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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0

       아버지.

         

       어린 가주가 백치인 틈을 타 막대한 가산을 가구 하나까지 죄다 챙겨서 도망친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 그리 말도 없이 떠나고 소식 없이 찾아오지 않는 걸까.

         

       어딘가의 도박판에서 모든 가산을 잃고 길거리를 전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식 보기조차 부끄러워 만나러 오지도 않는 건 아닐까? 스스로의 죄에 짓눌려 밝은 미래조차 겁내는 상태 말이다.

         

       -행적은 찾을 수 없었어. 크래프트의 가산을 처분할 때 황실이 도와준 정황은 있지만 더 깊게 가기엔 학생회의 역량 밖이야.

       -고생했어, 엘리.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 황실이 흑막 아닐까?

         

       학자 출신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제국 최대의 명문가를 몰락시키고 도망친 건 수상하다.

         

       교단의 활동이 활발해진 건 최근이다. 마계도 이기고 교단도 토벌해 공적이 사라진 황실에서 내부의 명문가들을 손보다가 하필 가주 자리가 약해진 크래프트가 잘못 걸린 건 아닐까.

         

       그 순간 유약한 아버지는 협박당했을지도 몰라.

         

       -흥미로운 생각이군.

         

       과거 기억 속 악마가 생각에 빠졌다.

         

       -연인을 그리 사랑하던 그 샌님이 이유 없이 자식을 두고 도망쳤을 가능성보다 높긴 하다. 내가 다시 갇혀 있던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만.

       -황실이 얽힌 일이라면 중앙정계로 발을 넓혀야 할까요?

       -초조하게 할 필요는 없다. 차차 해나가도 과거는 사라지지 않아. 넌 아직 어리다. 학업에 집중해도 늦지 않지.

         

       아버지에게 사연이 있는 거겠지.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셨다고 하니.

         

       -당신의 아버지 말인가요? 연애사가 유명하죠. 제가 태어날 시점엔 이미 끝난 일인데도 일화를 들었는걸요. 당시 황태자셨던 황제 폐하와 신만을 사랑했던 대악마 사이에서 학자가 결혼에 성공하다니요.

         

       머엉.

         

       -악마님……?

       -흠. 넌 알 거 없다.

       -그렇게 반응하시면 더 궁금해지는데요!

       -알 거 없다.

         

       아버지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맞는 거 같아. 자식으로서 적당히 화내고 적당히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지.

         

       그런데그런데.

         

       “그렇다고 이 타이밍에 만나면 너무 당혹스러운데요!”

         

       파스텔은 학살로 피에 절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우아! 우아!”

         

       가족 상봉을 한창 교단 습격 중에 해도 되는 걸까아. 그런 걸까아.

         

       책임자로서 이게 맞는 걸까아!

         

       근데 기사급 교단원의 말을 믿자면 아버지가 교단의 높으신 분 같으니 본래 목적인 지휘부 마비의 효과는 얻는 거 아닌가? 대화 도중에 지휘를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허억, 맞아.

         

       그러면 대화를 나눠도 될 거 같아!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호르몬 친구가 교단원을 죄다 죽여서 그런지 아니면 그사이에 일부는 도망쳤는지 하얀 실내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중심부에 들어서자 커다란 음각 벽화가 한쪽 면을 덮었다. 하늘섬의 모습이었다.

         

       뭐 하는 곳이지.

         

       왜 하필 이런 곳에 지휘부가?

         

       파스텔은 혼란스러워하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통로를 힐끔거렸다. 벽화와 통로를 번갈아 보다가 스리슬쩍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채, 책임자로서 고민은 조금 있다가.

         

       응응.

         

       하얀 복도를 거닐었다. 문 없는 통로를 넘어서자 넓은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에서 인공 햇살이 들어와 그늘진 광원을 만들었다.

         

       익숙한 듯 낯선 뒷모습이 보였다. 어떤 남자가 하얀 마법진들을 조작하며 집중했다.

         

       아.

         

       파스텔은 숨을 죽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인사말?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백치 상태가 아닌 대면은 처음이 맞으니?

         

       그보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야? 황실도 아니고 교단엔 왜 있는 거고?

         

       정말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걸까? 내가 속단해서 생각하는 건 안 좋겠지.

         

       그럼 무슨 말부터 꺼내……?

         

       지금까진 모르겠지만 앞으론 잘 지내봐요?

         

       아니야 아니야. 이건 마지막 말이잖아. 첫마디부터 이러면 아빠가 곤혹스러워할 거야.

         

       소녀는 본인의 한쪽 팔을 등 뒤로 잡았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러면, 우리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얘기하고 서로 이해해 봐요?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요.

         

       응응, 괜찮아 보여. 내 쪽에서 말문을 열어주면 아빠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

         

       일단 말문이 풀리면 대화가 잘 풀릴 수 있을 거야. 혈육이니까. 그렇네! 엄마를 공통 주제로 담화를 이어가면 얘깃거리가 부족해서 곤혹스러울 일도 없겠지! 게다가게다가 아빠도 그동안 하지 못한 얘기가 얼마나 많을까! 시간이 부족할지도 몰라!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굳었던 몸이 풀리고 자세가 바뀌었다. 그러며 신발 소리가 작지만 뚜렷하게 울렸다.

