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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

         

         

         결국 이반이 먼저 손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어쨌건, 인질로 잡혀 있는 프리실라의 목숨을 구하고 봐야 했으니까. (물론 프리실라의 목숨 뿐만이 아니다. 이반은 엔리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제자를 키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호오?”

         

         

         엔리케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반은 순간 도끼자루를 강하게 쥐었다가 애써 힘을 풀었다.

         

         저건 저 괴물이 기분 나쁠 때 짓는 표정이니까.

         

         

         “계속 말해봐.”

         “이번에 얀스크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흐으음… 그래서?”

         “’누군가’는 걱정을 하더군.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국가에 큰 손실이 될 테니까.”

         

         

         이반의 말뜻은 다음과 같았다.

       

         

        -엘리자베타가 네 제자 걱정을 하더라. 그래서 나 더러 지키라던데.

        -그게 내가 요새 하는 일이고, 뭐. 알지? 엘리자베타 성격.

        -근데 이거 못 알아들으면… 너 알렉산드르 편에 붙었다고 생각할거야?

         

         

         반면 이반의 말은 엔리케에게 다음과 같이 들렸다.

         

         

        -네 제자의 정체와 위치, 신상명세를 이미 파악했다.

        -비싼 돈을 받았지.

        -어디서 다치기라도 하면… 슬플 테니까, 처신 잘 하라고.

         

         

         감히.

         

         감히 하늘 같은 대스승의 등에 칼을 꼽아?

         누구 의뢰를 받았다는 거지? 알렉산드르? 그 개자식이 결국 날 제끼려 드는 건가?

         

         아니, 이 놈도 그래.

         만약 내가 이 놈을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으면, 난 거절했거나 미리 알려는 줬을 거라고!

         근데 대뜸 찾아와서 위협하더니, 제자를 가지고 협박을 해?

         

         그러고도 이게 ‘제자’…? 난 대체 무슨 괴물을 키운 거지?

         

         그나마 지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자놈이 이런 놈들 뿐이라면, 나는 대체….

         

         

         엔리케는 만면에 미소를 띈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그래. 별 일 아니지.”

         “흐으음… 별 일… 아니라고?”

         “음.”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서 단답이 오고 간다.

         그러나 이반은 다소 마음을 놓았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보이긴 해도, 어쨌건 지금 돌아가는 상황 이해는 충분히 한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다면야 뭐어… 이제 문제는 해결이다.

         

         이 정도로 경고해줬다면, ‘튜토리얼’이 진행되어도 엔리케의 제자가 큰 위협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엔리케가 직접 지켜낼 테니까.

         

         

         ‘운이 좋군.’

         

         

         프리실라가 납치된 바람에 얼떨결에 만났지만, 예상 이상으로 수월하게 소득을 올렸다.

         

         ‘주인공’들의 튜토리얼이 이제 그럼 세 녀석 남았고, 가장 시일이 빠른 녀석도 2주는 더 남았으니까….

         

         

         “루시아!! 루시아! 들어와!!”

         “네에- 스승님!”

         

         

         밝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윤기나는 밤색 머리칼을 찰랑이는, 1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엔리케는 어쩐지 시험하는 듯한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며 웃었다.

         

         

         “자, 인사해. 네 사형이시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페트로비치 경! 스승님께서 항상 페트로비치 경의 반만 따라가라 하셨었거든요!”

         

         

         아냐, 칭찬하지 마. 이 자식 배은망덕해.

         

         엔리케는 이를 악다물며 애써 웃었다.

        

         

         “인간…이군?”

         “네? 네. 당연하죠…?”

         “당연…? 네 스승의 종족을 알고 있나?”

         “스승님은 사람이십니다!”

         

         

         루시아는 당찬 표정으로 가슴을 펴며 말했다.

         

         

         “스승님께선 조금 독특한 식생활로 살아가야 하시지만, 저를 아껴주시고 이 나라를 지켜주시는 참된 영웅이셔요! 종족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는 ‘사람다움’이라 대답 드리겠습니다, 페트로비치 경!”

         “오….”

         

         

         이반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마족과의 전쟁 이후로 연합 왕국은 ‘이종족’과 ‘아인족’에게 극도로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당장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의 대부분이 제 직계 친지를 마족에 의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나라다. (엘프는 논외로 한다. 그 귀 큰 종족은 연합왕국 소속인데도 혐오스러운 인성 때문에 배척 받고 있다.)

