이 마나에 가까운 생명체.
그것이 드래곤이라는 생물이다.
-생명은 죽을 때 사념을 남긴다. 그 사념들은 보통 오래가지 못하고 흩어지지.
그러나 강렬한 사념, 그것도 마나에 한없이 가까운 생명체인 드래곤이 남긴 사념은 달랐다.
크루모가 남긴 강한 증오를 담은 사념은, 크루모가 죽은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마나의 형태로 남았다.
크루모의 죽음을 지켜본 그라시드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라시드가 굳이 사념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도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괜히 건드려서 사고가 날 바엔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두는 편이 나았다.
사념이라고 해도 결국 마나 덩어리.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땅으로, 바람으로, 하늘로 흩어진다.
어차피 생전처럼 패악질을 부릴 수도 없으니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라시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실리아 세계를 순환하는 거대한 시스템. 정화 시스템의 고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락시아에서 살 수 없게 된 마족이 아르디나 대륙으로 이주했고, 그들이 이주한 곳 근처에 크루모의 사념이 남아 있었고, 마나 덩어리였던 사념이 마족의 영향을 받아 변질되었고….
그 결과, 짜잔.
‘크루모의 그림자’라는 몬스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거지.
‘결국 돌고 돈 거네.’
마족들만 불쌍하게 됐지.
겨우 살 곳을 찾았나 했더니 하필 악룡이 죽은 곳 근처라서 이 사달이 난 거니까.
자기를 크루모라고 착각하는 것도 크루모가 남긴 사념이라서 그런 거였구나.
‘알고 있었으면 처리 좀 하지 그랬어.’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뭔데.’
-자느라 깜박 잊었다.
‘….’
역시 도마뱀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조금 기대했는데. 네가 정말 죽음에서 돌아온 거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미 에델에게 대답도 들은 마당에 뭘 기대한 건지.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껴져서 비뚜름한 웃음을 입가에 올렸다.
한편, 그림자도 나를 보고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 붉은색… 그 불꽃…!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그림자가 몸을 뒤틀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릴 때마다 천지가 불안한 울음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그라시드…! 더러운 배신자가 또다시 막아서는구나…!
“배신자?”
의외의 단어에 고개를 기울이자 그라시드가 단호하게 일축했다.
-신경 쓸 것 없다. 오래전에 죽은 망령의 헛소리일 뿐이니.
“흐응.”
둘 사이에 뭔가 있긴 한 모양인데.
딱히 흥미가 생기진 않네.
“둘 사이에 있던 일은 알아서 하고.”
화르륵-
“내 것을 건드리려고 한 대가는 치러야지.”
브레스를 가른 후 사그라들었던 불꽃이 다시 일었다.
꺼진 불도 다시 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게 아닐까.
뭐, 당연히 그럴 리 없지만.
안 그래도 발작하던 그림자는 내가 검기를 일으킨 걸 본 후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
-그라시드으으!!!
그림자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를 내던지고 육탄 공세를 감행했다.
“저니.”
“으, 응!”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찰떡같이 알아들은 다은이 냅다 줄행랑쳤다.
역시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니까.
“-참, 지금은 다은이라고 불러도 돼!”
“…그게 중요한 거야?”
도망치는 와중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니.
확실히 예전보다 담이 커지긴 한 모양이야.
잡생각은 여기까지.
지금은 나에게 달려드는 저 가짜 도마뱀을 처리할 때다.
크기는 최근에 상대했던 늑대의 모습을 한 차원수보다 더 작다.
하지만 느껴지는 강함은 그것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특별한 기교 같은 것 없이 거대한 몸으로 깔고 뭉개기만 해도 난 납작한 육포가 되겠지.
근데-
“안 깔리면 그만이야.”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도마뱀에게 당할 정도로 녹록한 삶을 살진 않았거든.
검 끝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거대한 몸짓을 막기엔 내가 그린 호는 보잘것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내 검은 멈추지 않았다.
