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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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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낯선 천장이다….”

         

         김선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다지 담담하진 못했다. 그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이란 말인가. 낯선 천장, 낯선 세상, 그래. 이세계 빙의, 전이, 환생, 뭐든간에!

         

         실제로 그는 대단히 오랜 시간 이 순간을 준비해 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준비해 왔다’는 부분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세계 환생의 기초 조건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감사의 5,700자 비평문 제출]과 [완결까지 정독하기]다.

         

         여기서 착안해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김선우의 ‘준비과정’을 알 수 있다.

         

         읽은 모든 소설, 웹툰, 그리고 게임. 무엇이든 마음에 든 작품. 즉, 빙의하고 싶은 모든 작품들에 [5,700자 비평문]을 제출하는 행위다.

         

       

       

         매일매일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쉼 없이, 매번 다른 레퍼토리로, 치밀하고 꼼꼼하게.

         

         빙의할 작품이니 당연하게도 스토리, 설정, 혹시 모를 히든피스나 유물, 주요 캐릭터들의 인물 관계도 따위를 달달 외워가면서.

         

         오직 창작자의 마음을 부수기 위한 5,700자를, [그러면 네가 한 번 해봐라]라는 말이 들릴 때 까지.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근성 없는 작가들의 절필, 또는 각종 커뮤니티의 조리돌림과 차단으로 끝을 맺었지만 결국 그는 승리했다.

         

         마침내 이세계에 빙의하고 만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게 무슨 작품이냐. 오직 그것 뿐!

         

         

         “상태창!”

         

         

         알록달록한 증강현실 푸른 디스플레이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악플을 남긴 명단에선 상태창이 없는 작품들도 많았으니까. 오히려 목록을 지위 나갈 단서를 얻어낸 셈이다.

         

         거기에다 이제 막 너댓 살은 된 것 같은 어린 아이의 몸이다. 시간도, 능력도 그의 편이나 다름 없었다.

         

         낡고 헤진 옷감과 허름한 천장도 오히려 좋다.

         

       

       

        -이 정도의 천재가 이런 곳에서?!

        -그야말로 참된 호걸!!

        -왕위도 재물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 다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낼수록 성공이 더 위대해 보인다는 것은 지구의 온갖 매체들로 이미 증명된 바 있으니.

         

         김선우는 슬쩍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선은 그래, 간단하게 ‘비누 만들기’ 부터 시작해볼까.

         

         

        *

         

         

         4살. 빙의 1주차.

         

         김선우는 자신의 몸이 ‘이반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부모는 소작농이며, 제 나라 이름은커녕 글자 조차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비누 만들기에 실패한 이후, 양잿물로 장난을 쳤다는 것에 따끔하게 혼이 나고.

         

         사실 이 세상엔 비누라는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살. 빙의 6주차.

         

         마침내 김선우는 달걀 심부름을 통해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보자마자 그는 이상한 조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문을 찍어낼 수 있고, 그걸 이런 시골까지 유통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라면 적어도 중세는 아닌데?”

         

         그의 ‘빙의 작품 명단’ 대부분이 그날 삭제되었다.

         

         

         

         4살. 빙의 15주차.

         

         드디어 김선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막연히 ‘나랏님’이라고 불리던 왕의 이름까지 듣고 난 뒤에,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방 한 구석에 모셔둔 소중한 ‘빙의 작품 명단’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처음 듣는 나라, 처음 듣는 군주, 그리고 주변 왕국들 모두가 처음 듣는 이름 뿐이었으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무슨 작품에 빙의했느냐’가 아니라.

         

         ‘이게 대체 무슨 장르냐’였다.

         

         제발 다크판타지만은 아니길. 소작농, 거기에 상태창도 빙의 특전도 없는 현대 한국인의 생존률은 보통 5% 미만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8살. 빙의 4년차.

         

         놀랍게도 뜬금없이 마왕이 나타났단다.

         

         전쟁은 아직 저 먼 나라의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매일같이 뿌려대는 호외는 암담한 이야기만 싣고 있었다.

         

         8살 겨울.

         

         김선우의, 아니. ‘이반’의 부친이 징병관에게 붙들려 떠났다.

         

         ‘이반’의 모친은 어린 ‘이반’을 먹여 살리기 위해 품앗이를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김선우의 자아가 살짝 어긋나기 시작했다.

         

         

         

         10살. 빙의 6년차.

         

         김선우는 이제 어머니를 따라 품앗이 일감을 제법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12살. 빙의 8년차.

         

         김선우는 마침내 글을 익혔다. 6년동안 촌장의 집에 달걀을 빼돌려 전달한 대가였다.

         

         

         

         14살. 빙의 10년차.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그의 마을에 전달되었다.