         

       숨이 들이켜졌다. 경직된 분홍 눈동자가 아버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아버지가 손을 움직이더니 유물 장치를 조작했다. 하얀 마법진들의 모습이 한차례 뒤바뀌었다.

         

       소란이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왔다.

         

       테라스로 바람이 불어왔다. 분홍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입술이 떨리다가 소리를 냈다.

         

       “아, 아버지!”

         

       일단 입을 열자 마음속에서 여러 말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요.”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유일하게 알던 가신도 다 죽고 가진 돈도 없어서 한창 굶었어요. 그런데 해야 할 일은 많고 두려운데 안 할 수는 없어서 항상 신세 지내는 분께 괜히 어리광이나 떼를 썼고요.”

       “그러다 친구도 많이 사귀고 멘토들도 생기며 뭔가 운 좋게 일이 잘 풀려서 그래서그래서.”

         

       손뼉이 짝 울렸다.

         

       “지금은 썩 괜찮은 기분이에요!”

         

       무슨 얘기를 듣던지요!

         

       밝아진 분홍 눈동자가 뒷모습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실내에 울리다가 잦아들었다.

         

       정적 속에서 햇살이 들어와 실내를 비췄다. 유물 장치가 조작됐다. 시선이 변화하는 마법진을 관찰하듯 지켜봤다.

         

       흘러가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파스텔.”

         

       소녀는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네! 네! 오랜만이죠!”

         

       소녀의 양팔이 벌려졌다.

         

       “앞으론 잘 지내봐요!”

         

       아니지 이게 아니라.

         

       “우, 우리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얘기해 봐요! 저는요. 그래서그래서 어쨌든, 썩 괜찮은 기분이에요!”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덧붙였다.

         

       “지금도요!”

         

       손가락이 유물 장치를 조작했다.

         

       “허심탄회라…….”

         

       소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네!”

         

       아버지가 과거를 떠올리듯 말을 골랐다.

         

       “블로섬은 건강이 좋지 않았어. 후계 경쟁에 눈이 먼 혈족 중 누군가가 어렸을 때 손을 썼을 거야. 본인은 끝까지 지병이라 우겼지만.”

         

       얼핏 가벼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느리게 손뼉이 쳐졌다.

         

       “엄마도 참!”

         

       믿을 사람이 다 있지.

         

       유물 장치가 딸깍였다.

         

       “그래서 출산은 하면 안 됐지.”

         

       소녀의 표정이 얼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 적이 없어. 집안을 잇기 위해 자식이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낳았지.”

         

       모은 손이 움츠러들었다.

         

       “다음 세대는, 네 탄생은 전혀 바라지 않았어. 성가시고 껄끄러운 주제일 뿐이야. 우린 너까지 감당하기엔 남은 삶을 즐기기에도 부족했으니까.”

         

       학자의 시선이 마법진을 살폈다.

         

       “하지만 낳았고, 오래가진 못했지. 너를 위해 희생된 거야. 본인의 영혼을 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백치가 된 자식을 낳으려고.”

         

       유물 장치가 건드려졌다. 마법진의 형상이 변했다.

         

       “우리가 몰락시킨 교단의 잔당이 찾아와 권유하더군. 네 자식이 가진 영혼의 힘에 기회가 있다.”

         

       아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떠난 블로섬을 살려낼 방법이.”

         

       시선이 유물 장치로 내려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골든타임은 지났어.”

         

       햇살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남은 자식을 돌보려던 다짐도 연인을 흘려보내려던 마음도. 애초에 태어나서는 안 됐던 거지.”

         

       소녀는 숨을 헐떡였다. 작은 손이 가슴팍을 눌렀다.

         

       “블로섬을 살리는 일이야. 원한다면 돕고, 싫다면 방해하지 말고 떠나.”

         

       소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행복하세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가 행동을 멈췄다. 잠시 천장을 보다가 천천히 되돌아봤다. 시선이 소녀를 지나쳐 먼 곳을 바라봤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위대하지.”

         

       가쁜 숨소리가 났다.

         

       “어머니라도, 행복할까요?”

         

       소녀는 말하다 주저앉았다. 분홍 머릿결이 펼쳐졌다가 가라앉았다. 하얀 옷차림이 지면을 덮었다.

         

       헛숨 사이로 대답이 들려왔다.

         

       “죽음이 괴로운 삶보다 낫던가?”

         

       아.

         

       “도울-”

         

       통로에 발소리가 울렸다.

         

       『가족 상봉이라 참아줬더니.』

         

       정장 차림의 악마가 걸어왔다.

         

       『아주 끝이 없군.』

         

       소녀는 멍하게 되돌아봤다. 가쁜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분홍 눈동자가 일렁이다가 눈물을 쏟았다.

         

       “악마니임!”

         

       발걸음이 달려갔다. 분홍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악마가 휘청이며 소녀를 받아 들었다.

         

       『어이고.』

         

       울음소리가 났다.

         

       『울어라.』

         

       손바닥이 등을 토닥였다.

         

       『마음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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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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