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00

     

    무엇을 원하느냐는 황제의 질문에,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의료인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한 것일 뿐입니다만, 폐하의 광막한 천심에 황공할 따름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고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한 가지, 폐하께서만 들어주실 수 있는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라.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의학을 정식 학문으로 내의원에 채용하게 해주십시오.”

     

    내 요청은 그것이었다.

     

     

    내 파벌을 제외하면 내의원 치유사 대부분은 아직 치유술에만 집중하고 있다.

     

    내의원에서 의학을 치유술과 같은 위상의 치료법으로 채용해 병행한다면 지금보다 치료의 질이 훨씬 올라가게 된다.

     

    황제가 의학을 공식으로 인정하면 제국 전체에 퍼지는 것도 금방이다.

     

    의료인이 늘면 그만큼 내 일은 줄어드니 시간도 널널해지고.

     

    나중에 내가 내의원에서 은퇴해 고향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해도 그만큼 손님의 풀이 넓어진다.

     

    돈도 돈이고, 업적도 쉽게 쌓게 될 테니 내겐 좋은 일뿐이다.

     

    “의학을 정식 학문으로 채용한다라.”

     

    생각해보면 쉬운 부탁은 아니다.

     

    이미 체계가 완전히 잡힌 내의원을 반쯤 뜯어고치게 되니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무엇보다 그 역시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제국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잘 알고 있겠지.

     

    황제의 입장에서는 의학을 오래 접하진 않았다 보니, 아직 검증하지 못한 부작용 등도 리스크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은 사소하다는 듯 순식간에 시원한 결정을 내렸다.

     

    “좋다. 앰브로시아, 공표를 준비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앰브로시아가 대답하고는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너, 일 좀 크게 벌렸구나?’하고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황공합니다.”

     

    공주의 상태를 조금 더 체크한 후, 나는 병실을 나섰다.

     

     

     

    다음 환자를 확인하려 한 층 위의 병실로 들어가니 우당탕 의자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고, 고트베르크 선생.”

     

    알베리치가 허겁지겁 내게 다가와서는 손을 덥썩 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태 자리를 지키며 아내를 간병한 모양이었다.

     

    “가, 감사하오. 감사하오… 내 이 빚은 반드시 갚겠소. 그동안 미안했소.”

     

    연신 허리를 굽신대니 조금 부담스럽네.

     

    “환자부터 보지요.”

     

    알베리치 부인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양다리 골절과 충격으로 인한 일부 내장 파열, 과다출혈 상태였다.

     

    피가 부족한 상태여서 그렇지, 수술 난이도로 따지면 완다 공주보다 쉬웠다.

     

    “고생하네, 클로에.”

     

    “어업… 야, 야근은 익숙해요….”

     

    마침 클로에가 담당이라 링거를 체크하던 참이었다.

     

    그녀도 오늘 많이 고생했지.

    수고한 의미로 어깨를 두드려주니 흐야악 하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산지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였다고 했죠. 마부나 전하들의 주치의는 경상이었다 하고.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그, 그렇소. 듣자 하니 좁은 외길에서 공주 전하들의 마부가 졸았던 모양이오. 번화가로 가는 지름길이라 통행량은 많은 곳이었소. 아내는 아마 시장을 보러 가다가…”

     

    알베리치가 입을 질끈 다물었다.

     

    “고트베르크 선생, 사죄드리고 싶소.”

     

    “뭐를요?”

     

    “나는 그간 그대의 의술을 무시하며 내의원에서 권력을 키우는 일만 생각했소. 환자에게 필요한 신기술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건만. 여태 눈이 멀어 있었소.”

     

    알베리치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대가 어리다고 무시하며 중요한 게 뭔지 잊고 있었소. 주치의로 온 이상 그대의 실력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어야 했거늘. 그간의 무례에 이렇게 사죄드리오…!”

     

    알베리치가 코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해왔다.

     

    나는 그에게 악감정을 가질 정도로 신경 쓰고 있진 않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시죠, 주교님.”

     

    “…으음.”

     

    그가 죄인처럼 내 앞에 섰다.

     

    “다른 건 어째도 좋습니다만 진료거부는 좀 어떨까 싶군요.”

     

    “…내가 눈이 멀었었지.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내의원의 규칙에 따르면 황족의 부상은 담당 주치의가 가장 먼저 진료해야만 하고, 그가 요청했을 때에 한해 다른 치유사가 맡을 수 있다.

     

    다만 이번처럼 비상시에는 반드시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원칙적으로 알베리치에게 공주를 치유할 의무는 없다. 그가 거부한 것도 내 요청이지 공주 주치의의 요청이 아니기에 책임 소재가 아주 크진 않다.

     

    뭐, 황제에게 추궁은 당하겠지. 문제가 없긴 했어도 중간에 수술을 방해하기도 했고.

     

    황제의 기분이 안 좋다면 몇 년 철창에 구금당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베리치는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건 권력욕이든 정치든 다 내려놓고 그저 아내를 걱정하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그럼 주교님.”

     

    내가 그에게 제안했다.

     

    “앞으로 제가 필요할 때 요청드리면 절대적으로 협력해주시겠습니까?”

     

    “무, 물론. 물론이오!”

     

    알베리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가장 강한 파벌인 헤이케의 주치의이기도 하고, 실력도 리비오를 제외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써먹을 곳은 많다.

     

    “주교님을 믿어보지요.”

     

    “믿어도 좋소. 여신님께 맹세하리다.”

     

    알베리치가 로자리오를 꺼내 들어 손에 힘을 꽉 줬다.

