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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10화. 하프엘프라니.
     
     
     
     
     
     
     
     
   레이나와 한강호는 잠시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사람을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는 건데.’
     
   괜히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결국 레이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모두 방호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혈흔과 끈적임이 느껴지는 흔적이 온몸에 잔뜩 묻어있었다.
     
   ‘이제 막 1차 사이렌이 울린 것뿐인데, 벌써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것이 레이나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어떤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니, 그 남자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척 뜨거워 보였다.
     
   ‘어머? 설마,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내 미모에 눈을 못 떼는 거야? 남자네.’
     
   잠깐 황당함을 느끼던 레이나는 금방 수긍했다.
     
   ‘하긴, 내 몸매가 방호복으로 가려지는 수준은 아니지.’
     
   레이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뽐내듯 가슴을 폈다.
   그 순간 문득, 앞에 서 있는 리사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
     
   그녀는 다시 자세를 고쳐 겸손하게 섰다.
     
   그렇게 레이나가 혼자 얼굴을 붉혔다가 웃었다가, 다시 겸손해지는 사이, 강호는 자못 심각했다.
     
   [이름]: 레이나 디아즈.
   [소속]: 총무부 / 운영 4팀.
   [직책]: 시스템 운영팀장.
   […]: ……
   [종]: 엘프(하프) / 1차 변이체.
   [특성]: 원소 친화(종족 특성). 집행자.
   [등급]: Lv. 5
   [강화]: 50%
   [속성]: 투명화. 가속화. 피부 경질화(硬質化/Hardening).
   [전문 기술]: 소멸. 양손 특화.
   [보조 기술]: 원소 추출. 도약.
     
   눈앞에 펼쳐진 레이나의 정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항목은 그녀의 ‘종’이었다.
     
   ‘하프엘프라니.’
     
   지구에서 인간 외의 진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게, 현실 세계에 실존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는 그냥 인간이었다.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에 긴 검은색 웨이브진 머리, 보기에도 탄력 넘치는 근육질 몸매가 전형적인 히스패닉계 미녀였다.
     
   인간과는 톤 자체가 다른 투명한 피부나 뾰족한 귀 같은, 흔히 알려진 엘프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능성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한강호 자신도 피폭 전에 이미 1차 변이체였다.
   그건 특수 혈청 주입이 원인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나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하프, 아니던가.’
     
   어떤 실험으로 인해 종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과 다른 이종 간의 인공 수정으로 태어났다거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니, 직전까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좀비나 누더기 골렘이 떠올랐다.
     
   ‘미친 과학자 놈들. 꼭꼭 숨어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그다음으로 드는 의문은 ‘특성’이었다.
     
   [집행자]
     
   강호 자신의 특성인 ‘우레폭풍’이나 사토시의 ‘닌자’를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 역할이나 의미가 궁금했다.
     
   다만, 속성과 전문 기술 항목을 보면서 그녀의 능력이나 주특기 등을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근접전에 특화된 전투기술과 능력일 것 같기는 한데.’
     
   종족 특성과 보조 기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하프 엘프라고 가정하면 이상한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믿기지 않는 레이나의 정보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게 없다.’
     
   강호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정확한 건 차차 알게 되겠지.
     
   “그런데, 어디에서 오셨죠?”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고 있던 강호에게 들려온 질문이었다.
     
   “10층에서 올라왔습니다.”
     
   강호의 대답에 레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요? 정말인가요?!”
     
   일행은 그녀가 놀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살아서 올라온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네. 이해해요. 저희도 겨우 살았거든요. 10층 전체가 폭파됐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도 아니죠.”
     
   그 말에 레이나가 되물었다.
   
   “그러면, 지하 10층의 생존자는 여기 네 분이 전부인가요?”
   “….”
     
   리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강호를 돌아봤다.
   여기까지 헤치고 온 그 수 많은 좀비,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들이 바로 생존해서 올라왔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강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강호 일행이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승강기의 비상 장치를 가동한 순간, 상승하는 승강기 레일이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걸 봤다.
     
   리사와 사토시는 경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놓을 수 없는 위기여서 만은 아니었다.
   폐쇄라는 게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강호는 알고 있었다.
   재난 매뉴얼에 정확히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미리 설명해 줄걸 그랬나.’
     
