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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왜 그러세요, 디안 님? 신성사제가 필요하신 것이 아니었나요?”

       

       내가 마야라는 꼬맹이 사제를 잡자 로르마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맞는데 주교 서른 명은 너무 과해. 그냥 신성력에 능통한 평사제 몇 명이면 충분하다.”

       “아, 그러신가요? 그렇다면….”

       

       로르마네의 눈에 어리는 결연한 빛을 본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총사무장을 받느니 차라리 주교 한 개 소대를 받겠다. 그러지 말고 괜찮은 사제로 한 명만 추천해 줘.”

       “한 명 가지고 되겠어요?”

       “충분하고도 남아.”

       

       어차피 신성력을 쓸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부상은 모두 치료 가능. 그러니 주교씩이나 되는 고참 늙은이들은 필요없고 열정 가진 젊은 평사제 한둘이 딱 적당하다.

       

       “그래요. 그렇다면 마야를 데려 가세요.”

       “마야라면 설마 저 꼬마, 아니, 사제님을 말하는 거냐?”

       

       내 손에서 벗어나 로르마네의 옆에 가 서있는 마야를 쳐다봤다. 올리시아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저건 평사제가 아니라 수습사제 아니야?

       

       “의아하시겠지만 마야라면 괜찮아요. 이 아이는 신탁사제예요.”

       “엥? 정말로?”

       

       신탁사제는 신이 직접 점지해 성직자의 운명을 내린 사제, 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사실인지 잘 모르겠고 다만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성력을 갖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로르마네도 신탁사제로 로르마네의 경우는 태어나면서 자기 어머니의 찢어진 부위를 본능적으로 신성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신탁사제라는 특성 때문에 성년이 될 때까지 제가 옆에 두고 가르치고 있답니다. 그러니 믿고 데려가셔도 돼요.”

       

       그렇단 말이지. 만약 저 꼬맹이 한 명만 우리 아카데미에 있어 준다면 큰 걱정 없이 애들을 굴릴 수 있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만 괜찮겠냐? 신탁사제는 교단의 중요한 자산인데 이렇게 쉽게 아카데미로 보내도 되는 거야?”

       “문제 없어요, 디안 님. 저는 총사무장이잖아요. 성하와 독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제가 알아서 잘 말씀드릴게요.”

       “그래? 좋아. 그러면 그 마야 사제님의 의향은?”

       “총사무장님께서 그리 하라시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러자 밀랍인형처럼 서있던 사제 마야가 조곤조곤 대답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차분한 성격인가 보다. 올리시아랑은 완전 딴판이네.

       

       “마야. 짐을 챙겨. 지금 바로 아카데미로 가야 하니.”

       “알겠습니다, 총사무장님.”

       

       마야가 총총 걸어서 문을 나서자 로르마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쟤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거야?”

       “우리 사제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하며 어지간한 살림은 혼자서 다 할 줄 아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지만 정 우려가 되신다면 디안 님이 머무시는 곳에서 같이 지내게 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해요.”

       “그런가. 하긴 뭐, 이 층 짜리 주택에 쟤랑 비슷한 나이 또래 하녀도 있으니 큰 문제될 건 없겠지. 그런데 쟤 파견비는 어떤 방식으로 지불을….”

       “안 주셔도 돼요. 봉사활동으로 보내면 된답니다.”

       “에엥? 정말로 그래도 돼?”

       “당연하죠. 디안 님께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저 로르마네는 너무 기쁘답니다.”

       

       그러며 로르마네는 다시 한번 내 손을 붙잡았다.

       

       “가까이 오셨으니 우리 자주 봐요. 10년 동안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쌓인 것도 많고 디안 님께서 풀어주셔야 할 것도 많고 하니까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물론 당연히 내가 의심하는 그런 건 아니고 나에 대한 그리움 뭐 그런 것들이겠지만 고위사제의 입에서 나올 비유적 표현은 아닌 듯하다.

       

       몇 번이나 내 손을 잡고 또 포옹하기를 거듭한 끝에서야 로르마네는 나를 풀어 주었다.

