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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0

        

         “짐승도 사냥할 때는 머리를 쓴다는데 이것들은…!”

         

         꺅꺅. 아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전력으로 무법자 패거리들을 씹어 대느라 바쁜 로잘린을, 조심스럽게 복도 분위기를 염탐하던 아시프가 만류했다.

         

         “반대로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돌아가는 사람도 없지. 그런데… 저것들의 장비가 좋은 건지, 특출난 개조 인간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활동비 아낀다고 구형 기차를 고르는 게 아니었어. …이크!”

         

         “씨발,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냥 방 안에 좀 처박혀 있으라고!! 손톱깎이만 꺼내도 맞서 싸우려는 걸로 알고 사살한다! 엉!!”

         

         천장을 향해 위협적으로 총알을 한두 발씩 발포하는 놈들이 떼거지로 지나가는 걸 본 그가 잽싸게 머리를 다시 집어넣었다.

         

         간략한 관찰이었지만 무리의 분위기는 차고 넘치게 읽어냈다.

         

         강도질치고는 순조로운 걸 넘어 더할 나위 없는 스타트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라고는 일절 없이 무언가에 쫓기듯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행여나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올까 경계하는 목소리.

         

         원한 목적이 아닌 생계형 강도질이야 흔하디 흔하다지만 그게 스케일이 커지면 따라야 할 규칙(Rule)도 있는 법이거늘.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확인해볼 게 생겼다.

         

         “로잘린. 지금 여기서 통신이 닿는 도시나 사업체 지부가 있나?”

         

         “네? 통신이야… 하베스트 플래닛 외부 기지국 끝자락에도 아직 걸쳐 있고, 철도공사 지부도 연결망에 멀쩡하게 보이는…… 아.”

         

         자신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낸 그녀가 세상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하고 질문을 던진 아시프 또한 얼굴을 구긴 건 매한가지.

         

         이런 외딴 곳에서 기업 소유물을 털어가려 들 정신머리와 배짱은 있으면서. 기초나 다름없는 전파 차단 대신 속전속결을 고르다니, 그야말로 뒤 없는 도적이나 할 법한 겁 없는 발상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하루살이도 이것보단 조심성이 넘쳐요! 진짜 초광역 전산망이 없던 시대 사람도 이렇게 미개하진 않을 텐데…!”

         

         “그만큼 절박했던가, 욕심을 주체하지 못했던가. 뭐, 어느 쪽이든 파국이군.”

         

         노상강도와 일급 수배자, 황무지 잡범과 저항군 특무부대원.

         어찌 보면 저들의 대선배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이브 아이즈 소속 두 명이 못나고 막돼먹은 후배들을 보며 낙제점을 매겼다.

         

         거기서도 차이점을 찾으라면, 로잘린은 곧 신고를 받고 달려올 증원 병력에 놈들은 박살이 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여겼지만. 아시프는 그 ‘과정’에서 일어날 난장판을 직감했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차량 구조를 좀 확인해주겠나? 이 구형 기차에 적재함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대략적인 승객명단도.”

         

         “?”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녀의 머리와 손은 부탁받은 대로 충실하게 탑승객 목록과 아스트라 익스프레스 기차 모델의 모식도(사물이나 구조물을 입체적 표현한 그림)을 불러왔다.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란과 비명이 평정을 거슬렀으나 그는 일단 로잘린이 보여주는 청사진을 확인하는데 집중했다.

         

         앞과 뒤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는 대형 화물칸.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일반칸들.

         

         앞쪽은 그나마 괜찮다. 승객도 별로 없었고, 놈들도 발목 붙잡히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터라 알아서 괜한 싸움은 자제할 테니까.

         게다가… 거기서 더 넘어가는 순간, ‘그 아가씨’와 자기 팔을 잡아먹은 도깨비가 튀어나올 테니 구태여 걱정할 필요도 없이 자멸할 수도 있을 테고.

         

         …반면 뒤칸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도시 출신 사람 중에, 갱단이 얌전히 기업 물건만 훔쳐 나간다 하면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심 응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객과 갱단 피차 모두가 불편해질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 어떨까.

         

         화물칸에 인접한 건 하필 사람이 가득 들어찬 입석 객실.

         강도들이 물건을 빼돌리려면 필연적으로 그곳을 점거한 채 계속 왕복해야 하고, 입석 승객들은 상품 상자 사이에 섞여 있을 자기 짐이 털리는 걸 눈뜨고 구경해야 하니.

