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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0

       에테르에게서 겨우 도망쳐 나온 아카샤는 서쪽 산 중턱에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겠지?”

         

        산기슭치고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아카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적당한 바위를 찾아 걸터앉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벗어나자 영민한 두뇌과 과거를 헤집어나갔다. 아카샤는 조금 전 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설마 기억을 잃어버리고 나서도 내 전용 마법을 요구할 줄은 몰랐는데….”

         

        자기 언니는 기억을 잃기 전부터 마도학 공부에 열중하곤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전설급 마도조차도 스크롤로 만들어보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학구열이 뛰어났다.

         

        그 목표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한때 아카샤도 그런 언니를 본받아 자신의 마법을 스크롤로 남기려고 했었다. 본래 전설급 마도는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크롤로 남기면 안 됐지만, 당시 천진난만했던 소녀들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그 노력의 산물이 조금 전 언니에게 건넸던 ‘백야(白夜)’의 미완성 축조진이었다.

         

        “그랬던 적이 있었지.”

         

        지금 와서 보면 허튼짓이었다. 그 마법을 단순히 쓸 줄 아는 것과, 남도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회상을 마친 아카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는 거래의 대가로 받은 토카막이 있었다.

         

        아무리 자기 언니라도 자신의 전용마도 정보를 넘겨주는 건 뒷맛이 썼지만, 뭐 어떤가.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플랜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공이었다. 추후 마왕님에게 칭찬받을 걸 생각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이고,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아카샤는 토카막에 투명화 스크롤을 먹였다. 마소로 된 투명 물감이 순식간에 토카막을 뒤덮었다.

         

        그리고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푹 눌러썼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데 얼굴이 보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거긴가 본데.”

         

        아카샤가 도착한 곳은 침수로 외벽이 무너진 한 건물이었다.

         

        루브아르 박물관. 제국에서 수도의 중앙박물관 다음으로 큰 박물관이다.

         

        단순히 규모만 큰 전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곳에 마왕님을 현세로 모셔 오는 데 필요한 봉인석이 보관되어 있다.

         

        적(赤)의 로드스톤, 다섯 개의 봉인석 중에서 화계의 정령왕이 빚은 정령석이다.

         

        “정말이지, 꼭꼭 숨겨놨단 말이지.”

         

        때마침 박물관 입구에서 여러 미술품이 딸려 나왔다. 아카샤는 그 행렬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중앙박물관 行]이라고 적힌 마차에 커다란 택배가 실려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다.

         

        “저거네.”

         

        아카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운이 좋은데.”

         

        원래는 1석에게 부탁하여 수인족이 살리에르 영지를 급습하게 한 뒤, 그 자리에서 몰래 로드스톤을 탈취할 계획이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중앙박물관은 틸레트 아카데미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로즈마리가 있다.

         

        “뭐 볼 필요도 없었네.”

         

        소란을 떨 이유도 사라졌다.

         

        아카샤는 투명화 마법이 걸린 토카막을 든 채로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

         

         

        로테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의 대부분을 저택 식구들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 하얀 머리색을 한 소녀는 아가씨 친구분이 아니라 쌍둥이 여동생이셨고, 진짜 친구분은 수인족이 있는 곳으로 2주간 떠나 계시다가 막 돌아온 참이라는 말씀이시죠?”

        “게다가 그 여동생은 펜릴을 길들일 정도로 의미심장한 분이시고요.”

         

        메이드들의 알찬 요약에 로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는 반대로, 정작 얘기를 전해 들은 시종들은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펜릴을 한 번에 제압한 것도 모자라 길들였다니…. 농이 지나치세요.”

        “게다가 펜릴은 재앙급 마수잖아요. 그런 괴물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나타나요?”

         

        억울했다. 마치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 또한 업보겠지. 이미 가족들에게 아카샤가 염색한 에테르라는 거짓말을 해버렸으니 자길 믿지 않아도 무리는 아니었다.

         

        때마침 서고 창문이 깨졌다는 보고를 받고 아버지가 달려왔다. 수습된 상황을 확인한 살리에르 백작은 시종을 물린 뒤 로테와 단둘이 남았다.

         

        아버지가 측은한 눈빛을 한 채로 말했다.

         

        “네가 거짓말을 한 건 그때부터 알고 있었단다.”

        “아….”

         

        역시.

         

        그 당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수긍이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기는 했다. 로테는 들숨을 삼키며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살리에르 백작가는 예로부터 정직함을 중요시 여겨왔다. 그걸 어겼으니 벌을 받겠지.

         

        “죄송해요.”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네가 왜 그때 거짓을 말했는지 궁금해서 그랬다. 이건 추측이지만… 그 소녀에게 너만 아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지?”

        “……!”

         

        책망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접시를 깨 먹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나긋한 말소리.

         

        “그리고 네 친구에게도 말이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로테는 눈망울을 크게 떴다.

         

        “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을게.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렴. 네가 믿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으면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믿거라. 그게 너와 그 친구를 위한 길일 테니까.”

        “그걸 어떻게…….”

        “뻔하지. 네 나이 때에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거든.”