       

       어느새 커다란 가방을 챙겨 온 마야 사제는 로르마네의 그런 거듭되는 스킨쉽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디안 님!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오늘 고마웠다, 르네. 자주 보자.”

       

       드디어 로르마네에게서 벗어난 나는 마야 사제와 함께 교단본부를 나설 수 있었다.

       

       “가방 들어드릴까요, 마야 사제님?”

       “제가 들겠습니다.”

       

       손을 내밀었지만 마야 사제는 단칼에 거절하며 양손으로 든 가방을 자기쪽으로 끌어 당겼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가.

       

       

       # # # # #

       

       

       내가 교단본부에서 신성사제를 받아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투학과 교수들이 앞다투어 의무소로 찾아왔다.

       

       “정말입니까, 수석교수님?! 신성사제를 파견 받았다는 게?!”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 콧대 높은 교단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내일 즈음 마왕이 부활해 대륙이 멸망하려나.”

       

       이 건에 대한 전투학과 교수들의 반응이 너무도 격렬하다.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일이었나.

       

       “다들 인사해라. 이분이 앞으로 우리 전투학과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실 마야 사제님이시다.”

       

       어쨌든 다들 의도치 않게 모였으니 마야 사제를 소개했다.

       

       “어, 뭐야…. 어린애잖아?”

       

       작고 왜소한 마야의 모습을 본 교수들이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헤엣?! 엄청 귀여워!”

       

       그저 침투교수 리나만 헤벌쭉해서 머리를 쓰다듬다가 마야 사제가 손을 쳐내자 머쓱해져서 물러났다.

       

       “리나. 사제님들에게 예를 갖춰야지. 어린애 다루듯 하면 안 돼.”

       

       심리전교수 펠리미아는 안경을 고쳐쓰며 리나의 실수를 지적했다.

       

       “그래도 너무 어려요…. 망아지랑 키가 비슷해….”

       

       전투승마교수 애나가 혼자 웅얼거리면서 마야 사제를 힐끔거렸고 비무장전투교수 오크 브로그는 턱만 긁적긁적.

       

       무장전투교수 제네브는 팔짱을 낀 채 무뚝뚝하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고 내게 불만이 많은 종합전투교수 모턴은 이미 저만치 돌아가는 중이다.

       

       “흐음, 그래도 뭐 사제님이라고 하니 최소한의 응급처치 같은 것은 하실 수 있겠지요.”

       “그럼요. 그거라도 어디인데요.”

       

       본래 낙천적인 성격의 생존교수 웨이버와 마법대응교수 오렌디는 애써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어이, 수석교수! 이래가지고 네가 말한 제대로 훈련이 이루어지겠어?”

       

       전투장비교수 카자다르가 허리에 꽂은 망치 대가리를 만지며 불평했다.

       

       “신성력도 제대로 못 쓰는 수습사제를 데려오면 어쩌라는 말인가? 어?”

       “저는 수습사제 아닙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마야가 입을 열었다.

       

       “엥? 뭐라고?”

       “저는 수습사제가 아닙니다.”

       

       그러더니 마야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금빛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앗?!”    “아니, 이건?!”

       

       신성력의 비가 내리자 의무소 화단의 시들시들한 식물들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빳빳해졌다.

       

       이것은 치유의 비. 특정 범위 내의 모든 대상을 무작위로 치료하는 능력으로 어지간한 사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로르마네가 쓰는 것을 종종 보기는 했지만 마야 사제는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 이거 진짜 엄청나다.

       

       로르마네가 신탁사제라고 걱정 말라고 장담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교수들에게 정식으로 다시 마야 사제를 소개했다.

       

       “미처 말을 못했는데, 이분은 신탁사제시다. 알다시피 천성적으로 신성력이….”

       “반갑습니다, 사제님!”

       

       나를 밀치며 교수들이 마야 사제를 둘러싸고 바쁘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 어이없는 녀석들일세.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저쪽 본청 쪽 창문이 벌컥 열리며 키르린 교장이 상체를 내밀더니 헛숨을 들이켰다.

       

       “헉? 치유의 비?!”

       “교장님. 여기입니다.”

       

       손을 흔들자 키르린 교장이 나를 그리고 마야를 차례로 쳐다보고는 소리쳐 물었다.

