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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10.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없어 그저 ‘닫힌 성문’ 이라 불리는 곳에 인영(人影)이 다가온 것은 디에르반의 시민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어 있는 여명이 막 떠오를 때 즘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원은 인영이 도달하기 한 시간 전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쥬르노 평원에서 부터 뻗어 나오는 광활한 북부 평야에서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언덕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장애물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경비대원이 위치해 있는 곳은 60큐빗 높이의 성벽 위였기 때문이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에 경비대원은 도시를 향해 걸어오는 길손들을 몇 시간 전부터 발견하고는 했다. 그들은 대개 남쪽이나 동쪽에서 와서, 다시 남쪽이나 동쪽, 그리고 드물게 북쪽으로 떠나고는 했다.

        

       하지만 인영은 서쪽 -정확히는 남서쪽- 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경비대원이 이곳에 배치된 이유에 적합하지 않게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방향인지라, 경비대원은 인영이 한 시간 거리에 이를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경비대원은 인영이 어지간히 길을 잘못 들었다가 도시를 지나치기 직전 불빛을 발견한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한 경비대원은 인영이 도시까지의 남은 거리를 상당히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줄여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무료한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길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박명이 완연해짐에 따라 인영의 크기도 완연해 갔다. 대략 인영이 15분 후쯤 도달하겠다고 판단한 경비대원은 담요라도 준비해둘 요량으로 몸을 움직였다.

        

       문득, 경비대원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경비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인영은 망토를 푹 눌러 쓰고 있는 듯,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형태가 거칠게 휘날렸다. 바람이 거센 북부에서 망토를 걸치는 것은 특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나, 경비대원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의 깊게 인영을 살펴보았다. 분명 바람은 경비대원의 기준으로 우측, 인영의 기준으로는 좌측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그러면 망토가 움직이는 방향은 인영에서 우측을 향한 쪽일 텐데, 망토에서 움직임이 거센 쪽은 반대방향인 좌측에서 였다. 심지어 그 움직임은 바람에 방향과 맞지 않게 마구잡이였다. 인영이 8분 정도 거리에 도달하고 나서야 경비대원은 왜 망토가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면서 움직이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인영이 그토록 느릿하게 도시를 향해 다가오는지도 경비대원은 알 수 있었다.

        

       인영이 이동하는 속도를 늦추면서 까지 망토로 감싸고 있는 그것은 한 어린 소녀였다.

        

       –

        

       “괘, 괜찮으신 겁니까?”

        

       경비대원은 담요를 허리춤에 끼워 넣고 허겁지겁 인영들을 향해 달려갔다. 성벽 위를 내려오느라 숨이 찼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인영의 상태를 묻자, 인영은 곧바로 좌측의 카이트 실드로 소녀가 있는 부분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파르티잔을 움켜 쥐었다. 인영을 마주한 경비대원은 한 번 숨을 삼켜야 했다.

        

       경비대원은 한 번도 그렇게 생긴 남성을 본 적이 없었다.

        

       4큐빗은 훌쩍 넘길 것은 분명한 거체는 물론이고, 날카로운 눈매에 핏빛 눈동자. 귀는 엘프처럼 뾰족한데 그들처럼 삼각형 모양이 아닌 전체적으로 물방울 같은 모양이었다. 면도를 한 듯 깔끔했으나 시퍼런 수염자국은 구레나룻부터 코, 턱 까지 짙게 이어져 드워프 같았다. 피부는 인간처럼 부드러움이 흘렀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경비대원은 자신을 노려 보는 핏빛 눈동자에 고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자신은 북쪽 출신이었으며, 또 한 번도 르바다임 숲을 넘어간 적이 없었기에 마족을 본 적도 없었지만 중부 대륙의 남쪽에 사는 마족들은 북쪽의 마족들과 생김새가 다르다고 한 것을 한 길손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남성도 아마 그런 경우일 것이라고 경비대원은 짐작했다.

        

       또한 지금이 생사대전이 벌어지던 시기도 아닌데 생김새만으로 종족을 완전히 구분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경비대원은 그런 것보다 눈 앞에 있는 남성 자체가 더 중요했다. 남성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은 앞으로 한 번 내딛는 순간, 경비대원 또 한 번 숨을 삼켜야 했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비무장이오?”

