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 이런 꼴을 하고 살아있을 리는 없으니.”
초재생 능력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면 단전도 깨지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지.
나는 숨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흑영문주를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마교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고 싶었는데.
원작에서도 마교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던 만큼, 흑영문주를 깔끔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면 꽤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끄나풀이라 내부 정보를 얻기는 힘들긴 했겠지만…
“위 대협. 정리가 끝났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위 대협이 힘을 다 빼놓은 덕에 찰과상을 입은 몇 명 빼고는 멀쩡합니다.”
뭘 그리 존경의 눈빛으로 보나. 나는 낯 뜨거운 남정네의 눈길을 슬쩍 피하며 바닥에 떨어진 삿갓을 주웠다. 싸우기 직전에 내다 버린 삿갓이었다.
…그냥 하나 새로 사야겠네. 구멍이 나서 더 쓸 수가 없잖아.
나는 흑영문주의 얼굴에 망가진 삿갓을 덮어놓았다.
저런 끔찍한 몰골을 계속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저승 가는 놈 흉한 모습으로 가느니 삿갓으로 적당히 가리고 가란 뜻이기도 했다.
“후.”
이제 슬슬 일을 해볼까.
“이보시오. 다들 저놈들이 도망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잘 감시해주시오. 나는 저택 안을 뒤져볼 테니.”
“저희도 돕겠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무사 둘 정도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나머지는 심문을 진행해 주십시오. 이번 일의 전모를 밝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명은 세가로 보내 일이 잘 해결되었다 전해주시지요.”
“이미 세가로 사람을 보내놓았으니 얼마 되지 않아 올 것입니다.”
그럼 내가 신경 쓸 건 없겠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구멍을 내놓은 전각을 바라보았다. 뒤져 보려면 밤을 꼴딱 새워야 겠지만, 저 안에 값진 금은보화와 비급 같은 게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입에 절로 군침이 고였다.
그럼 가 볼까.
나는 거침없이 전각 안으로 발을 들였다.
———————–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니네. 남의 일에 팔 거들고 나와주는 게 어찌해야 할 일이겠나. 자네는 큰일을 한 걸세.”
강 가주가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옆에 서 있는 구 가주도 눈시울이 붉어진 상황. 두 노인네의 눈물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심문은 잘 끝나셨습니까?”
“많은 정보를 들었네. 저놈들이 오래전부터 우리 세가를 이이제이의 계책으로 양패구상하게 만들고, 이 도시를 장악하려는 속셈 말일세.”
“간 큰 놈들입니다.”
가주의 말대로, 일개 중소 문파가 저지를 수 있는 규모의 짓이 아니었지.
문도가 백 명 남짓인 작은 문파가 소도시라도 어떻게 이런 곳을 지배할 생각을 하겠어?
여기엔 반쯤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관도 있고, 두 세가 전력만 해도 이런 문파 따위는 반나절 안에 갈아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러니 당연히 뒷배가 있다고 예상할 수밖에 없었고, 흑영문주의 내공을 보고 마교가 뒷배라는 사실을 눈치챈 거지.
…마교가 왜 이런 일에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택 내부에서도 관련 정보는 싸그리 소각했는지 나온 게 없었고.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무림맹과 가까운 이 도시에서 몰래 마교 지부를 만들어놓고 전쟁이 벌어지면 무림맹을 기습할 생각 아니었을까.
예로부터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기습은 효과적인 법이니까. 만약 정파가 원정을 나간다면 이 도시를 지나는 길이 쉽고 편하다는 점도 있겠지.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무림맹 무사들은 높은 확률로 이 도시를 지나쳐 갈 테고, 이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 기습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게 눈에 선했다.
자기 영역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으면 쉽게 와해될 테니.
무림인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단체 행동에 약하니 더더욱 그럴 터.
그런 의미에서 이번 건수는 뜻하지 않은 횡재라고 볼 수 있었다.
내부의 폭탄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까.
적어도 원작처럼 무력하게 무림맹이 패전만 반복하다 주인공 해줘 상태가 되진 않겠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급완결을 나버린 원작이 제일 문제겠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편의주의적 전개와 설정 변경이 난무하는 작품이었으니. 그래도 지금은 현실이니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조연 이름도 까먹어서 수십화 만에 등장했더니 이름이 바뀌는 걸 현실에서 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아무튼,
“흑영문의 전각을 전부 뒤져보았으나, 마교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흔적을 지운 모양입니다. 한밤중의 기습이라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쓸데없이 철저해가지고.
