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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0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선 자에게 꿈은 더 이상 휴식이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고 날뛰는 마력은 꿈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며, 생명을 얻은 꿈은 현실과 분간할 수 없다.

       

       차디찬 감옥과,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친구들. 이것은 꿈인가?

       

       분간할 수 없다.

       

       흘러내리는 피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시체. 이것은 꿈인가?

       

       분간할 수 없다.

       

       해와 달이 거꾸로 뒤집히고, 배배 꼬여버린 시간. 이것은 꿈인가?

       

       분간할 수 없다.

       

       유나 유렌스토 바이올렛아이리스는,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족히 10년은 넘게 이어진 불면증이다.

       

       다행히도 신체에는 이상이 없다.

       

       뇌에 쌓인 피로는 마력으로 풀고 있으니까. 그러니 장기간 수면을 취하지 않았을 때의 부작용── 섬망 증세라든가, 판단력 저하 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정신은 다르다.

       

       여기에 파도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섬이 있다. 높게 솟아오른 파도가 단단한 섬을 치고 지나갈 때면, 일견 멀쩡한 듯 보이나 분명하게 깎여나갔다. 돌 부스러기는 파도가 가져간다. 깊은 심해에 숨긴다.

       

       우리는 안다. 섬은 언제고 깎여 사라져 버릴 것이다. 자색 마탑주는 정신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새 잠이 잘 안 오거든⋯⋯ 푹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돌려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마탑에서.

       

       하지만 마법사는 일을 물어보는 대신, 행동으로 처리했다.

       

       이름 없는 마법사는 즉시 유나를 냅다 들어다가 침대에 눕히고, 따땃하게 데운 우유에다가 꿀 한 숟가락 타서 가져다주고, 다 마시면 양치질도 해 주고, 전신 마사지도 해 주고, 귀도 파 주고, 이불 덮어주고 옆에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줬다.

       

       그날 유나의 꿈에는 이름 없는 마법사가 나왔다. 다른 의미로 정신이 피곤했다.

       

       좋긴 좋았는데 근본적인 건 해결이 안 된다 싶어서, 핑발레즈⋯⋯ 아니, 유리 랜스터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크라운홀에서의 1일차가 마무리될 무렵에 말이다.

       

       그 핑크머리 서큐버스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벗고 자는 겁니다.”

       

       “⋯⋯⋯⋯?”

       

       “인간의 기원에는 여러 학자의 이론이 있으나, 공통으로 증언하는 것은 ‘고대 인류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인간들은 알몸으로 생활하고 알몸으로 잤다는 것인데, 이는──”

       

       창조와 기원까지 끌어다 치는 유리 랜스터의 알몸수면론은 유나의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았다. 그래서, 해 보긴 했다.

       

       어젯밤에 잠이 들기 전에, 이름 없는 마법사에게 ‘저, 절, 절대, 절대 들어오지 마!’ 라고 경고도 남기고. ‘마탑주님도 그럴 나이가 됐지⋯⋯’ 하는 표정을 짓는 마법사에게 로우킥도 날리고.

       

       그러고서도 벗을까 말까 30분 정도 고민한 뒤에.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서, 결국 옷을 전부 탈의하고 잠에 들었다.

       

       그날 밤에는 유리 랜스터와 마법사와 유나 셋이서 홀딱 벗고 푸르른 초원을 내달리는 꿈을 꿨다.

       

       그리고 현재, 로레이가 달려와서 해명하기 전. 크라운홀 방문 2일 차의 아침.

       

       “마탑주님 들어갈게요?”

       

       “⋯⋯⋯⋯!!!!!!”

       

       알몸인 채로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던 유나 유렌스토 바이올렛아이리스에게, 시련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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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새끼 저거 들어갈게요? 라고는 했지만 나 들어간다! 랑 다를 바가 없다. 워낙 격의 없이 살다 보니까 서로의 방에는 그냥 냅다 들어가 버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거다.

       

       뭐부터 입지.

       

       유나는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팬티부터 입었다. 그다음으로는 상의를 입고, 스커트를 차고, 코트까지 걸치면 언제나처럼의 마탑주 패션이 완성된다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다. 이름 없는 마법사가 돌입하기 일보 직전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다 입기 전에 마법사가 들어오는’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실은⋯⋯ 비정한 법이니깐⋯⋯!!