        

       남성의 목소리는 경비대원이 들었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 굵고 낮았다.

        

       –

        

       제르피에드는 카이트 실드로 에실리아를 감싼 채 가만히 서 있는 트롤 여성을 노려보았다. 몇 분 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트롤 여성은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르피에드는 파르티잔의 날 방향을 하늘에서 그녀를 향해 약간 바꾸고는 다시 질문했다.

        

       “비무장이오?”

        

       꽁지머리를 한 트롤 여성은 그제야 몸을 한 번 움찔거리고는 반응을 보였다.

        

       “예…? 아, 예! 비무장…아, 아니! 무장! 무장입니다!”

        

       그 말이 나오자 마자 곧바로 파르티잔의 방향이 완전히 트롤 여성을 향해 바뀌었다. 그녀는 기겁을 함과 동시에 뭔가 질문을 건네는 쪽이 바뀌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시의 경비대원이었고, 경비대원이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전 질문은 확실히 경비대원인 그녀가 남자를 향해 말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흉흉하게 자신을 노리고 있는 파르티잔을 보며 감히 그녀는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경비대원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왜 무장이어야 하는 가를 항변했다.

        

       “저, 저는 디에르반 시 소속 경비대원 페이도 차라나입니다! 디에르반 시로 오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저는 도움을 드리려고 온 겁니다!”

        

       하지만 페이도의 필사적인 항변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잔은 거두어 지지 않았다. 그녀는 하필 자신이 이런 일에 처해 있을 때 용변을 보러 간 동료를 향해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용변을 보기 위해서는 성벽을 내려가 안 쪽으로 쭉 들어가야 했고, 거기에다 페이도의 주장에 따르면 그 빌어먹을 동료는 오래전 고아하게 숲과 어울리던 그의 조상과 달리 장이 상스러운 것인지 참으로 더럽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페이도는 숲과 어울렸다는 것이 사실 숲 속을 발가벗고 뛰어다니며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페이도는 결국 백기를 흔들 듯이 담요를 흔들어 댔다.

        

       “보세요! 저는 당신들에게 이 담요를 드리려고 온 거에요! 이런, 젠장! 여자도 있잖아요! 정말 도움을 주려고 온 거란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페이도는 경비대원인 자신이 길손에게 검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가 홀로 진지하게 펼치던 생각 속 동료의 조상처럼 되기 직전,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은 한 목소리였다.

        

       “페이도!”

        

       제르피에드와 페이도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한 엘프 남성이 헉헉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한 쪽 팔에는 아밍 소드가 들려 있었다. 페이도는 그 얼굴에 입맞춤을 날려주고 싶은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억…! 제기랄!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왜 혼자 내려와서 이러고 있어! 그, 그리고 당신은 당장 무기를 거두십시오! 저는 디에르반 시 소속 경비대원 지튼리프 마른모그입니다! 당신의 행동을 당장 멈추지 않으면 디에르반 시는 당신을 적으로 규정하겠습니다!”

        

       상당히 당당하고, 엄중하게 표하는 경고였으나, 지튼리프의 두 다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페이도는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을 우선 자신의 아밍 소드로 그의 상스러운 구멍을 막아준 뒤에 행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물론 그 고민은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경우에 유효한 것이었다. 지튼리프의 엄중한 경고에도 파르티잔의 날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떨림은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지튼리프의 하반신을 넘어 아밍 소드를 든 손까지 번졌다.

        

       페이도는 떨림에 전염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다리도 동료와 같이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상상 속 동료의 조상처럼 되기 일보 직전의 순간이었다.

        

       “……기사님, 저 분들이 디에르반의 경비대원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카이트 실드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에 걸맞게 부드러운 맵시의 눈매를 가진 소녀가 방패의 뒤에서 얼굴을 보였다.

        

       “내가 말할 때 까지 나오지 말라고 했잖소.”

       “하지만 기사님, 저 분들의 방패에 디에르반 시의 문장(紋章)이 있는 걸요?”

        

       에실리아의 말에 제르피에드는 그들의 파르마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갈색을 띄고 있는 파르마에는 흰 점들이 곳곳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흰 점들이 모여 이루고 있는 그것은 육각의 눈 결정이었다. 눈 결정을 본 그는 높은 성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는 눈 결정 비슷한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제르피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지자 두 경비대원은 아밍 소드를 붙잡은 손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갔다.

