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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커버접기

       내 목에서 터져 나오는 볼품 없는 비명이 너무 커서 내 고막이 윙윙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뭘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분명히 버스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을 내가 갑자기 커다란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 목을 거쳐 나가고 있는 목소리는 왜 여자 목소리인 건지, 내 비명을 듣고 들어온 젊은 여자는 왜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지— 같은 것은 당시에는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몸이 너무나도 아팠으니까.

        

       어두웠던 방의 불이 모두 켜지고, 메이드가 뭐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뛰어온 사람들에게 번쩍 들려서 옮겨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제대로 정신이 들자마자 생각한 것은, 목이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이었다. 병원의 하얀 천장을 보다가 시선을 살짝 돌리니 내 왼팔에 연결된 링거병이 보였다.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등과 허리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아니, 등과 허리 뿐만이 아니었다. 어깨, 팔꿈치, 고관절, 무릎, 아무튼 우리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이용하는 모든 관절이 죄다 엄청나게 아팠다. 마치 오랫동안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관절을 억지로 비틀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끄읍.”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자, 그때까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커튼이 젖혀졌다.

        

       “환자 분, 정신이 드세요?”

        

       소리를 듣고 온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아까 목이 터지라고 비명을 질러서 그랬는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자, 의사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경찰을 불렀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라고, 굉장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

        

       ……왜?

        

       그때까지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나는 의사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이제 막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것 같은 그 의사는 아주 딱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유를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물론 그 말은 제대로 소리가 되지 못하고 “끄응,” 하는 앓는 소리가 되어 나왔지만.

        

       아무튼, 의사 말대로 경찰이 도착하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병원에 온 경찰은 네 명 정도였다. 둘은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경찰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사복 차림이었다. 가죽점퍼에 달리기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드라마 같은 곳에서 종종 보던 강력계 형사 같은 사람들 아닐까.

        

       의사를 따라와 내 상태를 본 경찰은 곧바로 의사가 건넨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대화가 가능한 상태입니까?”

        

       “의식은 돌아왔지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의사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와중에 나는 상황을 판단하려고 열심히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환자뿐이었다. 가족이나 친구가 보이지는 않았다.

        

       ……교통사고가 아닌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분명히 나는 퇴근길이었는데. 내일은 토요일이었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평일에서 벗어나 늦잠 좀 잘 수 있겠구나 하고 마음 놓고 있었다. 버스 제일 뒷자리에서 따뜻한 히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메이드가 나오는 꿈을 꾸고, 마구 비명을 지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아, 같이 온 사람들이라면 걱정할 거 없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요.”

        

       같이 온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그게 더 불안한 거 아닌가?

        

       가족이나 친구는 둘째치고,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 좀 설명해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물론 만약 버스가 교통사고가 나거나 한 상황이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긴 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 그런가?

        

       교통사고가 나서 내 몸이 이렇게 아픈 건가?

        

       슬슬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로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씩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나는 버스를 타고 퇴근하다가 교통사고를 겪은 모양이다. 그래서 몸이 이렇게 아픈 거고, 저렇게 경찰들이 와 있는 거겠지.

        

       “학생,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복을 입은 경찰 중에서 더 나이가 많은 아저씨 쪽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험상궂게 생기기는 했지만 묘하게 잘생긴 아저씨였다. 뭐랄까, 잘 나가는 중년 배우가 형사 영화에 나올 때 같은 모습이다.

        

       ……나는 학생이라고 불릴 나이는 더 이상 아니었지만, 뭐, 상대가 그렇게 생각해주는데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요. 그냥 마음 놓고, 우리의 질문에 대답…… 아니, 고개만 끄덕여도 되니까요.”

        

       옆에 있는, 나와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보이는 젊은 형사가 그 말을 받아주었다.

        

       중년의 형사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다시 정중하게 의사에게 넘겨주고,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내 쪽으로 허리를 살짝 숙이다가, 그렇게 해도 시선의 높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마치 옆 침대에 들리지 않게 해주겠다는 듯 작게 나에게 물었다.

