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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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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키온 사가」.

       

       내가 장장 십 년 동안 해 왔던 망겜.

       

       오픈월드 패키지 게임이 한창 유행할 때, 우후죽순 나왔던 양산형 중세 판타지 RPG 중 하나였던 게임이다. 

       

       게임 이름부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특징이랄 것도 없는 고루한 제목인 데다가 타 게임에 비해서 그래픽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격감이나 조작감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스토리가 엄청나게 신박하거나 몰입감이 좋은 것도 아닌, 그야말로 ‘애매한’ 게임이었다. 

       

       당연하게도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오픈월드 게임들에게 밀려서 묻혀 버렸고,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게임.

       

       그래, 길게 말해서 뭐 하겠는가.

       

       거두절미하고, 나는 이 빌어먹을 게임에 빙의당했다.

       

       억울했다.

       

       ‘사실 나도 처음 몇 달만 밤새도록 했지, 한 5회차 플레이부터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우연히 똥믈리에였던 내 눈에 레키온 사가가 들어왔고, 다른 게임에 비해 꽤 높은 자유도, 그리고 회차마다,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플레이하는 캐릭터 및 동료를 바꿀 때마다 달라지는 결말에 이끌려 다회차 플레이를 즐겼을 뿐이었다.

       

       ‘사실 이야기의 거대한 줄기 자체는 뭐, 뻔하디뻔한 스토리였지.’

       

       주인공인 레키온이 무명 기사로 시작해 제국의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으로 성장하고 끝내는 대륙을 위협하는 모든 마의 세력, 나아가 드래곤까지도 토벌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아주 흔하디흔한 영웅담.

       

       ‘그러고 나서 제국의 황녀와 결혼하고 꽁냥거리며 해피 엔딩까지…. 정석 그 자체였고.’

       

       하지만 이 게임의 진가는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 나타난다. 

       

       비록 레키온의 사기적인 스탯 성장력, 스킬 습득력, 주인공 판 깔아주기용 사기 특성들을 이용할 수는 없지만….

       진짜 내가 이 세계의 주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호작용이 잘 설계되어 있고, 랜덤 이벤트라든지 서브 퀘스트들이 정말 잘 만들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랜덤 캐릭터 스타트가 가챠 뽑는 것 같은 맛이 있어 좋았지.’

       

       대표적인 주인공 루트 세 개를 클리어하고 나면 열리는 기능.

       

       어떤 캐릭터로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꽤나 많이 달라지는 스토리에, 나는 심심할 때마다 랜덤 캐릭터 스타트로 게임을 즐기곤 했다.

       

       ‘너무 구리다 싶은 캐릭터가 나오면 그냥 새로 시작하면 그만이었으니.’

       

       엄청난 마법 재능을 가진 거지 소년, 산전수전 다 겪은 해적, 귀농한 백작가의 딸까지.

       

       이 카란트라 제국, 아니 페룬 대륙에서 재밌어 보이는 캐릭터는 다 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나는 매번 새로 캐릭터를 뽑아서 게임을 했었다.

       

       그런데 하필. 

       

       “빙의도 랜덤으로 되면 어쩌라는 거냐고. 그것도 이딴 캐릭터에!”

       

       [Lv.1 레온]

       힘 : 6 민첩 : 7 체력 : 5 마력 : 3

       고유 특성 : 잠김

       스킬 : 없음

       -캐릭터 요약 : 바냐스 마을에서 자취하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나는 눈앞에 뜬 초라한 상태창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나절 만에 찾아온 허기 덕분에 나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꿈이라면 이렇게 리얼하게 배가 고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일단 먹고 살아야지.”

       

       우걱우걱.

       

       나는 집에 남아 있던 빵과, 빙의당하기 전 레온이 만들어 둔 듯한 식은 수프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 

       

       “하아….”

       

       비로소 생각이란 걸 할 여유가 생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최악이네.’

       

       레벨은 1. 스탯은 딱 지나가는 시민A 수준.

       

       그렇다고 성장과 관련된 기깔나는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킬도 전무하다.

       

       돈이라도 있으면 마법서 같은 걸 사서 익혀 볼 수라도 있겠지만….

       

       ‘집안만 봐도 딱 가난한 자취생이잖아.’

       

       마법서가 어디 한두 푼인가.

       

       물론 이 자유도 높은 게임의 특성상 마법서를 굳이 사지 않더라도 좋은 스승을 만난다거나, 특정 기연을 찾아 익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적어도 레온한테 그런 일이 그냥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고.’

       

       내가 이 게임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지만, 아직 지금이 게임 스토리의 어느 지점인지,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상세한 계획을 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단 이 바냐스라는 코딱지만 한 마을도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도 안 난단 말이야.’

       

       드넓은 페룬 대륙에 어디 마을이 한두 개인가. 이름이 비슷한 마을은 부지기수, 심지어 지역이 다르지만 이름이 겹치는 마을도 이 게임에는 몇 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바냐스…. 바냐스. 분명 본 적은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안 나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앞으로 어떻게 할지부터 정해야겠어.’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메인 스토리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빙의해 버렸으니 목숨은 하나뿐이고, 그렇다면 최대한 호의호식하며 평화롭게 사는 게 이득 아니겠는가.

