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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생각보다 한산하군.’

       

       5월의 북부령은 잠시나마 눈이 녹는 시간이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비포장된 흙길에 물이 배이면 질퍽해지기 마련이다.

       대공성을 나선지 30분 만에 구두가 진흙범벅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래도 드넓은 윈터펠 대공령 전체에 포장도로를 깔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공성 내부와 특정 거리에만 깔려있는 건 자원적 한계나 기술적 한계 때문이겠지.

       어쨌든, 진흙길에 푹푹 빠지는 걸음임에도 가벼웠다.

       

       ‘역시 낭만 가득하다.’

       

       중세시대에 빙의당하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사실 별 것 아니었다.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고, 거리의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었으며, 거리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다.

       경직적인 귀족의 삶보다 낭만 가득한 용병의 삶을 동경했던 내겐, 고급진 식탁보에 차려진 근사한 식사보다 허름한 원목 식탁에 차려진 투박한 요리가 기대됐다.

       시종들을 매달고 대궐 같은 저택의 대리석 바닥을 걷는 것보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울창한 숲속길을 걷고 싶었다.

       

       물론 이곳이 역사적 고증이 완벽한, 모험과 낭만 대신 살육과 미개의 지독함이 판치는 중세시대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이 세계는 중세 ‘판타지’물이다.

       현대적 편의와 입맛이 가미된 판타지 세계는 현대인들이 바랄 낭만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야생의 숨결도 어느 정도 남아있겠지만.’

       

       판타지 장르라고 해서 낭만만 가득하면 그건 더 이상 낭만이 아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밝듯, 낭만을 위해선 야생의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중세시대의 이면.

       전쟁과 사냥.

       북부령에도 괴인족, 괴수와의 전쟁 흔적이 남아있었고, 미개의 상징인 마녀 사냥의 흔적 또한 더러보였다.

       

       그럼에도 질색이 드는 것보다 낭만이 느껴지는 건, 내가 살던 21세기 현대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중세엔 그것이 가감없이 드러나 보이는 것뿐이고, 현대는 그것이 가감되어 숨겨져 보일 뿐.

       이념 갈등으로 인한, 군수 이득을 위한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커뮤니티가 득세하며 거짓된 정보로 인한 선동과 날조, 그에 따른 마녀 사냥 또한 여전했다.

       증오와 갈등이 환경에 맞추어 형태만 바뀌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거부감이 들지도, 딱히 역한 심정이 들지도 않았다.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은 법.’

       

       눈이 녹아 이룬 웅덩이에 첨벙거리며 까르륵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허허 웃는 어른들.

       골목 구석에서 작당모의하는 양아치들.

       진흙구덩이에 마차 바퀴가 빠져 쩔쩔매고 있는 상인와 그런 그를 돕기 위해 수레를 미는 이들과 수레에서 떨어진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는 이들까지.

       

       거리는 기대했던 대로 활력과 생동감이 넘쳤고,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만큼 자유와 모험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역시 멋진 곳이야.”

       

       뒤따르는 레이첼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린 채, 그리 감상을 내뱉어버렸다.

       그리고 그 혼잣말에 답이 들려왔다.

       

       “북부령은 처음이십니까?”

       

       호위기사답게 침묵을 유지하던, 엘든이란 광폭자의 등장에 그 즉시 침묵하던 이들과 달리, 레이첼이 편히 말을 붙여왔다.

       엘든을 무서워하지 않기에 해냈을 물음.

       기꺼이 응해주었다.

       

       “응. 넌?”

       “저는 수련을 위해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어땠나?”

       “많이 안 좋았었습니다. 괴인족과 전쟁 중이었으니까요. 시체가 즐비했고, 비명이 난무했었죠.”

       

       뒤를 슬쩍 돌아보니, 레이첼도 감회가 색다른 눈빛으로 도시의 전경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와는 다른 감회이지만, 결이 엇비슷한 감상을 공유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금은 어때?”

       “보기 좋습니다. 수련을 위함도 있지만, 전장에 뛰어들었던 건 북부령을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렇군. 뿌듯하겠어.”

       “과찬이십니다. 일개 병사 노릇을 했을 뿐, 지금의 평화에 일조하진 않았습니다.”

       “티끌 같은 도움이 모여 태산을 이룬다고 하지. 뿌듯해해도 충분해.”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기대했던 낭만을 만끽하고 있다.

       다만 거리를 걷는 것만으론 낭만의 고점이 낮았다.

       이대로 끝내기엔 역시 아쉽다.

       중세 판타지의 낭만을 꿈꿨던 이라면 응당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일.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는 충분할 터다.

       

       “레이첼, 그럼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그 일에 레이첼의 북부령 체류 경험은 제격이었다.

       

       “안내, 말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이곳에 오래 체류를 했을 것 같고, 이대로 복귀하기엔 너도 아쉬울 것 같은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응?

       

       목적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는데, 레이첼이 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자신 있는, 호쾌한 걸음으로 말이다.

       

       “어딜 가는 거지? 난 목적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만.”

       

       우뚝, 걸음을 멈춰선 레이첼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쳐다본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목적지가 나왔을 때, 난 후드 속 이마를 짚어야 했다.

       

       

       “사창가는 서쪽 18번 거리로 가야 합니다.”

       

       

       ………흐음.

       

       엘든 라펠리온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네.’

       

       

       

       **

       

       

       

       [게빈나 식당]

       

       목적지에 대해 정정해준 난, 레이첼과 함께 어느 식당에 도착했다.