         

         굉장히 난처한 대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 충돌로 번지리라는 건, 지금 막 기차 내부를 울리는 악에 받친 외침이 아주 확실하게 보증해주었다.

         

         탕!!

         

         “이 귀머거리 병신들이…! 총 가진 새끼는 바닥에 던져 놓고! 없는 새끼는 두 손 들고 벽에 붙으라니까?!”

         

         “그럼 씨~팔 니들이 쏴 죽이기 좋게 우리가 예이~ 하고 따라야 하냐??? 혹시 애미가 니 어릴 때 임플란트 깔아줘야 할 쌈짓돈으로 남자 사 먹으러 갔었냐?!”

         

         “…산 채로 모가지를 뽑아주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그것 뒤잇는 쌍소리.

         거진 백 명 가까이 되는 불특정 다수가 내는 소음으로 공기가 진동했다.

         

         ……어째 좁아 터진 공간에서 다른 승객이랑 부대끼느라 독이 바짝 오른 일반 시민이 더 화가 많아 보였지만 아무튼.

         

         이대로 마냥 구경하다간 애꿎은 사람들의 피가 잔뜩 흐르겠다는 판단이 선 아시프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서 남은 무장을 장비하기 시작했다.

         

         “하아… 기업 일 대신해주는 건 좀 별로인데요….”

         

         “…내키지 않으면 쉬고 있어도 된다. 나도 적당히 괴롭히다가 시간보고 알아서 물러날 테니.”

         

         “…….”

         

         왜 사람 좋은 아나스타샤를 보고 기시감이 느껴졌나 했더니, 리더인 아시프도 은근히 잔정이 많은 타입이었다는 게 뒤늦게 로잘린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래도 그녀의 고민은 짧았다.

         

         이 꿀꿀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뭉개고 있어봐야 따로 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시프를 도우면서 사람들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겸사겸사 살짝 떨어진 자존감도 좀 회복하고.

         

         “…카메라 영상 데이터랑 전장 모식도 계속 사이버웨어로 보내서 업데이트해줄 테니까, 버릇대로 CCTV 부수지 마요!”

         

         “그건 고맙군…!”

         

         콰드득!!

         

         맹렬한 기세로 튀어나간 그가 멍청하게 화물칸 방면만 신경 쓰느라 뒤통수를 내보이고 있던 도적의 머리를 쪼개 버린 걸 기점으로 로잘린의 싸움 또한 막을 올렸다.

         

         

         

         

         “후방 60도! 20mm 유탄 장전하는 놈 얼핏 보였어요!”

         “시간은… 이제 11분 지났으니, 아직도 숨겨둔 게 있다면 슬슬….”

         “아니, 그보다도 리더!! 손이 모자라서 대응하기 힘들면 함부로 깊이 들어가지 좀 마요!!”

         

         후방 오퍼레이터는 전장을 모른다고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그건 한번도 제대로 된 백업을 못 받아본 풋내기의 투정이리라.

         

         아시프는 이젠 거의 눈을 감고 싸우고 있었다.

         

         뭔가에 도가 튼 사람은 눈을 감아도 그게 여전히 아른거린다고 하지 않나?

         

         시간차(Time Lag)가 거의 전무한 수준으로 꾸준히 제공되는 위상 데이터는 천장에 눈이 달린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주었기에, 이와 같은 난전 상황에서는 한정된 시야보다 로잘린이 건네 주는 가공 자료를 신뢰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갱단 소속이냐!! 밥그릇 싸움이라면 일단 물건을 옮겨 놓고 나중에…!”

         

         “총은 집어넣고 물건만 훔치던가, 그게 싫으면 다 포기하고 물러나면 되네만.”

         

         “무슨 개소리야 그게!!”

         

         타당!!

         

         “잘 한다! 우리 리더!!”

         

         현직 저항군으로부터 해괴한 제안을 받은 두목에게서 절규와 총성이 같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래 봤자 당사자는 더 친절하게 대해줄 생각이 없었기에 협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기습 시, 유별난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측되었던 적들은 이미 격침.

         변수를 용납할 마음 따위는 없는 아시프에 의해 일찌감치 제거되었으니.

         

         결국 로잘린이 관제 시스템에 연결된 지형지물을 유동적으로 조정하고, 적들의 장비나 예상되는 탄환의 경로를 계산해서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전황을 완벽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미련이 남았는지, 입석칸 승객들이 죽을 힘을 다해 사수하고 있는 출입문을 간간이 견제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퇴로를 막은 아시프에게 화력을 집중할 게 뻔했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저들 중 누구도 개빡친 국경 수비대나 기업 정예병과 면담을 나누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잡아 씨발! 앞으로 갔던 새끼들도 불러다 덮치라 해!!”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된다는 게 뭔 씹소리야?!”