        

       “확실한 것이오?”

       “확실해요. 갈색 배경에 육각 눈 결정을 문장으로 사용하는 곳은 디에르반밖에 없어요. 책에서 봤어요.”

        

       제르피에드는 들고 있던 파르티잔의 날을 유장하게 하늘로 돌렸다. 그 순간에도 그는 시선을 둘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파르티잔을 등 뒤에 장비하고 나서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해해서 미안하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소.”

        

       두 경비대원은 마침내 난치병인 신체가 떨리는 그 이름 모를 질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

        

       “저…기사님이십니까?”

        

       제르피에드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 여성의 말이 단순히 기사라는 신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오랫동안 들어보지 않은 그 단어를 들을 때 마다 약간의 생경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에실리아처럼 자신이 호위로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페이도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면서 그에게 아밍소드를 휘두르지 않은 걸 일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로 여겼다.

        

       그는 진짜 기사였다. 설마 목과 몸이 분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알기를 원하는 자가 아닌 이상 기사를 사칭할 리는 없었고, 기사도에 따라 스스로가 기사임을 부인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기사에게 덤비면 목과 몸이 분리되는 이후의 일을 탐구하고 싶은 자는 자신이 될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튼리프는 제르피에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순간 질문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진짜 기사님이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 기사단 소속이십니까? 중부 대륙? 아니면 다른 대륙?”

        

       제르피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옆에 있는 에실리아를 향해 살며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본 지튼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자유기사이시군요?”

       “맞소.”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후치.”

        

       제르피에드는 다시 돌리려고 했던 시선을 틀어 재빠르게 에실리아를 향해 시선을 한 번 더 던졌다. 그의 레이디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은 정답이었다. 제르피에드는 그녀를 보던 것과 같은 속도로 지튼리프에게 시선을 복귀시킨 후, 레이디가 키가 작은 것이 이번에는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에실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장면은 카이트 실드에 가려 두 경비대원에게 보이지 않았다.

        

       “제후치?”

       “레이디 제미니를 모시고 있는 후치라고 하오.” 

        

       남자 경비대원이 더 의구심을 품기 전에 빠르게 자신에 대한 설명을 보강했다. 설명을 들은 지튼리프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르피에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후치 경! 다시 한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디에르반 시 소속 경비대원 지튼리프 마른모그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 페이도 차라나입니다!”

       “만나서 반갑소.” 

        

       페이도는 방금 전 자신들을 죽일 뻔한 상대를 두고 저렇게 활기차게 악수를 나눌 수 있는 그녀의 동료가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멍청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침내 그녀는 경비대원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나 뵙게 영광입니다, 레이디 제미니와 후치 경. 이미 소개 받으셨지만 저는 디에르반 시 소속 경비대원 페이도 차라나입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디에르반 시를 방문하셨습니까?”

       “입시(入市)를 하고 싶소.”

       “…역시 길을 잘못 드신 것이로군요. 출입문은 반대편인데 왜 이쪽으로 오시나 했습니다. 출입허가증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출입허가증?”

        

       그는 처음 듣는 정보에 눈을 약간 찌푸리고는 레이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성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호위기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에실리아는 그녀의 호위기사를 떨리는 눈빛으로 보다가 결국 카이트 실드 뒤에서 나와 페이도에게 질문했다.

        

       “저, 디에르반 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출입허가증이 필요한 건가요?”

       “어…도시와 무역 보호 조약을 맺고 있는 랏슈, 피체린, 엠플라 이 세 마을에서 출입허가증을 발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혹시 출입허가증이 없으십니까?”

        

       –

        

       중부 대륙의 모든 도시들 가운데서도 최북단에 위치하는 디에르반은 그 고유한 지리적 특성만큼이나 독특한 특색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디에르반이 여러 이명들을 가지는 데 일조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60 큐빗의 거대한 서쪽 성벽을 보면서 에실리아는 왜 디에르반이 ‘방패의 도시’ 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서쪽 성벽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지도. 서쪽 방벽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디에르반임을 증명하는 데 다른 게 왜 필요하겠는가.