       

       ‘괜히 영웅 되겠다고 나대다가 개죽음 당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없겠지.’

       

       주인공이야 뭐, 스탯이랑 특성이 워낙 사기니 알아서 마물들을 물리치고 레벨업해서 마왕이고 드래곤이고 때려잡을 수 있을 거다.

       

       ‘원래 레키온 사가 자체도 주인공 루트는 난이도가 쉬운 편이었으니까.’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주인공 파티는 잘 굴러갈 거다.

       

       ‘가끔 주인공이 삽질을 하긴 할 텐데, 주변에 건실한 조연들도 꽤 있으니 잘 잡아주겠지.’

       

       어차피 변방 마을의 레온에 빙의한 이상, 당장 제국의 수도에 있을 주인공에게 개입할 현실적인 방법도 딱히 없다. 

       

       성공가도가 보장되어 있는 주인공 앞에 갑자기 시골 청년이 나타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 봐야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옆에 있던 성격 더러운 기사한테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 스펙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조용히, 가늘고 길게 사는 것.’

       

       시골 마을에서 성실하게 살다가 가능하면 어여쁜 아가씨랑 눈 맞아서 결혼까지 하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최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히도, 레온은 얼굴 하나는 꽤나 잘생긴 편이었다.

       흔히 말하는 존잘 기생오라비 타입은 아니지만, 적당히 건실하게 잘생긴 청년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 

       

       그 왜, 사윗감 1위 얼굴 같은 느낌 말이다.

       

       ‘좋아. 진로는 정했다.’

       

       이제 내 완벽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악!”

       “모두 피해!”

       “으아아악!”

       

       쿠과과광!

       

       “…….”

       

       내 원대한 계획이, 그 첫 걸음부터 헛디뎌 발목이 부러지게 생겼다.

       

       ***

       

       나는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으악!”

       

       얼굴을 내밀자마자 위쪽에서 떨어지는 무언가에,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집어넣었다. 

       

       화륵!

       

       내가 방금 고개를 내밀었던 창틀에 불화살이 꽂혔고, 그 기름 먹인 화살촉을 기점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화르륵!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 밖의 집들에 하나둘씩 불화살이 박히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손수건 하나를 받아 놓은 세숫물에 담가 적신 후 집의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맙소사.’

       

       뒤를 돌아보니 이미 마을의 3할은 불바다가 되어 있었고, 뿌연 연기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본능적으로 연기 반대편으로 뛰며 생각했다. 

       

       ‘아니, 그야 대륙에서 전쟁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긴 한데.’

       

       그게 왜 하필이면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냐고?

       

       이런 캐릭터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바로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정말 운도 지지리 없다고 생각할 때.

       

       “크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저 앞쪽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무트님의 이름으로…. 쳇, 네놈도 아니군. 죽어라.”

       

       촤아아악!

       

       “끄아아악!”

       

       희뿌연 연기에 가려 실루엣밖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었으면 저 살육의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미안합니다. 일단 저도 평범한 청년이라, 살아야죠.’

       

       저 하무트의 이름이 어쩌고 하는 놈들한테 잡히면 바로 개죽음….

       

       ‘잠깐만. 하무트?’

       

       바냐스 마을, 하무트.

       

       그제서야 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 이벤트!’

       

       페룬 대륙의 동쪽에는 세력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하는 짓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이비 집단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게임 초중반부에 파견 지역으로 동쪽 변두리를 선택할 경우 이 집단 관련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늦었습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도 말인가?

       -예…. 불화살과 연기로 한쪽으로 몰아, 반대쪽에서 마을 사람들을 전부 학살했습니다.

       -허…. 멜른 산 쪽으로 도망쳤다면 생존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쪽도 워낙 지형이 험하고 종종 마물이나 맹수가 출현하는 곳이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무트교라고 했나. 내 추후 반드시 놈들을 벌하리라.

       

       굳이 따지자면 이 이벤트는 보상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는 ‘꽝’ 이벤트에 해당한다.

       

       ‘물론 이 이후에 이 지역에서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가 몇 개 있긴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매리트가 적었지.’

       

       그래서 유저는 파견 지역을 다시는 동쪽으로 선택하지 않게 되고, 나 역시 초회 플레이 이후에는 거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튼.

       

       ‘중요한 건, 이 이벤트의 결말은 바냐스 마을의 모든 주민이 놈들에게 학살당했다는 거야.’

       

       물론, 그중엔 건실한 청년 레온도 포함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물에 젖은 손수건을 더욱 코와 입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발걸음을 홱 돌려 연기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멜른 산으로 간다.’

       

       가늘고 긴 레온의 삶을 위해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 작품은 힐링물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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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cked Up a Hatchling

I Picked Up a Hatchling

해츨링을 주웠다
Status: Ongoing Author:
But this guy is just t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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