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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1

       목욕물이 적당한 온도로 맞춰졌다. 

       

       나는 머리를 타올로 묶어 올렸다. 머리 긴 여자들이 세신을 할 때 이러고 들어가더라.

        

       그래서 따라 해 봤는데…. 음, 나쁘지 않아.

        

       영지에서 돌아온 직후의 내 몸은 완전 엉망이었다. 좁고 꿉꿉한 공간에서 2주간 요호들과 지낸 탓이었다. 찝찝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당연히 목욕은 필수였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들어와도 돼.”

        

        달랑 수건 한 장 걸친 몸이었다. 욕탕 바닥에 앉은 로테를 보자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목소리에 약간의 불평을 섞어가며 물었다.

         

        “정말 같이 씻어야만 해?”

       “물세 아깝잖아.”

        

       로테가 픽 웃었다. 절약 정신 봐라.

        

       “그리고 너와 천천히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서. 그야 오랜만에 만났잖아? 회포 정도는 일찍 풀어야지.”

        

       로테가 당돌하게 말하며 욕조에 발을 담갔다. 나 또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천천히 입수했다.

        

        “근데 여기 들어오기 전에 백작님 집무실은 왜 들어간 거야?”

        “아, 잠깐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었어.”

        “흐음.”

         

        우리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건너편을 곁눈질하자 증기가 올라오는 물 아래로 희미한 실루엣이 보인다. 물 너머로도 친구의 유려한 각선미는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머리의 수건을 슬쩍 내려 스스로 시야를 차단했다.

       

        “갑자기 뭐 해?”

        “번뇌 퇴산.”

        

        이런 일을 하는 나 스스로의 저의가 뭘까.

         

        정신이 남자라서 이러는 것이라는 건 구차한 변명이다. 이 몸으로 지낸 게 몇 년인데. 인제 와서 여성의 나신을 본다고 당황할 정도로 나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성인 아닌가. 알 거 다 아는 나이인데 뭐. 그러니 이건 단순한 예의범절, 즉 매너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건 조금 더 원초적인 감정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나는 여태 살면서 누군가와 목욕해 본 적이 없었다. 공중목욕탕은 물론이고, 가족과 같이 씻은 경험도 전무했다.

         

        그랬던 탓에 타인에게 몸을 드러내는 것이 영 불편했다. 굳이 나누자면, 그래. 어색하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어쨌건 이런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나는 메이드에게 긴 수건을 하나 빌려 몸을 가렸다.

         

       이렇게 흰 수건을 몸에 돌돌 말아서 윗가슴부터 모음근까지 가리면 그나마 심신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입까지 잠기도록 욕조에 입을 묻으며 보글보글 거품을 냈다.

        

       졸졸졸.

        

       사자처럼 생긴 동상의 아가리에서 뜨듯한 물이 쏟아져 나온다. 귀족 저택이라 그런지 욕실의 스케일도 남다르다. 일반 가정집에서 보이는 보급형 욕조와는 너비의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허공을 바라보며 멍이나 때리고 있자, 로테가 바구니에서 입욕제를 꺼내 풀었다. 

        

       “우리 집에서 만든 거야. 목질화하지 않은 로즈마리 가지를 꺾어다가 식초와 함께 잘 묵혀두면 나름 괜찮은 향을 내거든.”

       “괜찮네.”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민트나 자스민 같은 재료도 섞은 모양이다.

        

       입욕제 푸는 걸 마친 로테는 옆머리를 넘기며 발을 앞으로 쭉 내빼었다. 나와 ‘진중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몸짓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수인국에 가 있는 동안 잘 지냈어?”

       “음, 그럭저럭.”

       “거기서 뭐 하고 왔는데 오래 걸린 거야?”

        

       사실대로 대답하기엔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정직한 친구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껄끄러운데.

        

        이럴 때마다 쓰면 좋은 방법이 있다. 이른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전략이다.

        

       “수인족 사는 곳에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가 있었거든. 잘 살아는 있나 잠깐 만나 보려고 했지.”

        

       그 친구가 프레이라는 건 비밀이다. 꼬맹이의 정체는 최소한의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한다.

         

        “원래는 친구도 만나고, 그 근처에서 장 보고 들어올 생각이었어. 왜, 수인들이 파는 유명한 마력초 브랜드 있잖아”

        “그렇구나. 그러면 저번에 얘기한 고향 얘기는 뭐야?”