        

       물론, 비단 서쪽 뿐만은 아니었다. 마치 요새를 하나의 도시로 만들어 놓은 듯, 원형의 성벽이 도시를 빙 둘러 싸고 있었다.

        

       비록 서쪽의 장대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북쪽 성벽의 크기도 40 큐빗이라는 위용을 과시했고, 남쪽과 동쪽의 성벽도 각각 30 큐빗에 달하는 상당한 길이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 오히려 허리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성벽을 구경하던 에실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지튼리프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말 서쪽을 통과해서 오신 겁니까?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서쪽을 통과해서 올 수 있습니까?!”

       “그만 좀 해라, 이 멍청아! 이미 그렇다고 말씀하셨잖아!”

         

        페이도는 신경을 살짝 내며 엘프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트롤족의 평균적인 특성상, 엘프보다 신장이 큰 그녀에게 그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믿기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리핀이나 오거Ogre 같은 것들이 우글거릴 텐데 어떻게 통과를 해?!”

         

        페이도도 말은 그렇게 했으나 확실하게 믿기는 힘들었다. 그녀의 동료 말처럼 서쪽은 그리핀이나 오거처럼 위험한 생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으니까. 닫힌 성문이 ‘닫힌 성문’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툭하면 그런 것들이 출몰하는 서쪽은 아예 문을 막아 두고 높은 성벽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도시들 보다 먼저 그런  생물들을 마주해 막아내는 디에르반은 과연 방패의 도시라고 불릴 만 했다.

         

        “그리핀이라면 일전에 마주한 적이 있소. 그 생물을 잡아 먹…”

        “…잡아 먹힐 뻔 했죠!”

         

        에실리아는 작은 몸을 힘껏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샤르콧 마을 이후 가장 기겁할 만한 순간을 적절하게 넘긴 그녀는 방금 벌어질 뻔한 상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먹은 그리핀의 모습을 열심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무시무시한 생물이 날개를 펼치고 기사님에게 달려들었어요. 단검과 같은 발톱을 잔뜩 세운 채 찢어 발기려고 했어요! 발톱과 방패가 충돌하는 데 저는 무려 천둥이 치는 줄 알았……!”

         

        다행히 떨리는 목소리는 그녀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모험기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장서관에서 탐독하던 경험은 성녀를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만들어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페이도는 길을 걸으면서도 앞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 이제는 에실리아의 완전한 청중이 되어버린 동료의 한심스러운 태도를 직접 교정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돌뿌리에 막 발이 채일 뻔한 지튼리프를 있는 힘껏 잡아챘다.

        

       “이 멍청아! 그렇게 모험담을 하고 싶으면 그냥 너가 기사가 되지 뭐 하러 나랑 같이 경비대원이나 하고 있는데-?!”

        

       늘씬한 몸매의 그녀였지만, 엘프를 뛰어넘는 장신과 경비대라는 그녀의 소속상 그 늘씬함의 원천은 대부분 근육이었다. 그리고 그런 트롤의 근육에 잡혀버린 불쌍한 엘프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열심히 그녀의 팔을 치면서 항복 의사를 보내는 행동 뿐이었다.

        

       “케헥…! 켁…! 내가 무기의 맹세를 할 실력이 됐으면 진작에 했지…!”

        

       트롤과 엘프의 그런 모습을 본 에실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좋기는 뭐가 좋습니까? 얘 랑 어울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저라도 이렇게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 뿐입니다.”

       “…하기야 페이도가 말은 이렇게 해도 속에는 친절함이 그득그득한 게 기사 될 실력이 안되어서 경비대원 지원한 이 못난 소꿉친구 놈 걱정된다고 자기도 경비대원 지원한 거 보면…케헥…!! 아아, 항복! 항복!!”

       “내가 언제 너를 걱정했어! 덜 떨어진 니 녀석이 경비대에 합격하기라도 하면 경비대 역사상 최악의 일이니까, 나라도 그걸 막아야한다고 생각한 것 뿐이지!”

        

       열심히 얼굴을 붉히며 반박하는 페이도를 보며 에실리아는 다시 소리 죽여 웃어야 했다. 그 웃음이 만연한 분위기를 깬 것은 제르피에드의 낮은 목소리였다.

        

       “저건….”