         

        쓴웃음을 짓는 아버지. 로테의 아버지, 살리에르 변경백은 늘 이런 사람이었다.

         

        분명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를 텐데,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고민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자식 마음 모르는 부모 없다는 게 이런 걸까.

         

        ─ 언니는 늘 그랬어. 친구보다 연구가 더 소중하지.

        ─ 토카막도 그래. 전에 엘프 마을에서 누가 설계하던 걸 베껴다가 완성한 거잖아?

        ─ 왜 새벽에 말도 안 하고 피치블렌드 산을 다녀왔겠어? 이 영지에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로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의심을 하게 되면요?”

        “친구 사이에 그런 건 의심이 아니란다. 그저 궁금한 것일 뿐이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오해를 만들지 말고 진심을 담아 물어보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로테의 아버지는 이렇게 살아왔기에, 중상모략이 일상인 중앙정치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다.

         

        “그럼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딸이 궁금하다는데.”

        “그 진심을 제대로 전하려면 어떤 식으로 물어보는 게 좋아요?”

        “음…. 그러게 말이다. 일단 아빠가 군에 있을 적에는 서로 등을 밀어주면서 낮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단다. 연대장이 폐급이라느니, 누구 머리숱이 많이 없어졌다느니 하는 주제로 말이다.”

         

        그렇구나, 하고 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참고가 되는 방법이었다.

         

        “때마침 저기 오는구나.”

        “에테르….”

         

        ─ 네 친구는 남의 연구 훔쳐다가 쓰는 도둑년이야. 당장 플레어를 생각해 봐. 스쿠핑 당한 클라이스 선생님의 얼굴이 어땠었는지 한 번 기억해 보라고.

         

        헛소리다. 동생이 처음 보는 타인에게 자기 언니를 깎아내리려고 할 리가 없잖아.

         

        등을 떠민 것은 아버지다. 하지만 기회를 붙잡는 건 자신이어야만 한다.

         

        흑발금안의 소녀는 기분이라도 좋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 토카막은 없었지만, 대신 커다란 스크롤을 들고 걸어왔다.

         

        아카샤와는 다른.

         

        너무나도 순수하고,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그럼에도 행동으로 묻어나오는.

         

        생명의 은인이자, 앞으로도 함께 할 자신의 과외 선생님.

         

        그런 선생님에게 질문할 거리가 많았다. 로테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

         

         

        기분 째진다.

         

        [전설급 고유마도 ─ ‘백야(白夜)’의 미완성 스크롤(개화부)]

         

        토카막을 대가로 아주 희귀한 스크롤을 얻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이다.

         

        전설급도 그냥 전설급 스크롤이 아니다.

         

        [▷(설명) 백야(白夜)]

         

        [지정한 대상을 준중성 상태(Quasi-neutral state)로 만들어 조작하는 궁극의 마도. 화계와 공계를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혼성 마도로도 볼 수 있다. 지정 대상이 ‘하늘’일 경우 대기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기 때문에 ‘백야(白夜)’라는 이명으로 불린다.]

         

        [□ 현재로선 이 마도를 온전히 익힐 수 없습니다.]

        [△ 사유 : 특정 조건을 갖춘 존재만이 이 마도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플라스마를 자연 발생시키는 기술.

         

        플라스마를 만든다고 핵융합이 절로 되는 건 아니지만, 핵융합을 만들려면 일단 물질이 플라스마 상태에 돌입해야 한다. 마왕 토벌을 위한 필요조건을 손에 넣은 셈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게 미완성 형태라는 것.

         

        결국 플레어 때와 똑같다. 열심히 뺑이치면서 개발해야 한다.

         

        그나저나…. 이거 쉽게 할 수 있으려나.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스크롤을 돌돌 말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어느덧 살리에르 백작가의 자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대형 사고를 치고 나왔지. 들어가기가 괜히 두려워지는데.

         

        그래도 민폐를 끼쳐버린 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다. 아카샤가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에테르의 여동생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니까.

         

        “하아.”

         

        인생 참 피곤하다. 생판 모르는 애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다니. 이 스크롤을 안 받았더라면 진짜 화날 뻔했다.

         

        “에테르!”

        “응?”

         

        저 멀리서 로테가 뛰어온다. 아카샤가 튀던 속도에 비하면 아니지만, 제법 빠르다.

         

        뭐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달려온 로테는 숨을 헐떡거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뭐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어, 응. 그래야지.”

         

        변명거리를 늘어놓을 준비는 끝마쳤다. 수인족의 나라에는 왜 다녀왔는지, 분명 여동생이 없는데 저 흰둥이는 어디서 난 년인지 등등.

         

        나는 숨을 몰아쉬는 로테를 진정시키며 저택을 가리켰다. 일단 집에 들어가고 나서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내 제스처를 알아들은 로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차게 말했다.

         

        “그럼, 같이 목욕이라도 할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드디어 100화를 달성했습니다!

    세상에… 만년 프롤로거였던 내가 100화씩이나 썼다니…!!

    모두 독자 여러분의 응원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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