         

         그런 와중에 ‘종족’을 구분하는 조건이 종 자체에 있지 않다는 저 열린 마인드는, 이 지긋지긋한 이세계가 아닌 21세기 지구에서나 볼 법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참신한 대답(이세계 기준으론 대단히 ‘급진적인’)을 들은 엔리케의 표정이 헤실헤실 풀려 있었다.

         

         

         “자아, 봐. 내 모든 것을 가르쳤지. 습득까진 좀 걸리겠지만 익히는 것은 끝났다 이 말이야. 다음 대에도 용사 파티가 있다면, 이 녀석이 적임일 거야.”

         

         

         확실히 그렇겠지. 태양 아래에서도 활보할 수 있으니 용사 파티에 오히려 더욱 잘 어울릴 터.

         

         거기에다 저 말. ‘모든 것을 가르쳤으나 습득까진 시간이 걸린다.’는 말 또한 이반에게 어떤 확신을 주고 있었다.

         

         

         ‘스킬트리를 말하는 건가.’

         

         

         일반적인 게임에서 캐릭터가 성장할 때, 레벨업과 함께 스킬을 자동적으로 습득하곤 한다.

         

         명백히 이상한 일이다. 모험을 하든 뭘 하든 갑자기 머릿속에서 팍 하고 떠올랐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이 게임은 저런 식인 모양이었다.

         

         ‘이미 익혔으나, 경험과 숙달이 부족하다.’라는 말. 더 없이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러운 제자지. 나보다, 아니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말년에 얻은 소중한 녀석이야. 그러니까…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이반.”

         “음…?”

         

         

         갑자기?

         

         이반은 움찔 떨며 다시 도끼자루에 손을 얹었다.

         

         엔리케 하나도 부담스러운데 제자를 포함해 2대1로, 거기에다 포로까지 잡힌 상태에서 엔리케의 던전 내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지난한 일이다. 이반은 그녀의 손을 주의깊게 바라보며 침음했다.

         

         

          “우리의 추억을 담보로 삼아서 부탁할게. 이쪽 세계에서 손을 털어. 여긴 내 영지야.”

         

         

         엔리케는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도시에서 암살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자신 하나면 족하다는 뜻이다.

         

         도시의 뒷거리에서 핏값으로 돈을 벌지 마라. 그러려고 은퇴한 건 아니지 않느냐.

         알렉산드르는 믿을 수 없는 놈이다. 차라리 정치에 손을 담그려면 엘리자베타의 선을 잡아라.

         

         그런 뜻을 담아서, 아주 간절하게.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됐나.”

         

         

         이반은 도끼자루를 꾸욱 쥐며 일어섰다.

         엔리케, 결국 알렉산드르의 편에 섰나.

         용사 파티 맴버를 상대하는 것은 명백히 초과근무였지만,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산드르가 무엇을 대가로 제공했지? 사람? 피? 영지?”

         “…뭣?”

         “아직 크라실로프 왕가와 손을 잡고 있다면, 나 또한 우리의 추억을 담보로 묻지. 귀관의 충성은 어디로 향하나.”

         “엑…?”

         

         

         이반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엔리케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 알렉산드르랑 손 잡은 거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린가. 난 그 자와 웃는 낯으로 만난 적이 없어.”

         “나도 그런데.”

         “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음… 고아들을 모아다가 막 암살 기술을 가르쳤다거나?”

         “우리 고아원의 원내 커리큘럼은 정규 교육과정을 준수한다.”

         “그럼 걘 뭔데. 매복술을 제대로 익혔던데!”

         “그건 원생들의 노력이다. 졸업 후에 취직할 곳을 알아본다고 다방면으로 열심히 훈련하더군.”

         “네가 가르친 건 아니고?”

         “아니다.”

         

         

         다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그냥 살금살금 잘 걸어다니던 열댓살 고아 꼬마였다고?

         

         그걸 그냥, 납치해와서 이 녀석을 불러냈고… 협박을 했고…?

         

         아니 잠깐만.

         

         

         “그럼 내 제자는 무슨 소리야. 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네 입에서?”

         “엘리자베타가 부탁하더군. 이번 신입생 중에 ‘용사파티’ 자녀들이 대거 입학하니 암중에서 호위하라고. 들은 바가 없나?”

         “없어! 그 꼬맹이가 진짜! 그걸 왜 너한테 부탁해!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누굴 퇴물 취급 하고 있어!”

         

         

         엔리케는 버럭 소리치더니 이내 소파 위에 축 늘어졌다.