         

         “흐흥♪”

         

         노트북에서 터져 나오는 혼란과 비교되게, 기분 좋은 콧소리가 오뚝한 콧날을 타고 흘러나왔다.

         본인에게 자각조차 없는 걸 보면 새어 나왔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지간에.

         

         상상 이상의 난적-아나스타샤-으로 인해 고작 임무 한 개가 꼬였었던 것뿐인데,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던 속이 조금은 풀어졌다.

         

         비록 상대 측에 대응할 해커조차 없어서 공평한 싸움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 배 넘게 차이 나던 인원수의 불리함을 자신의 조력으로 뒤집었다 생각하면 누구라도 어깨가 으쓱해질 것이다.

         

         이제 당황한 적들이 탈출을 시도하고, 그에 맞춰 아시프도 안전하게 퇴각하면 끝.

         

         즉흥적이었던 것치고는 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긴장을 푼 순간,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로잘린이 홀로 지키던 객실로 굴러들어왔다.

         

         우당탕…!

         

         “…에?”

         

         입실과 동시에 문이 다시 닫히고, 땀투성이 남자와 막 기지개를 펴던 로잘린의 시선이 교차했다.

         

         대체 어디서? 리더가 보이는 족족 해치우면서 넘어가지 않았나?

         

         그야 복도와 객실을 나누는 건 잠금 장치 하나 없는 미닫이문 밖에 없었으니,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위치임은 틀림없었지만… 딱 여기로 들어온다고?

         

         다급한 눈길로 호신용품이 담긴 가방을 흘겨보았지만… 손이 닿을 거리조차 아닌 데다가 남자의 대처가 한발 빨랐다.

         

         “씨벌…!”

         “으븝?!”

         

         확! 하고 날아든 억센 손아귀가 그녀의 입가를 틀어막았다.

         당연히 총격을 가할 줄 알고 들고 있던 노트북으로 급소를 가린 채 몸을 움츠린 게 실수였다.

         

         하다못해 눈으로 계속 행동을 관찰하기만 했어도 최소한의 반항쯤은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텐데.

         

         ‘더러워…! 저리 치워!!’

         

         씻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찌든 땀내와 악취가 로잘린의 코를 괴롭혔다.

         

         날카롭게 세워진 손톱으로 할퀴어 보려고 했지만, 사막을 활동지역으로 삼은 범죄자답게 피부를 꽁꽁 감춰 놔서 별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괜히 서투르게 자극해서 화만 돋워버렸다.

         

         빡!!

         

         “긋?!”

         

        복부에 꽂힌 주먹질로 인해 로잘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반사적으로 벌어진 턱이 벌벌 떨렸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풍선에서 공기가 조금씩 새는 것 마냥 헛바람 드나드는 소리만 나올 뿐, 문장은커녕 단어조차 이루지 못한 채 가라앉았다.

         

         보통 손바닥으로 얼굴-뺨-을 때리는 것부터 개시하지 않나?

         철저하게 소리내는 걸 막고, 자꾸 복도 쪽을 흘끔거리는 게… 역시 이변을 알아챈 아시프가 달려올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

         

         일단은 협조하자. 대충 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끌면 해결되겠지.

         

         죽어버린 후각과 배려 없는 손찌검 탓에 찢어질 것처럼 아픈 배와 하관을 애써 무시하고, 그녀는 뻗어진 팔을 톡톡 건드려서 주의를 끌었다. 죽일 생각이 없다면 대화로 풀어나가자는 뜻을 담아.

         

         “…쓰읍.”

         

         냉정한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허나 애석하게도 이 남자는 뭔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로잘린을 찾아온 게 아니라, 그저 현실에 강림한 기계 공포증의 화신 같은 존재에게서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우연히 마주친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공포에서 피신하니 마침 들어온 방에 꽤 괜찮은, 마음이 동하는 미인이 있었다는 것.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간다. 과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 때문에 충혈된 남자의 눈가에 핏발이 추가되었다.

         

         ‘미친…!!’

         

         생존본능이 다른 본능으로 대체된 원숭이 마냥, 갑자기 차오르는 음심을 직관해버린 그녀의 전신이 요동쳤다.