       

       “이거 무슨 상황이야?!”

       “교단에서 신성사제 한분을 모셔 왔어요. 의무소를 강화하려고요.”

       “교, 교단에서… 사제를 보내줬다고…?”

       “그리고 봉사차원에서 오는 거니 돈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보, 봉사?!”

       

       어리둥절하는 키르린 교장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기필코 그 자리에 못 박아둘 테니까 시키는, 아니, 건의하는 대로만 움직이라고.

       

       

       # # # # #

       

       

       시끌벅적한 의무소 앞의 풍경을 창밖으로 보면서 키르린 교장은 어이가 없었다.

       

       디안이 교단본부에 사제를 받겠다 출장을 나선 것까지는 알고 있다. 디안이 생각하는 전투학과의 교육개선안을 실현시키려면 의무소의 역할이 굉장히 크니 당연한 일.

       

       키르린이 교단의 사제를 돌려 보낸 것은 어떤 나쁜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무소 이용빈도가 줄었고 그래서 인건비 절약 차원에서 결정한 사안.

       

       신성사제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얼마나 많이 드냐면 신성사제 한 명 쓸 돈이면 의사 열 명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고.

       

       그런데 그걸 봉사활동 명목으로 공짜로 데려왔다고? 진짜 저 인간 뭐지?

       

       일족의 수장인 아버지가 다른 다크엘프들을 배신하며 황제를 구했고 그 덕으로 자신이 과분하게도 아카데미 교장이 된 것을 키르린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2황녀를 비롯한 전후실세들이 자신을 내쫓고 싶어함에도 황제의 명으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자기 발로 걸어나가게 하기 위해 마왕을 죽인 용사 라이너스를 후임자로 지목했다는 것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키르린은 조금의 흠도 잡히지 않으려 부던히 노력했다. 아주 약간의 문제라도 터지면 황성에서는 이것을 물고 늘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왕군이 패배할 것을 예견해 미리 인간의 편에 붙을 정도로 뛰어난 수완가지만 다크엘프들이 그렇듯 한없이 냉철한 사람.

       

       키르린은 아버지를 무서워 했고 그런 아버지의 기대와 일족의 명예를 모두 짊어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전투학과의 수업들이 상당부분 축소되기는 했지만 대신 이론학과 쪽을 강화했고 기능이 줄어든 만큼의 예산을 예비로 충분히 비축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키르린은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키르린 같은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키르린은 한편으로는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극적으로 도와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상황을 나아지게 하든 아니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게 하든.

       

       그리고 그때 기적처럼 디안이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는 첫 번째 졸업생이 나오자마자 황성에서는 바로 교장님을 잘라 버릴 겁니다. 애들 처참한 수준 보면 황제도 더는 옹호하지 못할 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무너진 전투학과 쪽을 일으켜 세워야 해요. 전투와 이론 모두 균형을 잡는다면 황성에서도 극단적인 방법은 보류할 겁니다’.

       ‘하아, 그렇긴 한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 보고서에 결재만 해주시면요’.

       

       그래서 키르린은 보고서에 결재했고 디안은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로 교단에서 저렇게 신성사제를, 그것도 치유의 비를 쓰는 엄청난 사제를 데려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아버지가 마왕군을 배신하고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디안이 교장이 되는 편이 모두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일족의 숲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가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와 자신이 없다.

       

       키르린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교육훈련계획을 쳐다봤다. 그것은 ‘암살 및 납치’ 과목의 계획으로 현재 키르린이 맡고 있는 과목이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교수들이라도 이쪽 분야로는 다크엘프를 따라올 자가 없기에 키르린이 과목교수를 겸하고 있는 것.

       

       그것을 빤히 보면서 키르린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차라리 디안이 교장을 하고 내가 암살납치교수로 내려가는 건 어떨까…?

       

       황성에서는 원하던 그림이 되니 좋고 나는 압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 좋고 아버지도 딸이 제국 주요 아카데미의 교수라면 어느 정도 만족할 테고 디안도 높은 자리에 가니 좋을 거고.

       

       누구 하나 손해보는 거 없는 모양새. 이거 좀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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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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