        

       “혹시 가정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습니까?”

        

       “……?”

        

       갑자기 뭔소리여.

        

       나는 나 나름대로 조금 전까지 상황을 그럭저럭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교통사고와 가정폭력에 상관관계가 있나? 혹시 설마 내가 교통사고의 주범이나 뭐 그런 거로 의심받고 있는 건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형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 얼굴에 나를 의심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를 겁주지 않으려는 듯, 시야를 맞추면서도 일정 거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저 말은 문자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가정폭력이라니.

        

       나는 가정폭력을 당할 일이 없다. 혼자 살고 있으니까. 원룸 안에 나밖에 없는데 때릴 가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물론 가족들과 다 같이 살던 어린 시절이라고 가정폭력에 시달린 적도 없다.

        

       내가 고개를 저으니, 경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학생의 등에 난 멍자국들을 봤어요. 폭력이 아니라면 생길 수 없는 자국이었습니다.”

        

       아니, 이 아저씨가 대답을 정해두고 질문을 하네.

        

       그리고 등에 멍이 있다면 당연히 폭력이 아니라 교통사고 때문이겠지. 가정폭력은 고사하고 길 가다가 얻어맞은 적도 없는데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젓자, 나에게 묻는 형사의 미간이 모였다.

        

       “하지만, 학생—”

        

       “그만하시죠.”

        

       형사가 다시 나를 설득하려고 입을 여는데, 갑자기 어느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응급실 입구에 서 있었다. 목 언저리에서 칼같이 쳐낸 단발머리에, 미인이긴 하지만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을 가진 젊은 여자였다.

        

       ……어, 나 저 얼굴 본 것 같은데.

        

       분명 아까 꾼 꿈에서 나온 것 같다.

        

       “아가씨께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

        

       그 표현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응급실 문을 통해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저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응급실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을 보고 의사가 그렇게 소리쳤지만,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이봐요, 병원에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결국 나에게 질문하던 형사도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전화부터 받아보시죠.”

        

       그런 형사에게 젊은 여성은 다소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전화? 전화라니, 그게 무슨—”

        

       그 말에 대꾸하던 형사 아저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 안에 있던 그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화면을 본 형사는 바로 매서운 표정으로 젊은 여자를 한 번 노려본 다음, 전화를 받았다.

        

       “예, 소장님.”

        

       전화는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예,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단답형 대답이 몇 번 들리고, 형사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 젊은 여자를 한 번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뒷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온 다른 경찰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가자.”

        

       “예?”

        

       젊은 형사가 되물었다.

        

       “하지만—”

        

       “일단은.”

        

       하지만 그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린 나이 든 형사는 바로 발을 옮겨 걷기 시작했다. 당황하고 있던 동료 경찰들은 결국 그 형사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

        

       몇 걸음 걷다가 생각났다는 듯 뒤로 돌아선 나이 든 형사가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경찰로 연락해요.”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젊은 여성이 그렇게 말했지만, 형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사는 다시 한숨을 푹 쉬고 몸을 돌렸다.

        

       경찰들이 모두 응급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젊은 여성은, 곧장 그 경찰을 데리고 왔던 의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퇴원하겠습니다.”

        

       “예?”

        

       의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환자의 회복이……”

        

       “이 병원.”

        

       젊은 여성이 의사의 말을 중간에 딱 끊어버렸다.

        

       “이 병원에 유진그룹이 내는 기부금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의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나 하나 퇴원시키겠다고 회사 그룹이 나선다고? 좀 이상하지 않나?

        

       설마 버스 사고에 어떤 회사가 연관되어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보다, 유진그룹이라는 그룹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다. 삼성이나 LG라면 또 몰라. 병원에서 이렇게까지 갑질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고?

        

       나는 시선을 돌려보았다. 벌써 내 침대 주변에는 나를 등지고 서 있는 검은 양복들이 가득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근처 헬스장에 가면 운동하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법한 사람들이 거의 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 서 있으니, 마치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올라가는 것 같아 보였다.