       이세계 빙의 후 처음으로 방문하는 식당이었는데, 내가 원하는 낭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은은히 퍼지는 군내, 잔을 부딪히는 소리, 호탕하며 전투적인 웃음들, 그리고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트 게임과 팔씨름 대전까지.

       

       낭만이 총 집약된 곳이었고, 우린 그곳의 변두리에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자리가 없는 걸 어떡하겠나? 마주보고 먹기 힘들다면, 이리 옆자리로 오던지.”

       “여기 있겠습니다.”

       

       자리 배정에 따른 논쟁이 짧게 끝났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레이첼을 끌고 들어왔다.

       그녀가 추천해준 곳인데 어찌 혼자 먹겠는가.

       또한 호위도 배가 든든해야 잘 해내는 법 아니겠는가.

       문제는 자리가 하나뿐이었고, 해결을 위해 레이첼이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주문해둔 요리가 나왔다.

       레이첼이 추천해준 ‘붉은 롱거의 꼬리찜’이었다.

       

       “크.”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게다가 붉은 롱거의 꼬리찜은 낭만 뽕이 찰 수밖에 없는, 중세 판타지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몬스터를 식재료로 한 요리였다.

       돼지 계열의 붉은 롱거란 몬스터로 말이다.

       또한, 몬스터의 고기는 평민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천한 식재료였다.

       몬스터의 기괴한 모습이 거부감을 일으켰으니까.

       그래서 더욱 낭만뽕이 차오르는 식재료이기도 했고.

       역시, 귀족가의 셰프가 차려준 고급진 요리도 좋지만 중세 판타지물에선 자고로 이런 요리를 먹어 주어야 하는 법이다.

       당장이고 스푼을 들어 꼬리찜을 퍼먹으려 했는데, 레이첼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야 했다.

       

       “…?”

       “부디 명을 거둬주십시오. 누군가 본다면 크게 공자님의 흉을 볼 것입니다.”

       

       …엘든 라펠리온의 평판에 [흉] 같은 건 티도 안 날 얼룩일 텐데.

       둘러쓰고 있는 후드를 스푼으로 톡톡 두드렸다.

       

       “백작가 공자와 호위기사의 겸상은 너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모를 일이야.”

       “그렇지만….”

       “먹어.”

       “예.”

       

       낭만이 입으로 들어오기 직전이다.

       그리 싸늘히 일갈한 후, 허겁지겁 낭만을 퍼먹기 시작했다.

       

       “음, 정말 맛있군.”

       “소스에 찍어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그래?”

       

       냉큼 꼬릿살 하나를 손으로 집어들어 소스에 찍었다.

       쫀득한 육질과 짧쪼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살짝 시큼한 듯 하면서도 레몬의 산뜻한 풍미가 풍기는 소스를 만나며 그야말로 천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맛있다.

       진짜 맛있다.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가 침샘을 공격해 아밀라아제가 무차별적으로 분비되는 그런 맛.

       미간이 대문자 W로 이그러지고 고개가 흔들머리 인형처럼 계속 끄덕여지는 맛.

       식도락 여행을 당장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그런 맛.

       

       특히나 꼬리에서 발라낸 살점과 자박하게 깔린 국물이 전부인, 그리고 각종 야채 하나 없이 밋밋한 색이 전부인 소스로 이런 맛을 표현할 수 있다니, 귀족가 셰프로 가야 할 인재가 이곳에 있는 모양이다.

       주방을 향해 찬사를 보낸 후, 그릇째 들이켜 식사를 갈무리했다.

       첫 식사가 만점짜리 합격이니 두 번째 식사가 기대되었지만, 애석하게도 저녁에는 대공성 외부로 외출이 불가하고, 내일 점심은 최종 평가전 시작을 알리는 회동이 있다.

       당분간은 이곳에 다시 들리기 힘들 터였다.

       

       턱.

       

       국물까지 싹싹 비운 그릇을 놓았다.

       

       “이거 정말 별미로군.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겠어.”

       “몬스터 요리는 평소 멀리하셨기에 걱정했습니다만, 다행입니다.”

       “이리 훌륭한 맛을 멀리했다니, 개탄스러울 일이야.”

        

       옆에 준비된 물그릇에 손을 가볍게 씻었다.

       더할 점수가 없는 만점짜리 식사였다.

       저녁에 다시 들러 다른 몬스터 요리를 먹어보고 싶을 만큼.

       지역마다 서식하는 몬스터가 다르고 그것으로 만들어낸 요리는 어떠할까, 라는 절대적 기대감이 들 만큼.

       특히나 중세 판타지물은 지역별로 특색이 굉장히 뚜렷하다.

       식도락 여행 계획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되겠어.’

       

       역시.

       

       낭만 가득한 중세 판타지물에 빙의해 무료한 저택에 틀어박혀 사는 건 범죄에 가까운 일이며, 귀족가 도련님, 영애님들과 치열한 눈치싸움이나 하며 지내는 건 도리에 한참 어긋난 일이다.

       머릿속에 그려진 식도락 여행 계획.

       그 계획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레이첼을 빤히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너, 내일부터 할 일이 있다.”

       “어떤 일입니까?”

       

       전국을 돌며 낭만 가득한 식도락 여행을 하려면 무지성 전투광이 아닌, 다재다능한 전투가가 될 필요가 있을 터.

       특히나 호위기사 레이첼은 검에 마법을 담을 줄 아는, 낭만 가득한 마검사 기질을 타고 난 이였다.

       

       “내 스승이 되어라.”

       “…예?”

       

       레이첼이라면, 자격은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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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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