         

         솜털이 쭈뼛 서고 대화로 풀어나갈 마음은 싹 사라졌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뭣 같은 몸의 대화라는 게 뻔히 보이는데 협조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또 무작정 반항을 하기엔… 이미 한 번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타개책이 없으면 참는 게 맞다. 맞는데….

         

         스륵… 스르륵….

         

         “!! ……!”

         

         소리 없는 비명, 올바른 선택이라고 항상 납득 가는 길은 아닌 법이다.

         

         옷자락 밑으로 파고드는 남자의 손길에 로잘린의 머릿속과 뱃속이 동시에 뒤집어졌다.

         위기상황을 겪어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적어도 적대 조직이나 목적이 명확한 기업의 사냥개 상대였지 이런 더럽고 천박한 짐승과의 접촉이 아니었다.

         

         매끈한 허벅지를 더듬거리던 장갑-이미 손이라는 생각조차 지워버렸다-이 위쪽, 상의를 들추고 고지를 찾아 헤맸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못 맡아본 여자의 향기를 갈구하는듯 킁킁거리는 얼굴이 시시각각 접근.

         

         ‘절대 싫어!!’

         

         입을 틀어막은 손을 그대로 단 채로, 간신히 반대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적들의 작전 시한, 증원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지? 10분…? 20분…?

         그럼 그동안 계속 이 치욕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점점 행위가 에스컬레이트해 갈 게 뻔하니 어쩌면….

         

         “후으… 후우욱…?!”

         ‘제발 그만…!’

         

         마약을 흡입하는 것처럼 연신 코를 벌름거리던 남자, 괜히 입으로 숨을 쉬다간 불결한 장갑과 입술이 맞닿을라 후각을 단념한 로잘린. 두 명의 후각 세포에, 그리고 객실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똑똑.

         

         작은 노크.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그러나 남자가 놀라서 인질에게 실수를 하지 않도록 천천히.

         

         “…거기 형씨? 미안하지만 임시 보호자로서, 동의 없는 유사 성행위는 내가 용서해주기 정말 힘들거든?”

         

         좌우로 빈 손을 들어 보인 검은 천사가 방문해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험한 일을 많이 겪었는지 땀과 피, 먼지투성이인 얼굴은 지저분하게 보일 법도 한데 흠조차 되지 못하게 아름다웠다.

         게다가 남자의 경우엔 악취의 증폭제로 작용하던 땀은 그녀의 야릇한 체취를 한층 더 강조하는 게 누가 맡더라도 고혹적이었다.

         

         가히 지독한 마약이다. 아니, 미약이나 흥분제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사라져주면… 진짜 만 번 양보해서 내가 안 해칠게. 어때…?”

         

         당차지만 어딘가 무구한 말투도, 약간 붉어진 안색도,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도.

         하나하나가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는 조미료나 마찬가지였다.

         

         “…….”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남자가 멍하니 일어섰다.

         ‘안 해친다’는 조건은 그의 중추 신경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애당초 주머니칼 하나 없이 무방비하게 펼쳐진 양손이 순종을 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건 저항이 거센 붉은 여자 대신, 자신의 몸을 먹기 좋게 내민 것이다. 틀림없다.

         

         풀썩.

         

         “……뭐여.”

         

         요구받은 대로 순순히 꺼져주나 싶어서 문가에서 물러난 아나스타샤의 가슴팍에 남자의 얼굴이 파묻혔다.

         뇌정지가 온 상태로. 자신의 요구사항 중에 이딴 오해를 할 여지가 있었는지, 로잘린에게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가?”

         

         부연설명은 따로 필요 없었다.

         등과 허리춤을 더듬어오는 천박한 손놀림에 그냥 유죄도 아니고, 특수 폭행 급 유죄가 방금 막 선고되었으니까.

         

         싸울 의지는 없다는 걸 표현하던 두 손이 부드럽게 남자의 머리를 감쌌다.

         

         온기를 만끽할 틈 따위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신이 내린 형벌이 썩어빠진 정신과 영혼을 불태우듯, 허공에서 피어난 극소 전자기 폭풍이 몹쓸 대가리를 지져버렸으니.

         

         파지지지지직—!!

         

         “!!”

         

         “…꼴 좋네요!”

         

         원리는커녕 방법조차 알 수 없어도 아까 전 자신처럼 언어가 되지 못한 비명을 남자가 지르는 걸 확인한 로잘린이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

         

         방전하는 상태로 몇 초나 지났을까.