        

       “퇴원, 하겠습니다.”

        

       젊은 여성이 다시 한번 퇴원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고, 결국 의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여성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려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침대 주위를 감싸고 있던 검은 양복들이 바로 자리를 비켜 여자가 나를 바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내 쪽을 향해 똑바로 선 여자는 양손을 공손히 들어 배꼽 위에 올리더니, 그대로 천천히 허리를 숙여 정확한 90도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아가씨,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

        

       그제야 나는 이 여자가 아까도 나를 보고 아가씨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가씨?

        

       *

        

       “아가씨, 몸은 조금 괜찮으신지요?”

        

       병원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알아서 척척 준비해서 멋대로 옮겨놓은 주제에 그렇게 물어봐야 내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보다 아직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손이 닿는 곳까지 몸을 더듬어 보았는데, 확실히 이 몸이 내 몸은 아니었다. 차마 민망한 부분까지 만져보는 것은 조금 그래서, 일단은 그런 곳까지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몸이 어린 건지, 성장이 빈약한 것인지, 둘 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 몸이 한눈에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몸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덩치 큰 검은 양복 중 하나가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을 때는 좀 많이 수치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걸을 수 있는 상태였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일단 그들이 하는 일에 순응하기로 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내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버린 것이라면 최소한의 상황 파악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그 젊은 여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에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메이드복 상태가 된 그녀는 나의 고갯짓을 보고 얌전히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뒷걸음질 쳐서 방 밖으로 나갔다.

        

       무려 두 개로 이루어진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닫히고 나서야, 나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그런 건가?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라이트 노벨과 웹소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이야기. 읽었던 소설의 세계 속에 떨어진다거나, 게임이나 이세계에 떨어진다거나, 그 안의 인물 중 하나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머리의 이성적인 부분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솔직히,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된다는 가정 보다는 그냥 내가 머리를 크게 다쳐서 미쳐버렸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리 한편으로는, 망상 속에서만 일어날 법한 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랬으니까.

        

       나는 팔을 들어보려다가, 포기했다. 여전히 너무 아팠다. 아까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 때보다는 좀 덜했지만, 아픈 것은 여전했다. 적어도 몸을 일으켜 이 넓은 방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없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미니멀하게 꾸며진 방은 마치 드라마 속의 엄청나게 돈 많은 재벌 딸의 방 같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이런 배경을 본 적이 없으니까. 솔직히, 내가 평소에 읽는 것은 만화보다는 웹소설의 양이 더 압도적이었으니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히 특징적인 곳이 없다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글로 아무리 세세하게 묘사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떠올리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니까.

        

       ……오늘은 이만 잘까.

        

       아까 병원에서 나와…… 아마도 이 집안에서 운영하는 것 같은 검은 응급차 비슷한 것에 실려 오는 과정에서 잠깐 본 하늘은 완전히 까만 밤하늘이었다. 슬슬 자도 될 시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저 멀리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나는 자는 와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모양이었다.

        

       여전히 온몸이 쑤시고, 목이 따끔거렸다.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며 누워있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자자.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만약 이게 진짜로 꿈이거나 나의 망상일 뿐이라면,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 맞다면…… 그래도 일단 몸이라도 좀 회복해야 어떤 상황인지, 내가 지금 들어와 있는 몸은 누구의 몸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잠이 들기 위해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니, 뭐, 대단한 이유로 그런 건 아니고.

        

       ……불은 어떻게 끄지?

        

       *

        

       결국 전날 밤……이 아니라 오늘 새벽엔, 그 밝은 불 아래에서 눈을 꾹 감고 있다가 그냥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억지로 잠이 들었다.

        

       “아가씨……?”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며시 내렸다. 어제 봤던 그 젊은 여자, 메이드복을 입고 있던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을 표정으로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어제 경찰과 의사를 반쯤 협박할 때 짓던 무표정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녀는 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던 이불과 불이 켜진 천장을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걸어 침대 옆 협탁까지 와 그 위에 있던 작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삑.

