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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0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발정기는 오지 않는답니다?”

     

     

    그 말에 네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하는 사람.

     

    머리가 순간 백지가 되어버린다.

     

     

    네르가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네?”

     

     

     

    노파는 이어 말한다.

     

    “그러니 착각하고 계신걸지도요. 발정기가 격해진게 아니라…이제야 발정기가 시작된 거죠.”

     

    “…그게…무슨,,,”

     

     

    그녀는 활짝 웃어보였다.

     

    “한 평생 사랑할 사람을 찾으셨나 보네요. 축하드려요.”

     

     

    네르는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베르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저 노파가 말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

     

    하지만 반박하기 위해 연 입에서는 그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라는 그 쉬운 부정이 나오지 않는다.

     

     

    심장이 쿵쾅대며 뛰고 있었다.

     

     

    베르그와 함께한 많은 추억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네르.’

     

    자신을 부르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도 떠오른다.

     

    네르의 꼬리는 어느새 말아져 자신의 허리를 감았다.

     

     

    “…어?”

     

    혼란스러움에 네르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노파는 미소를 지었다.

     

    “소녀 같으시네요. 후훗. 제 과거가 떠오르네요.”

     

     

    네르는 어렵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말하면서도 힘겹다는 걸 스스로 느낀다.

     

    그럼에도 자기 변명을 이어갔다.

     

     

    “베르그는 이…인족인걸요? 요, 용병이고…거기다 더해 평민인데…”

     

    노파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런 네르의 말에 답한다.

     

    “그런건 전부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블랙우드 영애도 아시고 계시잖아요?”

     

    “……….”

     

    “… 후훗. 우리는 사랑이 왔다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워요.”

     

    “…”

     

    “한 명만을 사랑하는데, 그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기적을 믿기 어렵거든요. 마음을 주기 전에 옳은 사람인지 걱정도 되고…마음이 넘어갔다는, 어쩌면 부끄럽게 느껴지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도 하고요.”

     

     

    네르는 그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특정 기간에 따라 발정기가 오는 거잖아요…?”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종족은 단 한 명만을 사랑해요.”

     

    “…”

     

    “그런만큼 아무나 사랑하지도 않고,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도 빠지지도 않아요.”

     

    “…”

     

    “우리가 보름달이 떴다고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면, 보름달이 떴다고 발정기가 온다면, 인…..묘인족처럼 아무하고나 사랑을 나누게 될걸요?”

     

    “…”

     

    “…보름달이 영향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발정기의 대상도 분명히 정해져 있고요. 간단히 말해…발정만큼 정확한 사랑의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네르는 노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면서도 굳이굳이 따지고 들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노파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래 살았답니다. 그 동안 수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요. 많은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이야기에요. 저도 그랬고, 제 주변인들도 그랬으니…”

     

    “…”

     

    하지만 그 어떠한 반박에도 너무나 쉬운 답을 내는 노파의 모습에, 네르는 끝내 입을 닫았다.

     

     

    “블랙우드 영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줄은 몰랐네요.”

     

    “…”

     

    그녀는 과거에 그랬듯, 혼란스러울 때면 꼬리를 꽉 껴안았다.

     

    어렸을때부터 이어져온 반사행동이었다.

     

    지금도 그 흰꼬리를 꽉 껴안으며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노파가 인사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

     

    네르는 그녀를 배웅조차 하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들에, 그럴 틈이 없었다.

     

     

     

    한참이나 같은 자세로 굳어있던 그녀가 생각한다.

     

     

    네르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머릿속 생각들을 무시하며,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다.

     

    베르그를 사랑하는 걸까?

     

    이미 마음을 준 걸까?

     

    한 평생 사랑할 짝을 찾은 걸까?

     

     

    “….아.”

     

     

     

    심장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고동에, 쌓은 추억에, 그녀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허무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

     

    …어쩌면 사랑에 빠진걸지도.

     

     

     

     

    ****

     

     

    아르윈은 추적이는 비를 바라보며, 따스함을 느꼈다.

     

    등에 맞닿은 베르그의 온기가 너무도 편안했다.

     

     

    젖은 옷으로 인한 찝찝함은 없었다.

     

    대신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다른 게 아니었다.

     

    귀족인 그녀가 이러한 경험을 두 번 다시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아르윈은 제 생각에 대한 변명을 또다시 떠올렸다.

     

     

    문득 가슴에 벅차게 들어치는 감정이 있었다.

     

    이 잔잔함이 주는 평화로움이 있다.

     

     

    숲속에서 울려오는 빗소리와, 등에서 전해져오는 베르그의 온기.

     

     

    나무 밑에서 이러고 있다는 찝찝함은, 베르그와의 기억으로 덧씌우고 있다.

     

    물론 160년간 이어진 고문은 말처럼 쉽게 잊히는 건 아니었다지만…그래도 지금은 괜찮았다.

     

     

    그녀가 오랜시간 바래왔던 평화가 이곳에 있었다.

     

     

    이러한 곳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단 한번도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상상은 해본적이 없었다.

     

    아마 그 어떠한 걸 보더라도 지금만큼 기억에 남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 감사함에, 일전에 이상했던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싶어진다.

     

    비를 피하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베르그.”

     

    “응?”

     

    “…사실 저는 이런 공간이 싫어요.”