   그나마 살아서 9층에 도착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애초에 다수를 살릴 방법은 없었고, 함께 있는 사람만이라도 살리자는 게 강호의 목표였다.
     
   하지만 마음속 공허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생존의 기쁨을 나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힘없이 승강기에서 내린 일행을 반긴 건 요란한 사이렌이었다.
     
   왜애애애애애앵!
     
   9층에 도착해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울려대는 시끄러움에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어쩌면 사이렌 소리가 벌써 트라우마가 됐는지, 뇌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몸은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 강호 씨가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강호의 안내로 대피소에 들어선 직후 리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진료실에서 처음 정신이 들고 한강호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눈물이 날뻔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건 본능 같은 것이었다.
   마치 새끼 오리의 각인 현상처럼.
     
   이후 모든 순간이 결코 쉽지 않았던 탈출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생존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싸우면서도 한강호의 등이 보이면 마음이 놓였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강호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냉철했다.
   언제나 과묵하고 차분한 그에게서 감정 기복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자신이 담당했던, 정신과 상담을 받던 PTSD 환자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빠르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갈 때, 한강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고생 많았다.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사는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히스패닉계 미녀 특유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그녀에게 돌아서던 순간, 먼저 이름이 들려왔다.
     
   “너무 경황이 없어 제 소개도 못 했네요. 저는 레이나라고 해요.”
   “저도 막 그 생각을 했어요. 저는 리사, 저분은 한강호 씨, 그리고 저쪽은 사토시. 여기는 울프예요.”
     
   모두를 대신 소개한 리사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헨리도 마저 소개했다.
     
   “아, 그리고 헨리 박사님은 9층 연구소분이세요. 저희가 이곳에 왔을 때 먼저 와 계셨어요.”
     
   중년의 사내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중에도 여전히 핼쑥한 얼굴과 퀭한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이상해.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던 때, 사토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말이 많던 그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그리고 현재 그의 시선은 레이나에게 박혀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슴과 허리, 골반을 스캔하듯 오르내렸다.
     
   ‘날 볼 때 늘 저런 표정이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서 씰룩댔다.
   자신을 볼 때는 몰랐는데,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그게 어떤 눈빛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토시, 그런 거였어?”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리사의 미간에 주름이 지고, 입이 앙다물어졌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사토시가 흠칫하며 손사래 쳤다.
     
   “아, 아니무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그는 괜히 옆에 편하게 누워있는 울프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딴청을 부렸다.
     
   “흠, 흠.”
     
   그렇게 간단한 통성명을 끝낸 이후, 서 있는 두 여자는 본격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다들 각 분야의 뛰어난 박사들이어서인지,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강호는 그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눈은 열심히 일행들의 능력치 변화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름]: 리사 아즈벨.
   […]: ……….
   [특성]: 원소 술사.
   [등급]: Lv. 3
   [강화]: 35%
   [속성]: 4대 원소(화염 특화).
   [전문 기술]: 원소 형질 변환.
   […]: ……….
     
   등급이 상향됐다.
   그리고 특성과 속성이 달라졌다.
   좀 더 전문화가 됐다고 해야 할까.
   사토시와 울프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사토시 한조.
   […]: ……….
   [등급]: Lv. 2
   [강화]: 60%
   [속성]: 닌자(경호 특화).
   [전문 기술]: 은신, 투척, 호위.
   […]: ……….
     
   특히 울프는 강호와 함께 최전방에서 좀비와 뒤섞여 싸우다 보니 저절로 흡수한 에너지 핵의 양이 많아 2등급이나 올랐다.
     
   [이름]: 울프
   […]: ……….
   [등급]: Lv. 4
   [강화]: 5%
   [속성]: 물리.
   [전문 기술]: 돌격. 분쇄.
   [보조 기술]: 경계. 경비. 탐색. 수색. 위협(도발). 호위.
   […]: ……….
     
   강호는 항목에 추가된 내용 중 스킬로 분류할 수도 있는 보조 기술의 변화를 보며 생각했다.
     