       

       그렇다면 최단 시간, 최선의 수를 두어야 한다. 마탑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일단, 일단은 팬티를 우선순위 맨 뒤로 미룬다.

       

       팬티만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끄럽다. 하지만 스커트를 입으면, 어차피 하반신이 가려지니까 팬티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다.

       

       실내이니 바람이 불 일도 없으니까 더욱이나 유효한 상황.

       

       후다닥 스커트부터 입었다. 그리고 문이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계산하면, 입을 수 있는 건 앞으로 한 파츠⋯⋯!

       

       정배는 상의다. 까만색에, 약간 망사틱하고 몸에 달라붙는 재질의 그거. 하지만 그런 타이트한 옷을 입는 데에는⋯⋯ 엄청 시간이 걸린다! 

       

       목에 머리를 넣으려고 버둥거리다가 시간이 다 되면, 상반신을 채 가리지도 못한 채 얼굴과 팔이 보쌈당한 모습을 공개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외투다. 팔만 휘리릭 넣으면 입을 수 있는 외투다! 

       

       샤샤샥.

       

       입었다. 이제 지퍼만 올리면 된다. 그러면, 조금 휑하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유나 패션이 완성된다. 유나는 외투 끝자락을 매만졌다.

       

       “⋯⋯흐아앗!!”

       

       지퍼가, 없다⋯⋯!!

       

       하도 안 잠그고 나풀나풀 입고 다니다 보니까, 지퍼가 고장 난 걸 여태까지 수선하지 않았었다! 중대한 패착이었다. 유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몸의 중심선을 따라서 살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걸 배꼽을 가려야 하나, 가슴을 가려야 하나. 아니, 지금이라면 조금 시간이 있으니. 이불을 둘둘 말아서 가드하면⋯⋯!

       

       “오.”

       

       “오, 오늘은 되게 와일드하게 입으셨네요.”

       

       “어, 어? 아, 응! 그, 그래, 그, 그런 기분⋯⋯ 기분이라⋯⋯!!”

       

       타임 오버였다.

       

       ===============================================================

       

       눈 뒤집혀서 달려 나가려는 핑발레즈 머리끄댕이부터 잡아챘다. 

       

       “핑발레즈야, 그러지 마라.”

       

       “아니, 지금 유혹하고 있는 건 마탑주님 아닙니까.”

       

       질질질.

       

       분명 온 힘을 다해서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있는데, 끌려가는 건 나였다. 너는 모근마저도 강력하다는 말이냐, 유리 랜스터!

       

       이 자식 눈깔이 맛이 갔다. 유나의 와일드한 패션에 내면의 야성이 깨어나 버린 거다. 하기사, 나도 입장하자마자 성욕 억제 2단계를 건 참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그, 그래서⋯⋯ 여긴 왜?”

       

       유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한 채로, 몸을 비스듬히 틀면서 양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 어째서 그런 와일드한 패션을 추구했다는 말이냐.

       

       아니, 탓하는 건 아니다. 나는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핑발레즈가 문제였다. 얘를 데려오면 안 됐는데.

       

       “마탑주님, 제가 목욕 시중을 들어도 되겠습니까.”

       

       “아잇, 씨. 그러니까 저희가 왜 왔냐면요, 저희 사진 한 번 찍죠.”

       

       “⋯⋯사진?”

       

       그래, 사진이다.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구에 매진할 때는 그런 부분에 소홀했는데, 요새는 추억을 찬찬히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사진집이라도 펼쳐 보며 추억을 회상하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사진은 찍으면 찍을수록 좋다. 게다가.

       

       어쩌면. 어쩌면이지만.

       

       가족사진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카메라를 흔들었다. 저어기 마도구점에서 비싼 값을 주고 사 온, 수정구가 덕지덕지 붙은 1회용이었다. 

       

       “카메라도 가져왔거든요. 기록으로 남기면 좋잖아요.”

       

       “예, 그러니 이쪽을 보고 이름과 나이를⋯⋯.”

       

       “너 빨리 본망구속 써, 얼른. 스스로를 구속해.”

       

       “사, 사진⋯⋯ 이구나. 헤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거 혹시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나는 우선 삼각대를 펴고, 넥타이를 풀어내는 핑발레즈에게 위협사격을 가하고, 수정구-카메라를 잘 올려다 놓았다.