       “응?”

       “피치블렌드 산 너머에 네가 태어난 곳이 있다고 말했잖아. 방학이니까 난 네가 고향에 다녀온 줄 알았어.”

         

        아, 맞아. 분명 그랬었지.

         

        이곳에 도착하고 첫째 날의 이야기였다. 피치블렌드 산을 바라보며 내가 무심코 고향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었다.

         

        저 산 너머에 고향이 있다고.

         

        물론 실제 고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피치블렌드 산에서 요르문간드를 만나 수인족을 도와주는 의뢰를 달성하기만 하면 지구로 귀환하는 길에 한 발자국 가까워지리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었다.

         

        이것에 대한 변명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즉답했다.

         

       “내가 살던 곳은 거기보다 훨씬 너머야. 못해도 바다를 건너야 할걸.”

        

       아렌스 대륙은 판게아처럼 생겼다. 행성 하나에 커다란 대륙만 덩그러니 하나. 그 외에 사람이 밟을 수 있는 육지는 군도 몇 군데가 전부다.

         

       “나는 그 너머 어디 외딴섬에서 태어났거든.”

        

       이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통일이 안 된 상태에서 우리나라는 열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면 저번에 엘랑카야 산맥에서 자랐다는 건 거짓말이야?”

       “거짓말까진 아니지. 그쪽에서 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여신이 날 떨궈놓은 장소가 하필이면 엘랑카야 산맥 북부였다. 웬 황폐화한 작은 촌락에서 스폰됐었는데, 여기가 어디인고 하며 둘러보다가 때마침 금안족 사냥을 나온 노예상에게 걸렸다.

        

       내 막힘없는 대답에 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납득했다는 뜻이었다.

        

       켕기는 게 있었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편이 나나 로테에게 좋았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근데 이러니까 꼭 논문 디펜스하는 것 같네.

        

       “알았어. 그러면 그다음 말이야. 가장 궁금했던 건데…. 아까까지 있었던 그 아카샤라는 애, 정말 네 쌍둥이 여동생이야?”

        

       이걸 납득시키는 것이 가장 난감한 일이다.

        

        나는 아카샤를 몰랐다. 빙의자인 버멜에게조차 전해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런데 나와 똑같이 생긴 애나 대뜸 나타나서 언니라고 불렀으니까…. 아무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둘러댈 말이 안 떠오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름을 알고 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로테는 해명을 요구했다.

        

       저번에 나는 가족관계를 묻는 로테에게 ‘누나만 한 명 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는 말을 꺼낸다?

        

       이러면 나만 거짓말쟁이가 된다. 이게 당장은 사소한 것일지는 몰라도, 나중 가면 신용에 큰 타격을 준다.

        

       “미안해.”

        

       이런 건 고개 숙이는 게 정답이다.

        

       “걔에 관한 건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어. 이상하지? 집도, 옛 친구도 기억하는데 동생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니.”

        

       아카샤의 존재만으로 이전까지의 발언은 모두 변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성가신 녀석이다.

        

       그걸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과뿐이다. 미리 내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음을 로테에게 알려주고 사과하면…. 그래.

        

       “아니야.”

        

       로테는 고개를 내저으며 싱긋 웃었다. 그녀가 곧 다리를 오므리며 예의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나는 샴푸였고, 다른 하나는 둥그스름한 유리병이었다.

        

       “이건 뭐야?”

       “트리트먼트.”

        

       트리트먼트? 한 번쯤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정확히 어디에 쓰는 건지는 잘 모른다.

        

       “나머지는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 오래 있으면 현기증 나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트리트먼트를 면밀히 관찰했다. 오일처럼 무색투명하고 매끈거리는 질감의 액체였다.

        

       자, 생각해 보자. 

        

       머리를 감는 데 쓰는 건 샴푸 하나면 족하다. 그렇다면 이건 몸에 바르라고 준 게 아닐까.

        

       게다가 트리트먼트(Treatment)는 영어로 ‘치료’를 뜻한다. 점액질 형태인 걸 보아하니 몸에 도포해서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거겠지.

        

       실로 완벽한 추론이었다.