   ‘경험, 그게 다 반영됐다. 그게 셋의 공통된 변화다.’
     
   그렇다면, 내 능력치 변화는 왜 다른 거지?
     
   강호는 자신의 상태창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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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하프엘프라니.

레이나와 한강호는 잠시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사람을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는 건데.’

괜히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결국 레이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모두 방호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혈흔과 끈적임이 느껴지는 흔적이 온몸에 잔뜩 묻어있었다.

‘이제 막 1차 사이렌이 울린 것뿐인데, 벌써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것이 레이나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어떤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니, 그 남자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척 뜨거워 보였다.

‘어머? 설마,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내 미모에 눈을 못 떼는 거야? 남자네.’

잠깐 황당함을 느끼던 레이나는 금방 수긍했다.

‘하긴, 내 몸매가 방호복으로 가려지는 수준은 아니지.’

레이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뽐내듯 가슴을 폈다.

그 순간 문득, 앞에 서 있는 리사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

그녀는 다시 자세를 고쳐 겸손하게 섰다.

그렇게 레이나가 혼자 얼굴을 붉혔다가 웃었다가, 다시 겸손해지는 사이, 강호는 자못 심각했다.

[이름]: 레이나 디아즈.

[소속]: 총무부 / 운영 4팀.

[직책]: 시스템 운영팀장.

[…]: ……

[종]: 엘프(하프) / 1차 변이체.

[특성]: 원소 친화(종족 특성). 집행자.

[등급]: Lv. 5

[강화]: 50%

[속성]: 투명화. 가속화. 피부 경질화(硬質化/Hardening).

[전문 기술]: 소멸. 양손 특화.

[보조 기술]: 원소 추출. 도약.

눈앞에 펼쳐진 레이나의 정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항목은 그녀의 ‘종’이었다.

‘하프엘프라니.’

지구에서 인간 외의 진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게, 현실 세계에 실존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는 그냥 인간이었다.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에 긴 검은색 웨이브진 머리, 보기에도 탄력 넘치는 근육질 몸매가 전형적인 히스패닉계 미녀였다.

인간과는 톤 자체가 다른 투명한 피부나 뾰족한 귀 같은, 흔히 알려진 엘프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능성 정도는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한강호 자신도 피폭 전에 이미 1차 변이체였다.

그건 특수 혈청 주입이 원인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나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하프, 아니던가.’

어떤 실험으로 인해 종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과 다른 이종 간의 인공 수정으로 태어났다거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니, 직전까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좀비나 누더기 골렘이 떠올랐다.

‘미친 과학자 놈들. 꼭꼭 숨어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그다음으로 드는 의문은 ‘특성’이었다.

[집행자]

강호 자신의 특성인 ‘우레폭풍’이나 사토시의 ‘닌자’를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 역할이나 의미가 궁금했다.

다만, 속성과 전문 기술 항목을 보면서 그녀의 능력이나 주특기 등을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근접전에 특화된 전투기술과 능력일 것 같기는 한데.’

종족 특성과 보조 기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하프 엘프라고 가정하면 이상한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믿기지 않는 레이나의 정보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게 없다.’

강호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정확한 건 차차 알게 되겠지.

“그런데, 어디에서 오셨죠?”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하니 레이나를 바라보고 있던 강호에게 들려온 질문이었다.

“10층에서 올라왔습니다.”

강호의 대답에 레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요? 정말인가요?!”

일행은 그녀가 놀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살아서 올라온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네. 이해해요. 저희도 겨우 살았거든요. 10층 전체가 폭파됐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도 아니죠.”

그 말에 레이나가 되물었다.

“그러면, 지하 10층의 생존자는 여기 네 분이 전부인가요?”

“….”

리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강호를 돌아봤다.

여기까지 헤치고 온 그 수 많은 좀비,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들이 바로 생존해서 올라왔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강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강호 일행이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승강기의 비상 장치를 가동한 순간, 상승하는 승강기 레일이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걸 봤다.

리사와 사토시는 경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놓을 수 없는 위기여서 만은 아니었다.

폐쇄라는 게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강호는 알고 있었다.

재난 매뉴얼에 정확히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미리 설명해 줄걸 그랬나.’