     

    “…으음, 하지만 치유술로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군.”

     

    알베리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원망스럽게 로자리오를 노려보았다.

     

    “실은… 어제부터 내 치유주문이 약해진 느낌이오.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신앙심이 약해지셨군요.”

     

    마법사로 치면 마력이 떨어져 고위계 마법을 못 쓰게 된 것이다.

     

    알베리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운 일이오. 하지만…”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평생 믿음을 바친 여신님께 조금은 배신당한 기분이오. 아무리 시험이라도 정도가 있지, 어찌 아내를 치유술로 못 고칠 정도로 만들어 놓으신단 말이오.”

     

    알베리치가 아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팔켄하인 경이 인정도 하였지. 선생님은 의술을 주로 쓰시면서도 신앙심이 아주 깊잖소이까.”

     

    “그렇죠.”

     

    “비결이 무엇이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치유술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그저 조금 신물이 났을 뿐이지요. 실제로 필요할 땐 쓰고 있고요.”

     

    “신물이 났다?”

     

    “그런 사정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의학이 퍼질 수 없도록 이용된 기술이라 거부감이 살짝 있어서일까요.”

     

    “치유술이 의학의 전파를 막았다? 그게 어떤 의미시오?”

     

    알베리치가 고개를 갸웃했다.

     

    “민간요법을 연구하고 검증하다 보면 의학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부 세력이 그럴 수 없도록 치유술만으로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상식을 퍼트렸습니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주교님에게는 조금 민감한 이야기인데 괜찮으십니까?”

     

    알베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의학은 아내의 목숨을 구했소. 지금은 나도 선생의 말을 믿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살짝 얘기해볼까.

     

    “법국이 건국되며 퍼진 상식입니다. 종교 국가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신앙심이 높은 쪽이 편하니까요.”

     

    “법국이 의학을 탄압했다?”

     

    “예. 이미 민간요법이 미개하다는 사상이 대륙에 퍼진 지도 수백 년이 넘었습니다. 덕분에 법국은 그간 대륙에서 강국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요.”

     

    현재는 황제가 일으킨 정복전쟁에서 승리해서 제국이 갑인 위치다.

     

    “주교인 나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구려… 허나 분명 일리가 있소.”

     

    “추기경이 되셨다면 듣게 되셨을걸요?”

     

    “허어. 어쩐지 제국으로의 망명을 법국 상층부에서 권유하던 느낌이었소. 나는 치유술을 퍼트리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나.”

     

    알베리치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어찌 그 모든 사실을 아시오?”

     

    반복하면서 공략법을 찾느라 이런저런 정보를 열심히 파고들었으니까 그랬지.

     

    “스승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스승님이 계시오?”

     

    “예. 의학의 명맥을 이어 발전시킨 분입니다. 몇백 년을 살며 직접 두 눈으로 역사를 봐오셨습니다.”

     

    우선은 이렇게 둘러두면 신빙성은 생길 터였다.

     

    빙의에 관한 사실은 당연히 말도 안 되고, 이제 갓 성인이 된 내가 의학을 개발한 것도 어불성설이니까.

     

    실제로 내게 스승이야 수도 없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윌리엄 오슬러. 루돌프 피르호도 있고.

     

    위대한 의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다.

     

    “그, 그건 더욱 신기하군. 여신님을 믿는 법국에 호감은 없으실 것인데, 어찌 신앙심을 강하게 유지하시오?”

     

    “아, 그것도 간단합니다. 저는 여신이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무, 무엇이라고?! 그게 진심이오?!”

     

    알베리치가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치유 주문을 쓰며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을 고치는 주문인데도 인간성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요. 마치 공장에서 인형을 수리하는 것 같잖습니까.”

     

    “화, 확실히… 과정이 조금 난폭하긴 하외다. 나는 그것이 여신님이 기적을 대가로 내린 시련이라 생각하였소만….”

     

    “실제로 여신이 저희를 굽어살피는 존재라면 굳이 통증을 더 줄 필요가 있을까요. 저희가 익히 생각하는 여신은 없고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치유술을 관장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믿음입니다.”

     

    어디까지나 믿음이에요. 내가 덧붙였다.

     

    거하게 빨간약을 먹어버린 알베리치는 충격에 동공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실제로 경험해서 그런지 납득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말 그렇다면… 여신님의 부재를 믿는 선생님의 신앙심이 높은 것도 말이 되는군.”

     

    “뭐, 안 그래도 바쁜데 쓸모없는 진실을 탐구할 여유는 없습니다. 치유술이든 의학이든 환자를 고칠 수 있다면 적절하게 쓸 뿐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그게 치유사인 우리의 의무겠지.”

     

    알베리치가 내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후, 내의원에 출근하니 클로에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아, 선생님! 어제 밤중에 완다 전하께서 정신이 드셨어요. 알베리치 부인도 경과는 순조로워요.”

     

    “그 상태면 머지않아 퇴원할 수 있겠지. 회진 돌러 가자.”

     

    “이, 일성궁에서 맡은 게다 전하도 비슷하게 눈을 뜨셨다고 하는데요.”

     

    쌍둥이라 그런지 두 환자가 회복되는 시기도 비슷했다.

     

    그쪽은 리비오가 담당이니 내가 체크할 권한은 없다.

     

    “잘됐네.”

     

    “저, 그, 그런데 소문이 하나 있어서요.”

     

    “소문이라니?”

     

    클로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게다 전하께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으셨다고 해요.”

     

    “후유증이라니, 어떤?”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억상실이요.”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