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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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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이다.

         

       죽었다는 얘기다.

         

       과로사를 꿈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생물은 너무 과하게 일을 즐겨도 죽을 수 있었나 보다.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전략기획실로 직무 이동에 성공한 것? 너무 기뻐 야근으로 몸을 축낸 것?

         

       원인이 어쨌건 죽어버렸다.

         

       으윽.

         

       담담하게 과거를 짚고 보니 울분이 치밀었다. 더 이상 속마음을 안 외치고는 못 버티겠다.

         

       돌려줘.

         

       내 삶.

         

       재벌 일가에 빌붙는 내 해피라이프를……!

         

       아니 사람이 로열패밀리 구두 핥으며 사는 거에 기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주인님 구두 핥기에 열중했다고 그엑-! 하고 죽어버리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 건데.

         

       회장님의 서브 비자금을 밤낮 안 가리고 세탁한 게 그렇게 잘못됐어? 이거 내가 삥땅 칠 수 없나 고심한 것도 잘못이야?

         

       그으.

         

       백번 양보해서 잘못된 인생일 수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값을 치러줘야 한다 생각해.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값을.

         

       흠흠.

         

       막 그런 거 있잖아. 이세계 빙의라거나 치트키 습득이라거나. 뭐 과거 회귀도 나쁘진 않지.

         

       쓰읍.

         

       회귀 치트로 이참에 내가 재벌 돼 봐? 어? 솔직히 회장놈 마음에 안 들었어. 주인이면 주인답게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비자금도 안 나눠주고, 못생긴 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보이는 건 소망과 달랐다.

         

       광장, 마차, 서양식 건축물.

         

       중세? 르네상스? 근대 직전?

         

       저 하늘엔 날아다니는 배가 보였다.

         

       와, 판타지.

         

       내 삶은 평범한 현대였는데 갑자기 판타지.

         

       일하다 쓰러지고 깨어나 보니 유령이고 있는 곳은 원인 모를 판타지였다.

         

       뭔가 중간 과정이 많이 생략된 거 같다. 죽음을 설명해 줄 천사님은? 치트키를 선사해 줄 신님은?

         

       서, 설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죠?

         

       지금 심정이라면 로열패밀리의 구두를 두 켤레는 깨끗하게 핥을 수 있을 거 같다. 잘할 자신 있어.

         

       하지만 소망과 다르게 해가 지고 다시 뜰 동안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이 새까맣고 동그란 유령 몸체로 주변을 떠돌았다. 천사나 저승사자 등등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러다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다.

         

       유령 몸체로 꽃 화분의 잎사귀를 톡 건드려 봤다.

         

       잎사귀는 그에엑 하며 어느 과로사한 누구처럼 썩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전염되듯이 줄기가 썩고 꽃이 떨어졌다.

         

       아름답던 화분이 망가졌다.

         

       이번엔 지붕에 앉은 고양이에게 날아 가봤다. 설마 죽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다가갈 때쯤 기겁하며 캬악대더니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아.

         

       동식물에게 배척당했다.

         

       벽지 농촌에 정착한 외지인이 마을 텃세와 마주쳤을 때 이런 심정일까? 내 연약한 마음에 스크래치가 그어진 기분이야.

         

       타차원에서 온 침입자였으니 정말 외지인이 맞긴 했지만.

         

       다행히도 사람은 동물처럼 기겁하진 않았다. 인식을 못 하는 느낌? 너무 무방비했지만 터치해 보진 않았다. 나는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니까.

         

       시간이 흘렀다.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천사, 저승사자 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승 공무원이 일을 안 하는데?

         

       민원 창구를 찾을 겸 근처 대신전에도 들어가 봤다. 신관들이 죄다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참사가 일어나 도망친 참이었다.

         

       외지인 차별이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별수 없다. 저승 공무원에겐 미안하지만 현장 급습을 할 수밖에.

         

       유령이 존재한다면 생명의 탄생 순간에 저승 공무원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가 탄생할 만한 곳에 가보자.

         

       행복한 가정을 하나 알고 있다. 대귀족인지 결혼식에 마차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넓은 정원을 사람과 웃음이 채웠다.

         

       좋은 환경에 부부는 알콩달콩하기까지 했다. 티타임에 쿠키를 서로 먹여주더라. 오, 분위기 좋아.