그나마 살아서 9층에 도착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애초에 다수를 살릴 방법은 없었고, 함께 있는 사람만이라도 살리자는 게 강호의 목표였다.

하지만 마음속 공허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생존의 기쁨을 나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힘없이 승강기에서 내린 일행을 반긴 건 요란한 사이렌이었다.

왜애애애애애앵!

9층에 도착해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울려대는 시끄러움에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어쩌면 사이렌 소리가 벌써 트라우마가 됐는지, 뇌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몸은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 강호 씨가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강호의 안내로 대피소에 들어선 직후 리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진료실에서 처음 정신이 들고 한강호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눈물이 날뻔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건 본능 같은 것이었다.

마치 새끼 오리의 각인 현상처럼.

이후 모든 순간이 결코 쉽지 않았던 탈출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생존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싸우면서도 한강호의 등이 보이면 마음이 놓였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강호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냉철했다.

언제나 과묵하고 차분한 그에게서 감정 기복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자신이 담당했던, 정신과 상담을 받던 PTSD 환자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주마등처럼 빠르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갈 때, 한강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고생 많았다.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사는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히스패닉계 미녀 특유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그녀에게 돌아서던 순간, 먼저 이름이 들려왔다.

“너무 경황이 없어 제 소개도 못 했네요. 저는 레이나라고 해요.”

“저도 막 그 생각을 했어요. 저는 리사, 저분은 한강호 씨, 그리고 저쪽은 사토시. 여기는 울프예요.”

모두를 대신 소개한 리사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헨리도 마저 소개했다.

“아, 그리고 헨리 박사님은 9층 연구소분이세요. 저희가 이곳에 왔을 때 먼저 와 계셨어요.”

중년의 사내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중에도 여전히 핼쑥한 얼굴과 퀭한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이상해.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던 때, 사토시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말이 많던 그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의외로 표정이 밝았다.

그리고 현재 그의 시선은 레이나에게 박혀있었다.

정확하게는 가슴과 허리, 골반을 스캔하듯 오르내렸다.

‘날 볼 때 늘 저런 표정이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서 씰룩댔다.

자신을 볼 때는 몰랐는데,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그게 어떤 눈빛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토시, 그런 거였어?”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리사의 미간에 주름이 지고, 입이 앙다물어졌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사토시가 흠칫하며 손사래 쳤다.

“아, 아니무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그는 괜히 옆에 편하게 누워있는 울프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딴청을 부렸다.

“흠, 흠.”

그렇게 간단한 통성명을 끝낸 이후, 서 있는 두 여자는 본격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다들 각 분야의 뛰어난 박사들이어서인지,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강호는 그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눈은 열심히 일행들의 능력치 변화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름]: 리사 아즈벨.

[…]: ……….

[특성]: 원소 술사.

[등급]: Lv. 3

[강화]: 35%

[속성]: 4대 원소(화염 특화).

[전문 기술]: 원소 형질 변환.

[…]: ……….

등급이 상향됐다.

그리고 특성과 속성이 달라졌다.

좀 더 전문화가 됐다고 해야 할까.

사토시와 울프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사토시 한조.

[…]: ……….

[등급]: Lv. 2

[강화]: 60%

[속성]: 닌자(경호 특화).

[전문 기술]: 은신, 투척, 호위.

[…]: ……….

특히 울프는 강호와 함께 최전방에서 좀비와 뒤섞여 싸우다 보니 저절로 흡수한 에너지 핵의 양이 많아 2등급이나 올랐다.

[이름]: 울프

[…]: ……….

[등급]: Lv. 4

[강화]: 5%

[속성]: 물리.

[전문 기술]: 돌격. 분쇄.

[보조 기술]: 경계. 경비. 탐색. 수색. 위협(도발). 호위.

[…]: ……….

강호는 항목에 추가된 내용 중 스킬로 분류할 수도 있는 보조 기술의 변화를 보며 생각했다.

‘경험, 그게 다 반영됐다. 그게 셋의 공통된 변화다.’

그렇다면, 내 능력치 변화는 왜 다른 거지?

강호는 자신의 상태창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Status: Ongoing
When a disaster strikes, I know what to do. Only I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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