         곤두선 기름범벅 머리카락이 배배 꼬이고, 의식을 잃어버린 남자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힐 때쯤 배터리-열량-이 바닥을 친 아나스타샤가 항복을 선언했다.

         

         “…에이씨.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어도 이건 힘들겠네.”

         

         찌릿찌릿거리는 슈트 소맷자락을 거칠게 털어낸 후, 그녀는 늘어진 남자의 몸뚱이를 복도 쪽으로 밀어버렸다.

         

         “안 보이는 곳에 끌고가서 정리해버려.”

         “…….”

         

         불쑥 튀어나온 강철 팔이 쓰러진 변태의 멱살을 붙잡아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치웠다.

         아나스타샤의 정리는 몰라도, 저 드로이드가 정리한다면 아마 다시는 놈을 볼일이 없으리란 걸 직감한 로잘린은 상기되었던 정신을 최선을 다해 다잡았다.

         

         방금은 명백히 구해졌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음이 분명하거늘.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은 순수한 호의를 베풀어 로잘린 세리노를 살려주었다.

         

         잔뜩 고뇌하고, 잔뜩 헷갈리게 만들어 놓고. 공들여서 준비한 작전은 시원하게 망쳐버렸으면서 또 막상 그녀 본인이 위험해지자 아무런 망설임없이 등장해서 도움을 준다.

         

         “저기…… 로잘린? 괜찮아…?”

         

         머뭇거리면서 건네진 물음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기술, 의지, 개인적인 시각에서는 용모까지. 어느 면에서도 자신보다 한참 윗줄임을 과시했으면서 보살피기도 해주겠다니.

         

         구타하는 남자에겐 겨우 미흡한 몸부림이나 친 주제에, 치솟는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한 로잘린이 은인에게 대들었다.

         

         “뭐냐고요 대체…! 아군도, 적도 아니라면서 계속 착각하게 만들기는!”

         

         “…….”

         

         강간 미수에 대한 정신적 충격보다도 주변을 맴도는 자신이 더 거슬렸다니?

         내심 받은 충격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로잘린의 프로필에 까칠함 주의까지 메모한 아나스타샤는 고심 끝에 궤변을 늘어놓았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하라는 말도 몰라? 그럼 친구이면서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과는 더더욱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

         

         이게 과연 그녀를 설득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론-기업-과의 밀월 관계를 파이브 아이즈 소속에게 변명하는 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푸흡.”

         

         로잘린 세리노는, 그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설을 듣고 마침내 마음속 깊은 곳부터 승복했다는 것이다.

         

         오연하게 말하는 폼이나, 자꾸 상대방을 기특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시선은 경쟁자가 그럴 만한 인물이라고 인정해버리니 더는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경 써주는 정체불명의 선배가 세상에 한 명쯤 있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겠다는 시시한 생각도 들었고.

         

         팔로 눈가를 슥슥 비벼 창피한 물기를 지워낸 그녀는 더없이 공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언니.”

         

         “에휴, 그래….”

         

         디도스 공격 때도 그렇고, 채팅 채널에서도 그랬고. 온갖 해괴망측한 욕은 다 퍼부은 데다가 마주친 직후에는 악마라며 기겁했던 과거가 떠오른 로잘린이 겸연쩍게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짧은 정적이 지나가고.

         그녀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아나스타샤는 참아왔던 질문을 쏟아냈다.

         

         “그래서!! 아시프 이 인간은 어디 갔고, 저 뒤에서 미친듯이 울리는 총소리는 뭐야! 가는 곳마다 말썽을 준비해서 날 스트레스로 앓아눕게 만들려는 거야?!”

         

         “…….”

         

         붉은 소녀는 한 가지 배웠다.

         아, 세상에서 가장 알쏭달쏭하고 누구보다 시기를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도. 모르는 일은 모른다는 것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무구한 말투 : 행여 흥분한 범인에 의해 로잘린이 다칠까 봐 열심히 표현을 순화함.
    붉어진 안색 : 진짜 개빡침.
    떨리는 목소리 : 존나 개빡침2.

    해석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는 아무리 들어도 고전 속담인데. 실은 영화 대부의 대사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문화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까요.

    일단 내일 병원에 가야할지도 모른다기에, 지각을 감수하고 아예 내일치 연재분까지 몰아써서 합쳐버렸습니다. 부디 재밌으셨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익명을 희망하는 독자분이 잘 읽고 계시다는 의미로 50코인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꺄악,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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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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