스-
점에서 호.
호에서 반원.
그리고 마침내, 원을 그린 불꽃이 우뚝 멈춰 섰다.
내 힘만으로는 조금 벅찬 기술이지만, 그라시드의 힘을 빌린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거든.”
카나리아류 – 바람 가르기
불꽃으로 이루어진 둥근 원에 그림자의 몸이 담겼다.
작은 원에 담긴 거대한 몸체.
멈춰 섰던 검이 비스듬히 원을 가르고.
촤아아아악!
그림자의 몸에 거대한 검흔이 새겨졌다.
-…! 크아아아아악!
그림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틀었다.
“…쯧.”
한 번으로는 안 되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래도 데미지는 제대로 들어간 모양.
회까닥 뒤집혔던 놈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이라더니, 한 대 맞으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별거 아니야.”
검으로 그린 원에 놈이 있는 공간을 통째로 집어넣고 공간 째로 가른 것뿐.
알고 보면 간단한 기예인걸.
조금 더 강했더라면 굳이 원을 그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몇 번을 봐도 터무니없는 재능이군.
“립서비스, 고마워.”
-말도 안 돼…! 인간 주제에 어떻게 이런 힘을…! 그, 그래! 그라시드, 네 놈의 소행이구나! 비겁한 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라시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수월하게 펼칠 수 없었을 테니까.
“근데 말이야.”
비뚜름한 웃음을 걸친 채로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억울할 필요 있어?”
싸움에서 중요한 건 냉정함이다.
자고로 이성이 있는 놈보다 본능에만 충실한 놈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운 법.
“강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 네가 그라시드보다 약해서 진 거잖아.”
-…뭐라?
“져놓고 비겁한 놈이니 뭐니….”
아하하.
나는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추하네.”
이성을 잃게 하기엔 도발만 한 게 없으니까.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놈의 눈동자에 잠깐 돌아왔던 이성의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작 몇 마디 했다고 흥분해서 달려들기는.
사념 아니라고 할까 봐 단순하기 짝이 없네.
-나라도 당했을 것 같다만.
‘그럼 너도 허접한 거지.’
드래곤씩이나 돼서 이런 도발에 당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웬만한 건물보다 큰 몸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상처 입은 도마뱀의 마지막 발악이 위협적일 리 없잖아.
똑똑한 놈이었다면 적어도 상처를 추스르고 덤볐을 텐데.
“끝까지 멍청하네.”
손에 들린 검이 몸집을 키웠다.
한 뼘, 두 뼘, 세 뼘.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불꽃은 끝내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검이 되었다.
자신보다 아득히 큰 검을 본 그림자가 분노로 마비된 이성을 되찾고 멈춰 섰지만.
도망가려면 진작 갔어야지.
“그럼, 안녕.”
거대한 검이 놈을 향해 떨어지고.
직후-
붉은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다.
영원토록 이어질 듯했던 화염이 마침내 사그라들었을 때.
그림자가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 *
“…하아.”
조금, 무리했나.
그라시드의 가호를 해제하며 스르르 주저앉았다.
잠에서 깨어났으니 계속 귀찮게 할 게 분명한 그라시드도 지금은 말이 없는 걸 보면 내 상태가 여간 말이 아니긴 한 모양.
아마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 상태가 이래서 말을 전할 수 없는 거겠지.
드래곤의 마나가 내달렸던 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으….”
“카나야!”
몸을 웅크린 채 고통을 버티고 있는 내 귓가에 다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림자가 사라진 걸 보자마자 달려온 것 같은데.
아픔을 참느라 그녀를 반길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래! 괜찮아?!”
“…괘, 괜찮- …콜록!”
우웩…!
겨우 몸을 일으키며 대답하려고 할 때,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미처 억누를 겨를도 없이 튀어나온 그것이 땅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비릿한 피비린내.
“피… 피?!”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은 소용없을 것 같네.
패닉에 빠져 하얗게 질린 다은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