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
‘…낯익은 천장.’
고작 하루 본 천장을 낯익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자 안 그래도 지분거리던 고통이 더욱 세게 내 머리를 죄여왔다.
“아, 기억났다….”
그래도, 기억을 되살리는 덴 성공했다.
크루모의 그림자를 잡고 가호의 반동으로 인해 골골대다 볼품없이 쓰러졌었지.
그 이후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기절했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가 했는데, 정신이 강제로 끊겼다 돌아온 거니 그럴 법하네.
몇 시간 누워 있었던 게 도움이 된 건지 기절하기 전보단 상태가 괜찮았다.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건 여전했지만.
나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소란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일어났구나!”
다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슬쩍 발을 물리자 당장이라도 나를 끌어안을 기세로 달려오던 다은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아파…?”
“…정상은 아니야.”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자 방금까지 화색이었던 다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다은은 차마 아프다는 사람한테 손을 댈 수는 없었는지 내 주변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 이렇게 일어나 있을 게 아니라 다시 누워야 하는 거 아니야? 상태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빠, 빨리 침대로 돌아가서 푹 쉬자. 답답해도 이불을 꼭 덮고…. 응? 착하지….”
“….”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보고 있으니 아주 끝이 없네.
퍽!
“아얏!”
“적당히 해.”
오작동한 기계는 때리면 고쳐지는 법.
오작동한 다은을 고치는 법도 다르지 않았다.
꿀밤을 맞은 다은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이런 쪽에 재능이 있는 거 아닐까.
나중에 이걸로 먹고 살아도 될지도.
머리를 문지르며 신음을 흘리던 다은이 벌떡 일어났다.
“폭력 반대!”
“미안. 일평생 이걸로 먹고 살아온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건 반칙이야!”
다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운 머리카락이 거친 행동에 뜯겨 손가락 사이사이에 붙들린 걸 보니 마음이 조금 아프….
-지는 않았다.
다은이 저러는 걸 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차피 부러 과장해서 저러는 거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일어났구나….”
“아티샤.”
아티샤가 나에게 알은체했다.
그런데….
“거리가 좀 먼 것 같은데.”
원래부터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금 아티샤는 명백히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엔 아티샤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게 훤히 보여서 그럴 수도 없었다.
시험 삼아 한 발 다가가자 두 발 멀어지는 아티샤.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아티샤가 그녀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을 하며 허둥지둥 답했다.
“그, 마기가 닿을까 봐….”
“아.”
그런 거였나.
난 또, 나한테 겁먹어서 다가오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이렇게 말하면 공상에 취한 사춘기 아이처럼 보이거나, 자아도취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비슷한 일을 종종 겪은 나로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늘어놓았다.
“괜찮아. 상태가 안 좋긴 해도 그 정도 마기에 영향받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걸 보면 자기가 상처받을까 봐 배려하는 게 아닐지 의심하는 모양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닌 사람한테 구태여 귀찮은 짓을 할 리가.
“맞아, 맞아! 우리 카나가 그런 기특한 짓을 할 리가 없는걸요! 분명 ‘너 같은 허접이 뿜는 마기가 이 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
잠시 멀쩡해졌던 다은이 다시 오작동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너무 살살 때려서 금방 다시 망가진 것 같네.
어느 정도로 때려야 부서뜨리지 않으면서 수리할 수 있을까.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낌새를 눈치챈 다은이 후다닥 도망갔다.
놀랍게도, 다은의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티샤의 눈에 깃들어 있던 의심의 빛이 걷혔다.
“부럽네….”
“…뭐가.”
“마기를 버틸 수 있는 거….”
내 눈이 아티샤의 부러진 뿔에 닿았다.
아티샤는 락시아를 그리워하고 있다.
만약 뿔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이 아르디나 대륙에 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티샤는 뿔이 부러진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뿔과 맞바꿔서 소중한 것을 지켰다는 자부심.
자부심을 가진 사람에게 위로는 오히려 실례겠지.
하물며 나같이 어설픈 사람의 위로라면 더더욱.
“노력하면 할 수 있을걸.”
“정말 그러려나….”
그랬으면 좋겠네….
아티샤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너와 저니 덕분에 사상자가 크게 줄었어….”
내 덕분에 크루모의 그림자를 죽일 수 있었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구조에 힘쓴 저니 덕분에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아티샤는 그렇게 말했다.
“흐응.”
다은이 그런 일을 했구나.
그림자와 맞서고 있는 게 의아하다 싶었는데 다은이 한 인명 구조 활동이 녀석의 눈엔 꽤나 거슬렸나 보다.
“락시아로 가는 배를 찾고 있다고 했지…. 가장 좋은 배를 준비할게….”