         

         우스운 점이라면, 그것이 2년 전에 발행된 공문이었다는 것이다.

         

         목숨값을 대신해 동전 몇 푼을 받아들고, 그는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이 세상의 장르가 전략 시뮬레이션일 거라는 점.

         

         어쩐지 너무 세밀하다 했다. RPG였다면 보통 나라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았을 테니까. 플레이어가 경험할 수 없는 배경은 대부분 구현하지 않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렇다고 소설이나 웹툰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이세계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묘한 설정, 간단한 화약무기와 증기 기관, 기사와 마법사, 마왕과 이종족이 공존하는 이 세상이 그 증거였다.

         

         이런 세계관을 소설로 쓰면 ‘그게 뭔데 씹덕아’, ‘또 자기만 아는 얘기만 하네.’ 같은 소릴 들으며 무료 연재 연중 결말이 뻔했으므로.

         

         그렇다면 당연히 전선으로 나서야 했다. 이런 낙후된 시골에서 소작농으로 살다 죽으면 영영 메인스토리에 발 한 번 딛지 못하고 끝날 테니까.

         

         전략 시뮬레이션의 엔딩은 보통 세계 정복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모른 채 마왕군에 정복당하는 엔딩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걱정 마세요 어머니.”

         

         

         울다 지쳐 잠든 어머니의 머리칼을 쓸어 만지고, 모병관에게 입영 신청을 내밀었다. 연봉은 동편 15닢. 그걸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송금하기로 계약했다.

         

         ‘이반 페트로비치’는 이 여자의 손이 더 이상 부르트지 않길 바랐다.

         

         갑작스레 생겨난 어떤 효심이라기보다는, 생판 남인 자신을 위해 온몸 바쳐 살아가는 위대한 여성에 대한 측은함과,

         

         ‘이반’이라는 어린 소년의 몸을 차지하며 그녀의 유일한 혈육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18살. 빙의 14년차. 군역 4년차.

         

         작은 군공과 사소한 행운에 힘입어, 이반의 신분은 ‘징집병’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었다.

         

         이반의 몸이 예상 이상으로 싸움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2살. 빙의 18년차. 군역 8년차.

         

         전선이 치명적인 수준으로 밀려나가고, 연합국의 절반이 불타올랐을 때.

         

         용사가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이반은 드디어 이 세계의 장르를 깨달았다.

         

         이건 용사물, 즉 정통 RPG였다.

         

         그러나 용사는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고, 이반이 출정한 전선은 여전히 처참하게 밀리고 있었다.

         

         

         

         28살. 빙의 24년차. 군역 14년차.

         

         용사 파티가 마왕군의 장수들을 요격해나가며 전황이 반전된다.

         

         이반은 이제 ‘수복 지역 장악 및 적성 세력 색출 부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을 단순하게 줄이자면 이랬다.

         

         

        -절멸 부대

         

         

         용사 파티가 적장을 죽이고, 혼란에 휩싸인 적진이 붕괴될 때 투입되던 특작 부대였다.

         

         이때부터 약 1년간, 이반은 용사 파티와 같은 군영을 사용하며 이동한다.

         

         

         

         30살. 빙의 26년차. 군역 16년차.

         

         용사 파티가 마왕을 죽였다.

         

         이반은 이제 엔딩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32살. 빙의 28년차.

         

         마왕이 죽고 2년이 지난 시점까지 엔딩은 없었다.

         

         그 사이 절멸부대의 인원은 5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신병을 충원해주지 않는 시점에서, 이반은 상부가 그들을 해체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지나 다름없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이반은 이 상황이 기나긴 에필로그라고 여기며 전역을 신청한다.

         

         고향의 모친은 이미 10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그는 온전히 홀로 남았다.

         

         수도 인근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전쟁 고아들을 거뒀다.

         

         작은 위선이었다.

         

         

         

         34살. 빙의 30년차.

         

         여전히, 지금도, 아직까지도.

         

         엔딩 크레딧은 보이지 않는다.

         

         

        *

         

         

         어쩌면 RPG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아원을 찾은 한 손님에 의해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시발.”

         “네?”

         “시발. 이거 아카데미물이었다고?”

         “선배님…?”

         

         

         손님은 갑작스럽게 욕설을 내뱉는 고아원장(전쟁영웅, 군복무 이력 18년, 절멸부대 출신, 용사파티와 친분이 있음)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궁정에서 파견된 손님은 이 고아원장의 수많은 별명들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대왕의 처형인, 벌목기, 칠용장을 도살한 사내, 불사자, 예비대. 징집병들의 살아있는 신화.

         

         그런 흉흉한 사내가 지금 말실수라도 하면 도끼로 찍어버릴 기세였으므로, 손님은 곤혹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아원장의 분노가 사그라들 때 까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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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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