         

         

         “진 빠진다 진짜로. 너랑 얘기하면 항상 이래. 왜 신은 이렇게 공평하실까? 너한테 말주변이란 걸 좀 줬으면 좋았을텐데. 딱 그것만 부족하잖아.”

         “그렇지 않다.”

         

         

         어디서 전근대 노괴가 지금 21세기 논술교육 이수자에게 이런 망발을?

         내면의 김선우가 버럭 소리치며 올라왔다가, 이반에게 진압되어 다시 침잠했다.

         

         

         “얘, 봤지? 네 사형이 이래. 사람이 말을 반토막 내서 내뱉으니까 대화가 맞물리지가 않아요. 참.”

         “어… 음.”

         

         

         루시아는 갑작스레 과잉되다가 이내 훅 꺼져버린 응접실의 분위기에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

         “뭔 소리야 너는!”

         

         

         아하하, 하고 웃으며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빠져나갔다.

         

         잠시간의 고요가 흐르고, 엔리케는 홍차를 들며 말했다.

         

         

         “차, 다시 가져다 줄까?”

         “괜찮다.”

         

         

         다 식었지만 여전히 맛이 좋았다. 애초에 이반은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채워 먹던 나라 출신이었으므로, 커피의 온도엔 신경 쓰지 않았다.

         

         성 얀스크 대학 입학 예정자 학부모 면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원장쌔애애앰!!”

        

        

        문이 열리기 무섭게 프리실라가 뛰어나와 푹 안겼다.

        

        이반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떼어냈다.

        

        

        “앞으로는 인적 드문 곳에선 일을 구하지 마라.”

        “네, 네! 진짜, 진짜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아. 걱정 말고.”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프리실라의 뺨을 닦아준 뒤에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 엔리케의 던전을 떠나 지하수로를 지나가 다시 지상으로.

        

        뒷골목을 빠져나가 다시 대로를 향해 쭉.

        

        한참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이어지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저, 쌤.”

        “음.”

        “혹시, 진짜 혹시 말이에요.”

        

        

        프리실라는 마력광이 반짝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치맛단을 꾹 쥐고 말했다.

        

        

        “어디… 떠날 준비 하세요…?”

        “아마도.”

        

        

        준비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얀스크 대학의 새 학기가 시작된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고아원을 떠나 있어야 했다.

        

        새 신분을 갖고 ‘정원사’로서, 용사 파티의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약 3년. 그에게 있어선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원생들에겐 그렇지 않다.

        

        평생 전쟁 고아로 살아왔을 이들에겐, 이제 가까스로 찾아낸 이 보금자리를 놓칠 수 없으니까.

        

        겨우 만들어낸 가족이다. 겨우 얻어낸 잠자리이며, 간신히 쟁취한 ‘우리 집’이다.

        

        언제나 버림받기만 했던 원생들 입장에서, 고작 2년에 불과했지만. 이 고아원은 더 이상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지막 보루였다.

        

        프리실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가지, 흑.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쌤이, 흐윽. 쌤이 사라지면 저희는 또. 흐윽….”

        “으음….”

        

        

        이반은 코트를 벗어 프리실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어린 아이를 달래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어린 ‘여자’ 아이를 달래본 기억조차 없었다!

        

        그건 오래된 김선우의 기억을 뒤적여도 마찬가지였다. 김선우는 하루종일 웹툰과 웹소설을 보며 5,700자의 악플을 매일매일 써올리던 괴인이었으니까.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군 복무에 헌신한 이반은, 누군가에게 도끼나 총알 말고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 법을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걱정 마라. 자주 찾아올 테니.”

        “어디… 어디 가시는 데요…?”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내 ‘자식’이나 다름 없고, 대수로운 정보도 아니니까.

        

        이반은 프리실라의 눈물에 쩔쩔매며 대답했다.

        

        

        “성 얀스크 대학.”

        “꼭 다시 돌아오셔야 해요…?”

        “당장 떠날 것도 아니고, 평생 떠날 것도 아니다.”

        

        

        고아원에 들인 노력과 애착이 얼만데.

        고아원은 그에게 집이나 다름 없었다. 원장실은 그의 마음 속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는 굳은 다짐을 하고, 훌쩍이는 프리실라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준 뒤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성 얀스크 대학. 입학 시험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내년 입학 시험이 오는 11월이니까….’

        

        

        바실리샤 고아원 원생 전원.

        얀스크 대학 입학을 위해 수험 생활에 돌입!

        

        

       

       

       

       ep4. 이 고아들에겐 원장님이 필요해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캬 맘같아선 더 올리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공모전 일일 제한이 2화네요!
    아하핳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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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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