         

       특별한 일이 없다면, 행복은 언제까지나 이어지겠지.

         

       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임신하지 않았을까? 귀족이면 후계자 준비는 의무기도 하고.

         

       유리 창문으로 내부를 힐끔 살펴봤다. 의사와 부부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사가 뭔가 말하자 밝은 표정의 아내가 배를 문질렀다. 남편이 웃으며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임신 대화인가?

         

       축하할 일이네.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어.

         

       내가 이 기쁜 날을 축복해 줘야지.

         

       새까만 몸체를 경건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진심을 기원했다.

         

       이 부부의 인생에 오늘 같은 날만 이어지길.

         

       영원토록.

         

       찻잔이 떨어졌다. 잔이 깨지고 날카로운 파편이 비산했다. 홍차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잔을 떨어트린 아내가 당황했다. 하녀들이 기겁하며 조각을 치웠다.

         

       저런, 조심하지.

         

       문득 탈력감이 느껴졌다. 기원의 실타래에 이끌리듯 몸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어둡고 따듯한 공간.

         

       어? 여기는?

         

       아내 측의 뱃속?

         

       환생했다.

         

       여자애로.

         

         

         

       #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어째 코즈믹 호러의 창시자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전혀 상관없었다. 러브 띄고 크래프트다. 흉흉하게 붙여서 읽지 말자.

         

       오히려 러브는 외형에 잘 어울리는 미들네임이었다.

         

       분홍 머리, 분홍 눈동자, 착하고 선량하며 긍정적인 마음씨.

         

       외형 설명하다가 마음씨 언급하는 게 어째 자화자찬 같다고 느껴진다면, 그게 맞다. 하지만 사실인걸.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고운 마음씨를 세상에 선보일 기회는 여태 없었다.

         

       환생하고 의식이 날아갔다.

         

       그리고 회복되지 않고 13년이 흘렀다.

         

       백치 상태로 말이다.

         

       아가씨가 영혼이 나간 거 같은데……? 상태로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 그대로 밥만 먹고 자랐다.

         

       그래도 주변 노력 덕분에 언어와 글은 간신히 뗐다는 게 다행이었다. 머릿속 상식에 안도감을 느끼는 건 참 복잡한 기분이야.

         

       하지만 노력엔 대가가 있었을까? 어째 집안 상황이 안 좋아졌다. 매우 나쁘게.

         

       영혼이 안착되니 황량한 방이었다.

         

       가구도 카펫도 없는 실내.

         

       군데군데 변색되지 않은 바닥만이 원래 있던 가구를 알려줬다. 모두 팔아치운 듯했다.

         

       온기도 인기척도 없다.

         

       각종 기억이 언뜻 떠올랐다.

         

       어머니가 죽었다. 데릴사위였던 아버지는 가산을 팔아치워 잇속을 챙겼다.

         

       내가 가주다.

         

       백치였던 내가.

         

       이곳에 방치된 내가.

         

       배가 꼬르륵 울렸다.

         

       “아니, 내 해피라이프가?!”

         

       파스텔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홍 머리가 휘날렸다.

         

       분명 재벌 일가의 구두를 핥아주는 삶 대신 도덕적으론 불명예스러운 귀족 라이프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맛도 못 보고 좌초됐어?

         

       “내 인생이……!”

         

       구두 잘 핥을 수 있었는데.

         

       적성에 맞았는데.

         

       으어.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았다.

         

       회장님의 비자금이 그리워.

         

       삥땅 쳐볼걸.

         

       바람이나 쐴 겸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겨울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우와앗.”

         

       다시 창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지상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응? 비좁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끝없이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그런데 녹색 초목이 울창하고 오색 꽃다발이 만연해야 할 정원은 정작 혼탁했다.

         

       식물은 썩어 문드러진 채 색을 잃었다. 이곳저곳엔 짐승 혹은 인외의 형상을 한 검은 형체가 돌아다녔다.

         

       그중 일부가 파스텔을 발견하곤 괴성을 질렀다. 사나운 적의가 찌릿하게 다가왔다.

         

       파스텔은 다른 의미로 정신이 멍해졌다.

         

       집안 꼴이 왜 이래?

         

       생물적 위협?

         

       현대인에겐 당혹스러운 사태인데요.

         

       괴성을 지르던 검은 인외가 달려왔다. 그리고 고층 창문을 향해 도약했다. 괴성이 귀청을 때렸다.