        

       그녀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작은 소리와 함께 바로 방의 불이 꺼졌다.

        

       ……저렇게 끄는 거였구나.

        

       최신식 설비가 된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놀러 갔을 때는 저런 기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쪽팔림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으니, 메이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녀의 손은 몹시 차가웠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뜨겁거나. 사실 감기나 몸살이라기보다는 그냥 쪽팔려서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거다.

        

       “아직 열이 조금 있으시네요. 역시 오늘 일정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정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참 다행인 말이었다.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정확히는 그 정보가 내 머리에 들어온 적도 없었다. 나는 애초에 이런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이대로 누워서 푹 쉬세요. 컨디션을 회복하면 그때부터 움직이셔도 괜찮으니까요.”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는 그런 나에게 싱긋 웃어 보이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말했다.

        

       “곧 아침을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십 초 정도 센 다음, 나는 몸을 일으켰다.

        

       “큿…….”

        

       여전히 등과 허리가 쑤시고 팔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전혀 움직이지 못했던 어제보다는 훨씬 나았다.

        

       눈 앞에 손을 가지고 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손보다 훨씬 작고 여린 손이었다. 과연 ‘아가씨’라는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손이었다.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손.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긴 했지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수는 있었다.

        

       “아, 아.”

        

       입을 열어 소리를 내 보았다. 다소 낮은 편이었던 나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다소 높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듣자마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몸을 더듬었을 때나, 손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마치 마이크 테스트하듯 그렇게 중얼거려봤지만, 여전히 내 목에서 들리는 소리는 가련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어제 비명을 지른 탓인지 조금 쉬어있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목소리가 예쁘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히 남자였을 나의 앞머리보다 훨씬 더 긴 앞머리가 느껴졌다. 손을 머리 뒤로 하자, 등 뒤까지 늘어진 머릿결이 느껴졌다.

        

       엄청나게 결 좋게 관리된 머리카락이었다.

        

       “……좋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내가 지금 와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어떤 인물인지.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작품 내의 인물인지, 아닌지.

        

       일단은 그거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 머릿속에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보통 다른 세상으로 건너오면 편리한 능력 하나 정도는 생기는 법이다. 뭐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작가가 독자들에게 특정 캐릭터의 능력을 명확하게 깔끔하게 보여주기 위해 차용하는 방식이 하나 있지 않던가.

        

       우선 그것부터 실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정말로 먹힌다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테니까.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음을 크게 먹은 뒤에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창.”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 스테이터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발음이 부정확했나? 어쩌면 목이 쉬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크흠, 크흠.”

        

       나는 목에 손을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다시 한번, 아까보다 명확한 목소리로 외쳤다.

        

       “상태창!”

        

       “……아가씨?”

        

       “…….”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몸이 딱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황동색의 고급스러운 쟁반을 들고 있는 메이드가 아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하얀 죽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 준비하러 간다고 했었지.

        

       “…….”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니, 무슨 문을 여는데 소리도 안 들리냐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후원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셨기에 노벨피아의 독자닉네임 시스템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아직 연재도 시작되지 않은 작품에 이렇게 후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작은 플러스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소설이지만, 이번에도 독자님들과 함께 끝까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언제나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설렘과 함께 두려움도 찾아오는 법이죠. 하지만 그저 두려워하기만 해도 소설이 저절로 써지지는 않는 법이죠. 지난 소설을 쓰면서 독자님들과 함께 했던 기억이 워낙 좋게 남아있어서, 이번에도 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이전에 올렸던 소설처럼, 이번 소설도 매일 쉬지 않고 써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예약 시스템도 제대로 활용해보려 합니다. 이전 작은 매일 올리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사실 올라오는 시간이 불규칙했으니까요. 매일 같은 시간에 오시면 언제나 최신화를 볼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에게 정말 도저히 소설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큰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 소설은 매일 오후 5시에 연재됩니다.

    저의 지난번 소설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처음 만나는 분들도, 정말 반갑습니다. 부디 이번 소설도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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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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