        

       나는 병에 담긴 트리트먼트를 손에 흘려서 목과 어깨 등지에 발랐다. 그 모습을 본 로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잠깐, 너 뭐 해?”

        

       뭐야.

        

       “이거 이렇게 쓰는 거 아니야?”

       “그건 헤어트리트먼트야. 머리에 바르는 건데….”

        

       이런 씨부레.

        

       “모르면 얘기하지 그랬어.”

        

       로테는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양 뺨이 다 화끈거렸다. 로테가 뽀얀 살결을 드러낸 채 이쪽으로 다가오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 봐. 이렇게 손으로 짜서 머리 안쪽까지 골고루 펴 바르는 거야. 이러면 머릿결이 상하는 걸 예방할 수 있거든.”

        

       쓱쓱.

        

       로테는 내 뒤에 붙어서 트리트먼트를 대신 발라주었다. 기다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가녀린 손가락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진다. 전문 마사지사에게 두피 마사지를 받는 듯한 감각이었다.

        

       로테의 손길에 점점 잠이 몰려왔다. 요호족 마을에 갔을 때 쌓인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까닭이다.

        

       “조는 거 아니지?”

        

       나는 서서히 잠이 들려다가, 그만 나가자는 로테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뜨듯한 물로 씻고 나니까 비몽사몽한 기분이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기를 털었다. 로테보다 내가 머리가 길었기에 드라이를 하는 것도 그만큼 오래 걸렸다.

        

       이쪽이 머리를 말리는 사이에 로테는 냉장고에서 술병 두 잔을 꺼내왔다. 

        

       “그게 뭐야?”

       “아이스 와인. 흔히 작업주라고 불리는 술 종류야.”

        

       작업주라니. 일할 때 마시는 건가?

         

        아니, 아니겠지. 대체 어떤 연놈이 업무 중에 음주를 해.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추론은 삼가는 것이 좋다. 방금만 하더라도 트리트먼트의 용례 하나를 잘못 파악해서 너드나 할 법한 짓을 벌이지 않았는가. 어…. 따지고 보면 나도 너드긴 하구나. 갑작스러운 자아 성찰에 조금 슬퍼졌다.

         

        어찌 되었건 뜻을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작업주가 뭐 하는 술이야?”

        “어? 진짜 몰라?”

         

        로테는 살짝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모르고 마실 뻔했네. 이거 목넘김은 좋은데, 생각보다 도수가 높아서 금방 취하는 술이야.”

        “오우.”

        “괜찮으면 같이 마실래?”

         

        도수가 강하다는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술이 약하다. 치킨집 가면 주는 1리터 생맥주 한 잔이 적정량이었다.

         

        애초에 술을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었기에 소주나 양주 같은 건 입에 가져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뜸 도수가 높은 걸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났잖아. 같이 취해보고 싶어서…. 아, 아니! 싫으면 안 마셔도 돼. 도로 냉장고에 가져다 놓을 테니까!”

        “뭔 소리야.”

         

        나는 떫게 웃었다.

         

        “회포 푸는데 술만큼 좋은 건 없잖아.”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 진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맨정신으로는 낯 뜨거워서 하기 어려운 말도 나오게 해 준다.

         

        적당한 양을 마신다면 실보다는 득이 크겠지. 그런 판단에서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비싼 와인일 거 아니야. 귀족 영애께서 무료로 대접해 주시겠다는데.”

         

        나는 로테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 잔 들어. 귀족인 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해서 직접 따라줄게.”

       “친구 사이에 오블리주는 무슨.”

        

        목욕 직후의 와인 한 잔이라. 뭔가 기품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쪼르륵.

         

        경쾌한 소리가 운두 낮은 술잔을 가득 채운다.

         

        술잔의 높이는 새끼손가락 정도였다. 제아무리 진한 술이라고 해도 그렇지, 겨우 이만한 양으로 취하겠나 싶을 만큼 적게 보였다. 

         

        때마침 창문 너머로 환한 달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술잔에 담긴 달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났다.

         

       “포도주 같은 건가?”

        “응. 나도 잘 모르는데 아마 비슷할걸?”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필름이 끊기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로테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이 든 잔을 들어 올렸다.

         

        짠, 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술향을 느끼며 동시에 잔을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탁

       

       “아으으….”

        “어후….”

       

       동시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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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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