     

    “…”

     

    “이유를 아시나요…?”

     

    베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가.”

     

    “…160년이나 고통 받았으니 쉽게 잊히질 않아요.”

     

    “…”

     

    묘하게 무거운 숨을 내쉬는 베르그의 모습에, 아르윈의 기분이 대신 풀리는 듯 했다.

     

    “…그래서 아까 들어오기 싫다고 했던 거에요. 미안해요. 막상 들어오니까, 아늑하고 좋네요.”

     

    “…그럼 다행이고.”

     

    아르윈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곁에 그가 있으니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었을거다.

     

    그리고는 베르그에 관한 질문을 묻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자주 비를 피해봤나요?”

     

    “아니. 나도 처음이야.”

     

     

    처음이라는 말에 아르윈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비가 오면 저는 이 순간이 항상 기억날 듯 해요.”

     

    베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윈은 베르그가 그 의미를 아는지 알 수 없었다.

     

    엘프인 그녀가 이 순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천년 이상이나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게 될 터였다.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이 기억을 생생히 간직할 것이었다.

     

     

    벌써 이런 추억이 몇 개나 있다.

     

    갤리아스 일도. 바다 일도. 반지 일도.

     

     

    “…”

     

    문득 아르윈은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베르그가 죽고 난 이후의 세상을 생각하게 된다.

     

    기다리던 자유가 올 것이 분명했음에도…지금와서는 내키지가 않는다.

     

    이것 또한 끝나는 순간이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무언가가 끝나지 않았으면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지도 몰랐다.

     

     

    “…”

     

    아르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좋지 못한 생각은 지금 하지 않기로 한다.

     

    이 추억의 장애물이 될 것이었다.

     

    천 년 이상 간직할 기억에 그런 불순물은 없어야만 했다.

     

    그러니, 밤공기가 가져오는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단명종이 이렇게…좋아질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마음에 얹힌 짐을 베르그가 하나씩 들어주는 느낌이다.

     

    그 동안 누구에게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적이 없던 그녀였다.

     

    170년간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 하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베르그는 달랐다.

     

    곁에 있을수록 편했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받아들여줄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겨난다.

     

     

    그 마음에, 아르윈은 천천히 베르그의 등에 몸을 맡겼다.

     

    “…”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머리를 기댄다.

     

     

    그 순간, 베르그가 몸을 움찔 떤다.

     

    아르윈은 그런 그의 행동에 놀라 고개를 떼어냈다.

     

    싫었던걸까.

     

     

    “…베르그?”

     

    그리고 그를 돌아보자 무엇이 그를 떨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기댄 곳에, 네르의 이빨자국이 나 있었다.

    푸른 멍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이빨자국.

     

     

    “……………….”

     

     

    아르윈은 순간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무슨 감정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좋지 못한 감정이라는 것만이 확실했다.

     

     

    이 순간에 자신들의 사이를 방해한 네르의 흔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금 장애물이 나타난다.

     

     

    베르그가 말한다.

     

    “미안. 싫었던게 아니라..잠시 뻐근해서.”

     

    “…”

     

     

    베르그는 또 그런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대체 왜 이런 남자가, 그런 여자 때문에 고통 받아야하는 걸까.

     

    왜 이런 불필요한 흔적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하는 걸까.

     

    그런 그들의 야만적인 문화는 아르윈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르그.”

     

    “…응?”

     

     

    아르윈은 돌아서서 베르그의 왼손약지에 끼워진 네르와의 결혼반지를 흘겼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네르에 대한 비밀…하나 알아두셔야 할게 있어요.”

     

     

    아르윈은 달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야지만 베르그가 상처를 덜 받을 것 같아요. 그래야지만…더는 이런 무모한 짓도 안하죠.”

     

    아르윈은 베르그의 흉터를 부드럽게 만졌다.

     

     

    베르그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부탁한 일이야. 네르는-”

     

    “-네르는.”

     

     

    아르윈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사실을 밝힐 생각은 이미 여러번 했다.

     

    이제야 계기가 생겨났을 뿐이다.

     

     

    베르그는 눈을 깜빡이며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아르윈을 바라보았다.

     

    “…?”

     

     

    아르윈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네르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베르그는 싫다고 말했던 네르 아니던가.

     

    어떻게 인족용병을 사랑하냐고 말하던 그녀 아니던가.

     

     

    조금은, 둘의 사이를 벌려주어도 괜찮을 것이었다.

     

     

    “네르는…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요.”

     

     

    베르그가 살짝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르윈은 그걸 보면서도 말했다.

     

     

    “…이미 기다리고 있는 상대가 있거든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Liliel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이전작을 읽어주고 계시군요. 재밌으시다니 저도 기쁩니다ㅎㅎ. 칭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Choyu님! 3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의 매력을 알게 되신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이어지는 장르의 매력도 알려드릴 수 있다면 기쁘겠네요. ㅋㅋㅋ 앞으로도 따라와주세요. 좋아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후원 감사해요.

    _289님! 1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긘가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300만 축하 감사드립니다! 모두 다 여러분의 사랑 때문이에요. 응원 감사합니다, 작가님!

    김레몬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ㅎㅎㅎ 소설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저도 항상 재밌답니다. 힘도 많이 나구요. 정말 댓글과 감상평 덕에 글을 쓸 힘을 얻는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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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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