하긴 그러니까 막판에 무림을 거의 다 먹었지.
“허어. 아쉬운 일이로군.”
“나온 것은 그들이 양민들로부터 갈취해간 돈부터 각종 병장기, 흑영문의 비급으로 추정되는 것 뿐입니다.”
“추정이라?”
“추정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나는 품속에서 비급을 꺼냈다.
“혹시 몰라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적힌 게 마공이라면 읽어봐야 좋은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가주님들께 부탁드리자면, 이 비급을 무림맹에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좀 읽어보긴 했는데 영양가는 별로 없더라.
“알았네.”
“믿음직한 무사를 시켜 무림맹에 전달토록 하겠네.”
“이 문제는 그럼 끝입니다만…흑영문의 재산은 시장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꺼림칙한 재산에 욕심내는 것도 그렇거니와, 빼앗긴 것은 빼앗긴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순리 아니겠습니까?”
“자네, 대단하군. 이렇게 욕심 하나 없을 줄이야!”
“내가 딸만 있었다면…”
가주들의 흠모하는 눈빛이 내 온몸을 촉촉하게 적셔댔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호감도가 꽉 차서 더 이상 올릴 데가 없을 지경이 되지 않을까.
“이 일은 가주님들께 맡기겠습니다.”
“알았네. 내 이름을 걸고 이 일은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도록 하겠네.”
“나도 이름을 걸고 일을 처리하겠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좋구만.
역시 이래서 사람은 명성을 쌓아야 한다니까.
일개 무명소졸이 말하는 거랑 이름값있는 사람이 말하는 건 설득력이 천지 차이니.
“가능하면 두 세가도 이참에 화해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화해라니..”
내 말에 두 가주가 서로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오랜 앙숙끼리 화해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두 세가가 반목하는 이상 그 틈을 파고들 놈들은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이참에 확실하게 정해둘 건 정해두고 화합을 하는 게 나을 터.
“…강 가주. 이렇게 된 이상 한번 해 봅세.”
“끙, 구 가주. 자네랑 이렇게 화해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이쪽은 끝났고.
그럼 이제 보상받고 이곳을 뜨면 되는 건가.
“그리고, 보상 말입니다만…”
————————-
“아저씨, 그런데 그렇게 조금만 받아도 돼요?”
“혜령아, 이 금괴가 애들 장난으로 보이니?”
금괴만 열 개야 열 개. 물론 가주들이 주겠다는 보상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많은 돈을 들고 다녀봐야 무슨 의미야.
내가 청렴한 인간은 아니지만, 돈이 너무 많아 봐야 의미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고.
“그래도 아저씨가 한 일에 비하면…”
“영약도 세 개 받았잖아.”
“하지만 저한테 하나 주셨잖아요!”
“저한테도 말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도…”
혜령이와 목경이가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까지 쳐다볼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신경 쓰지 마라. 너희들이 강해져야 나도 편하니까.”
나 혼자 강해져 봐야 의미가 없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내 옆을 지켜줄 동료.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혜령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먹어.”
혜령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목경이도 부담 갖지 말고 먹어. 복수하려면 강해져야지. 초절정의 벽을 넘으려면 그만한 영약 열 개 정도는 입에 집어넣어야 할 텐데.”
복수 이야기를 꺼내자, 목경이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끝난 거다? 갑자기 안되겠다느니 하는 소리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장례식 행렬을 지켜보았다.
강씨세가와 구씨세가의 공자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단체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신기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법한 장면이었으니까.
“…일이 잘 해결되서 다행이네.”
흑영문은 멸문당했고, 흑영문도는 무림맹으로 가서 심문당할 예정, 흑영문주는 저잣거리에 사지와 머리가 찢겨 걸렸고, 도망친 의원은 살인멸구를 당한 건지 건물 뒤쪽 우물 속에서 시체를 발견.
명희라는 여자는 일이 틀어진 걸 눈치채고 도망치려다 목경이에게 잡혀서 잡혀 왔고…
깔끔하네.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나는 으레 상투적인 말을 내뱉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첫 만남이 영 좋진 못했지만, 죽은 사람한테 나쁜 말을 할 필요는 없지.
나는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장례 행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당이 가깝다…
길고 긴 에피소드가 드디어 끝!
이번 에피소드는 괜찮았는지 모르겠네용.
사실 그냥 무당으로 바로 가버릴까 고민하다 안 빼고 넣은 거라 흠흠…
표지는 오늘 중에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럼…아디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