         

       움찔한 파스텔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거리를 벌리고 상황을 지켜봤다. 추락음과 함께 서로 싸우는 소란이 이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결혼 사기꾼이 됐네. 저택은 난장판에 어린 나는 방치됐고?

         

       방을 나가서 사용인을 붙잡고 상황을 파악해야겠다. 가주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진 잘 모르겠지만 결국 신분제 아니겠어.

         

       습관대로 문을 열다가 싸한 본능에 멈칫했다.

         

       설마 실내도?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살펴봤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늑대가 시선을 줬다. 세로 동공이 확장됐다. 주둥이가 벌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오…….

         

       안녕 친구? 우리 친구 맞지?

         

       아니었다.

         

       늑대가 짖으며 달려들었다. 검은 침방울이 튀었다.

         

       파스텔은 빠르게 문을 닫았다. 황급한 손길이 막대 잠금장치를 걸었다. 동시에 충돌이 문을 흔들었다. 막대가 요동쳤다.

         

       떨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벌렸다.

         

       서둘러 방안을 둘러봤다.

         

       무기, 무기!

         

       가구는 있지도 않고 휑했다. 그나마 보이는 건 덮고 있던 이불, 구석에 버려진 나무토막.

         

       나무토막?

         

       파스텔은 잽싸게 나무토막을 주웠다.

         

       팔뚝만 한 길이와 굵기였다.

         

       너무 짧은데?

         

       잡고 휘둘러 봤다. 붕붕 소리도 아니고 휙휙 소리가 났다. 콘서트 응원봉 같다.

         

       비둘기도 못 잡겠어.

         

       “으아, 완전 구려.”

         

       무기가 아니지 않아?

         

       다시 방안을 둘러봤지만 있는 건 없었다.

         

       “재수도 없지.”

         

       파스텔은 별수 없이 나무토막을 잡고 방문을 겨눴다. 거칠게 흔들리는 방문을 노려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서늘한 공기와 먼지 한 톨의 움직임이 의식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문득 잠금장치에 시선이 갔다. 막대는 떨리며 소음을 냈지만 건재했다. 튼튼하다.

         

       어?

         

       안 부서지네? 사실 안전한 상태 아니야? 응원봉 들고 싸울 필요 있나?

         

       파스텔은 긴장을 유지한 채 상황을 주시했다. 얼마 뒤 늑대의 힘이 빠졌는지 방문이 잠잠해졌다.

         

       더 기다려 봤지만 변화는 없었다.

         

       양팔을 번쩍 들었다.

         

       “기술 문명 만세!”

         

       인류의 승리다!

         

       방문을 더 지켜보다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현대인은 몸을 쓸 게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하는 법.

         

       난감한 정원은 내버려 두고 지평선 끝자락의 하늘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에 배가 날아다녔다.

         

       한참을 관찰했다. 비공정 몇 척이 제각각인 경로로 평화롭게 떠다녔다.

         

       “역시 그렇지. 이 곤란한 사태는 우리 집에만 일어났어.”

         

       그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파스텔은 신뢰도 안 가는 나무토막을 대충 버렸다.

         

       구조를 기다릴 거다.

         

       신분이 신분인데 외부 구조가 안 올 리가.

         

       대응하느라 밟아버린 이불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겨울 원피스 위에 둘렀다. 잠시 뒤 차갑던 감촉이 가시며 추위가 덜해졌다.

         

       으아, 이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적당히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느껴졌다.

         

       한참 멍을 때리다 앉은 채 뜬잠을 잤다.

         

       긴 시간이 흘렀다.

         

       유일한 창문의 광원이 사라졌다가 생겼다. 햇빛이 차가운 방안을 비췄다.

         

       하루가 지났다.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비슷한 소란도 들리지 않았다.

         

       파스텔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먹지 않아 낮아진 체온이 손끝을 시리게 했다. 갈증이 일었다.

         

       나무토막을 주웠다.

         

       방안을 살펴보다가 석재 바닥의 거친 이음새를 발견했다. 나무토막을 그곳에 댔다. 체중을 실어 밀자 나무가 조금 갈렸다.

         

       원위치하고 다시 밀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나무는 갈리며 뾰족하게 변해갔다.

         

       늑대의 송곳니처럼.

         

       어디 누가 죽나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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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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