“침몰하지만 않을 정도면 상관없는데.”
“은인한테 그런 대접을 할 순 없지….”
“뭐… 그건 마음대로 하고.”
문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냈다.
“지금은 할 일이 있지 않아?”
“할 일…?”
철컥.
“해충 구제.”
한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몬스터들, 몰려왔다며.”
“들었어…?”
“들으라고 하는 거 아니었어?”
“미안…. 목소리가 좀 컸나 봐….”
“…정말 어제와 딴판이네.”
아니, 어제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오늘 아침의 아티샤와 비교하더라도 지금 아티샤가 보이는 모습과의 차이는 분명했으니까.
사람이 순식간에 바뀐 걸 보면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고마운가 보네.
“내 책임이니까 내가 마무리할게.”
그냥 몬스터들이 쳐들어온 거라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내버려뒀을 텐데, 이번 일은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야, 몬스터들이 몰려온 건 나 때문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딱!
“아악!”
그새 업보를 잊었는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드는 다은의 머리에 천벌을 내려주었다.
“드래곤의 레어 근처에 유독 위험한 몬스터들이 있는 이유가 왜인지 알아?”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고 해도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면 몬/스/터가 될 걸 알 텐데.
“…영역 본능이 강해서?”
“목숨보다?”
“음, 역시 틀렸나. 그래서 정답이 뭔가요, 교수님?”
오답을 말한 다은의 얼굴엔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다은도 그냥 즐기는 거 아닐까.
정답은 내 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왔다.
“마나 때문에… 맞지…?”
“맞아.”
넌지시 물어오는 아티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다은의 말처럼 영역 본능이 강해서 서식지를 옮기지 않는 놈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드래곤이 흘리는 마나 때문이다.
조금의 오염도 없는 정순한 마나.
그런 마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눌러앉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러하듯, 몬스터에게도 마나는 생의 원동력이자 강해지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리고 이 반지엔 드래곤의 마나가 깃들어 있어.”
정확히 말하면 마나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드래곤이 깃들어 있는 거긴 한데, 결과는 그거나 그거나 같으니까 수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원래는 일찍 말해주려 했는데….”
“했는데?”
“알잖아.”
왜 말 못 했는지.
그러자 다은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도 힘을 너무 과하게 썼어.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다급했던 것도 있고.
그 정도 놈이라면 굳이 가호를 발동할 필요 없이 내 본연의 힘으로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러면 피해가 좀 더 커졌으려나.
그 점을 생각하면 내 선택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긴 하다만, 어찌 됐든 그라시드의 힘을 너무 과하게 끌어다 썼다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
“말했잖아. 내 책임이니까 내가-”
“그렇겐 안 되지!”
얍!
앙증맞은 기합이 들림과 동시에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훅 다가온 익숙한 체취와 감촉.
언제 망설였냐고 말하듯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다은이 내가 나온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침대에 눕힌 후 적당히 도톰한 이불을 내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우풉.”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일련의 과정에 딴지를 걸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불 밖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환자는 환자답게 쉬고 있도록!”
“그래 맞아…. 우리는 이런 일에 네 손을 빌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
뒤따라 들어온 아티샤도 다은과 비슷한 말을 했고, 뒤에 선 셀린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한 마음 한뜻으로 나를 막아서는 이들을 황당하게 보다가.
“뭐래.”
“어허, 쓰읍!”
무시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눈을 부릅뜨고 제지하는 다은의 손에 눌려 그대로 침대에 다시 눕혀졌다.
“봐. 연약한 내 힘으로도 쓰러지잖아. 카나는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
이런 상태로도 다은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몇 명이 오든 박살 낼 자신 있는데.
내가 황당하게 보거나 말거나, 다은은 걷어낸 이불을 들어 다시 나에게 덮어버렸다.
이번엔 눈만 빼꼼 나올 정도로.
“아무튼! 이 일은 우리끼리 해결할 테니까 카나는 얌전히 쉬고 있어! 만약 나오다가 걸리면 궁디팡팡할 거야! 무섭지?”
“….”
…정말 어이가 없네.
눈을 부릅뜨며 엄포를 놓는 게 가소로워서 말도 안 나왔다.
애초에 애도 아니지만, 만약 애였어도 저런 협박은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
편히 쉬라며 커튼을 치고 문을 꼭 닫고 나간 셋을 멀뚱하게 보던 나는 몸에서 힘을 뺐다.
“…뒤늦게 도와달라고 해도 안 도와줄 거야.”
응. 절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
그래도.
…뭐.
썩 나쁜 기분은 아니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더워.”
이렇게 더운 건 분명, 꾹 눌러쓴 이불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