       

       타이머 설정을 하고, 재킷을 벗으려는 핑발레즈에게 위협사격을 가하고, 마탑주를 불렀다. 가운데에는 마탑주가 서 있으면 딱 좋겠다 싶어서.

       

       “자, 저 수정구 보고 다 같이 찍는 거예요. 포즈 취하고.”

       

       “포, 포즈? 그게, 어떤⋯⋯.”

       

       “그냥, 자연스럽게요. 남기고 싶은 표정이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사진이라는 건 시간을 도려내서 장식해 놓는 셈이 아니겠는가. 감정이 담기면 담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 당시에, 내가 어떻게 느꼈고,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표시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으, 으히.”

       

       마탑주 유나가 세상 어색하게 웃었다.

       

       “⋯⋯⋯⋯.”

       

       “⋯⋯⋯⋯.”

       

       핑발레즈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리할까요?”

       

       “합격기다.”

       

       “너, 너희들 뭐햐아아아아앗⋯⋯!!”

       

       나와 핑발레즈는 좌우로 유나에게 달라붙었다. 이런 건 자연스러운 표정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어색한 미소는 좋지 않다고 본다. 

       

       핑발레즈는 마탑주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욕망을 표출했고, 마탑주는 한 손으로 핑발레즈의 얼굴을 꾹꾹 눌러 밀어냈다. 

       

       나도 바짝 달라붙었는데, 나는 안 밀어냈다. 어떠냐 핑발레즈 이 자식, 이게 10년간 쌓은 유나와 내 사이의 유대다. 어딜 넘보려고.

       

       나는 배후에서 음흉하게 꾸물거리는 핑발레즈의 손으로부터 마탑주를 지켜내며, 사진기 쪽을 바라보았다.

       

       “자, 마탑주님 카메라 보시고, 치즈.”

       

       “이, 이 상황에서⋯⋯?!”

       

       “치-즈.”

       

       “핑발레즈 너, 카메라 보라고. 카메라. 우리 유나 그만 보고!”

       

       “우, 우리 유나⋯⋯?!”

       

       찰칵.

       

       

       

       ===============================================================

       

       “나름 괜찮지 않나.”

       

       “야해서 좋네요.”

       

       “⋯⋯압수야!”

       

       사진은 마탑주에게 뺏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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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로레이가 오고, 저택 습격을 결의하고, 싸우고, 자폭시키고, 이름 없는 마법사가 감옥으로 잡혀가고 난 뒤.

       

       유나 바이올렛아이리스는 높다란 건물 지붕 위에 앉아서 크라운홀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어제와 달라진 부분이 없었지만, 어쩐지 즐겁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유는 안다. 옆에 그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고작⋯⋯ 반나절도 안 됐는데.”

       

       그가 없었을 때는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유나는 압수했던 사진을 꺼내서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의 자신은 당황에 허둥대고 있긴 해도, 행복해 보이냐 불행해 보이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행복해 보였다.

       

       포로롱.

       

       유나는 나비가 되어서 하늘을 날았다. 유리 랜스터가 2황자에게 갔으니, 마법사는 곧 감옥에서 풀려날 테지만. 유나는 더 기다리기 힘들었다.

       

       외로우니까, 이만 그의 곁으로 날아가 볼 생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00화 기념이랍니다. 그럼 이제, 내일 또 만나요⋯⋯!
    라고 하면, 그렇죠. 마이 프렌즈들이 저를 마이 슬레이브라고 부를 게 눈에 선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이 풀-일상-회차는 100화를 기념하기 위해 넣은 소소한 덤입니다. 연재본은 제대로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따라와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힘내서 써보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혼자서 쓰던 거는 13화쯤 쓰면 많이 썼다 하고 띡 끝내버리던 제가, 이토록 길게 쓸 수 있을 줄이야⋯⋯!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로요. 여러분과 같이 놀고 있으면 정말 즐겁거든요! 요새 되게 재밌습니다.

    그래요, 이게 300화 기념도 아니구 너무 혼자서 궁상을 또⋯⋯. 그만큼 신났다는 거죠! 그럼 다음 화에서 또 봐요!

    다음화 보기


           


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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