        

       세 사람이 모두 말이 들려온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들것에 실려 경비대원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덮어진 하얀 천의 곳곳이 붉었다. 지튼리프가 그 답지 않는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긴 연두빛 머리카락이 힘 없이 늘어졌다.

        

       “……순찰하던 도중 또 한 사람이 당했나 보군요. 흔히 있는 일이죠. 서쪽이 위험한 것들이 제일 우글거리지만, 르바다임 숲도 충분히 위험하고 다른 곳에서도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르피에드는 그제야 왜 자신이 무장을 하고 있음에도, 출입허가증이 하나도 없는 신원이 불투명한 상태임에도 이들이 이리 호의적인지 깨달았다. 걸핏하면 위험 생물들에 죽어 나가는 이곳에서 실력 있는 무력자들은 귀한 영입 대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들여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그는 알 수 있었다.

        

       성벽 밑에 난 이 길은 조금 큰 덩치의 두 사람이 나란히 서고 나면 꽉 찰 듯 했다. 당연히 성벽 밑에 있으니 만큼 경비대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목이었고, 이를 증명하듯 대부분 마주치는 자들은 경비대원들이었다. 모두 2인 1조의 형태로 다녔으며, 무기를 패용하고 있었다.

        

       꽤나 예의 넘치는 협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말썽을 일으킨다면 곧바로 그들이 제압할 것임을 대놓고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르피에드는 경비대원을 모두 죽여 이목을 끌어 성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잠자코 그들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그들이 호의적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여러 번 꼬인 길목을 지나 한 돌벽 모퉁이를 돌았다. 거대한 광장 하나가 성녀와 데스나이트의 눈 앞에 펼쳐졌다. 커다란 조각상을 중심으로 세워진 단출하지만 넓고 웅대한 광장. 바글거리며 각자의 이야기와 생활을 나누는 수많은 사람들. 수도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보는 대도시의 풍경에 성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페이도는 성녀를 향해 뾰족한 덧니를 드러내 보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말하는 게 좀 늦긴 했습니다만…디에르반 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두 분이서는 아직 출입허가증을 발급받으시지 못하셨기에 몇몇 상점이나 식당은 이용되는 게 제한될 겁니다…그리고 애석하게도 발급받을 때 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기사단이 오늘 복귀해서 며칠 간 축제가 벌어질 예정이거든요.”

       “기사단이요…? 설마….”

       “예, 제미니 양이 알고 계시는 그 기사단 맞을 겁니다. 아, 마침 오는군요.”

        

       페이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조각상 반대편에 나 있는 대로의 중앙에서 때묻지 않는 순백색의 털을 지닌 백마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성녀는 볼 수 있었다. 그 백마 위에 탄 번쩍거리는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를. 그리고 떠올릴 수 있었다.

        

       

       책에서 본 디에르반의 가장 유명한 이명인 ‘기사의 도시’ 를, 그 이명을 가지게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중부 대륙의 그 유명한 다섯 기사단 가운데 에서도 유일하게 한 도시를 통치하고 있는 기사단인 만설(萬雪) 기사단을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 화의 시작 부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인 이영도 작가님의 시작 부분의 오마주입니다.
    만약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재미있으며 여러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굉장히 유익한 책이니까요.

    참고로 는 마시는 새 시리즈 중 하나이며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물을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순으로 이어집니다.
    각 시리즈 모두 흡잡을 때 없는 완성도를 자랑하며, 특색이 모두 뛰어나답니다. 시리즈 모두가 완결이 되었으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한 번 천천히 읽어보세요.
    이는 제 프로필 이미지로도 증명이 가능한 사실입니다.

    병원에 가 약을 받고 따뜻한 수프를 먹은 뒤 푹 자고 났더니 좀 나아지네요. 걱정 어린 말씀 해주신 독자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병원 가는데 날씨가 무척 춥더라고요. 후드티 안 입었으면 큰일 날뻔 했습니다. 독자분들은 따뜻하게 옷 잘 입으시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다음화 보기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데스나이트는 성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Score 3.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trayed by her own Order*, the Saint begged the death knight to become her guard—the death knight who could destroy the world. *tl note: she was betrayed by the church, not her own doing. Author Notes: Contains Authentic fantasy, and wholesome love. I hope this brings you the reader a little bit of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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