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비와 앨리스가 부딫혔던 그날.
두 사람은 가진 힘을 모두 꺼내 서로에게 쏟아 부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본 광경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그 광경을 봤다면, 분명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미쳐버렸을 게 분명할 테니까.
그 장면은 단순한 힘 또는 능력이 부딫히는 것 이상으로 치열했다.
집착, 질투, 분노, 증오, 그리고 회한.
절대 정리되지 못할 감정이 마음속을 들끓게 만드는 두 사람의 내면은 겉모습 이상으로 일그러졌고, 크게 망가져 갔다.
그리곤 그 원인을 눈앞의 상대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견디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결코 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비슷한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용사로서 해야 할 역할을 요구받았으며, 두 사람 모두 크나큰 실패를 맛보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했던 친구도 같았다.
그리고, 배우자마저도.
그러나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기인했다.
그 차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실비아의 눈에 비친 앨리스의 모습은 허우적대며 헛된 발버둥만 치고 있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이제 와서 마왕에게 복수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란 생각은 헛된 바람에 불과했다.
물론 잠깐의 평화를 맛볼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앨리스가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얻으려 하는 평화는, 결코 그녀가 원하는 그 예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마물이 멸종당해 인간들만 남는다 해도 어차피 전쟁 같은 바보짓이나 저지를 테고, 마왕에게 복수한다 해도 마리아, 그리고 모든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기에,
그리고, 애쉬도 결코 앨리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반면에 앨리스의 눈에 비친 실비아는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주저앉아, 모든 걸 잊고 싶어 하는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용사의 임무도 다하지 못했고, 마리아를 포함한 수많은 동료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자신의 임무를 끝낼 마음도, 동료들의 복수를 행할 의지도 없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보지도 못한 앨리스 본인조차 뇌가 익어버릴 듯한 뜨거운 분노에 치를 떠는데, 어떻게 그녀는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단 말인가.
몇번이나 격돌해본 결과 그녀는 분명 아직도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류도, 동료도, 심지어 친구마저도 전부 잊어버리고 이 숲속에서 알콩달콩 사랑받는 신부 놀이나 즐기겠다고?
그것도 마리아의 동생인 애쉬랑?
내 절친의 동생이자,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인 그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몇번이나 서로의 몸에 꽂히는 검과 주먹은 그 두터운 감정의 벽만큼 묵직한 통증을 터트렸다.
회복될 뿐,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한 치의 빈틈조차 만들지 않기 위해 통증을 무시했다.
이를 악물거나 눈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런 데 쓸 한순간의 틈조차 이 순간엔 치명적인 실수가 될 테니까.
한치의 기울어짐 없이 치열하게 오가는 공방.
그러나, 감정의 크기는 아무래도 앨리스의 것이 조금 더 컸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인공 심장은 감정에 맞춰 폭발적인 신성력을 토해내며 스스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가 앨리스의 분노를 더욱더 자극 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온몸이 들릴 정도로 센 주먹이 복부에 꽂히는 순간 실비아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때, 실비아는 분명 패배를 직감했었다.
그녀가 놓친 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앨리스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순간엔 드디어 죽게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나 흥분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 방대한 신성력을 다루는 게 버거웠던 탓일까.
앨리스는 검에 신성력을 흘려보내는 걸 잊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신성력이 담기지 않은 무기는 실비아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었다.
마왕의 저주로 인한 보호.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웠고, 신성한 기적보다는 현실을 왜곡시키는 요술에 더 가까웠다.
그녀를 치유하거나 강화하는 힘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다치지 않도록 억지를 부리는 힘에 더 가까웠다.
애쉬에게 처음 자신의 저주에 관해서 설명했던 그날.
그녀가 자기 눈에 힘껏 찔러넣은 나이프가 그러했듯이,
그녀의 목을 향해 똑바로 날아온 날붙이는 그대로 새카만 잿가루만을 남긴 채 증발해버렸다.
“어?”
앨리스가 당황한 그 짧은 찰나.
거의 일 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한순간.
실비아는 앨리스의 몸을 말 그대로 짓이겨 버렸다.
금방 회복할 것이란 걸 알기에, 실비아는 쉬지 않고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연신 두들겨댔다.
앨리스는 입술에서 새카만 핏덩이를 토해내며 말했다.
“큭, 어디, 언제까지 하나 보자, 윽! 네가 그만두는 게 빠른지, 내가 포기하는 게 빠를…크악,”
“…”
실비아는 쉴 새 없이 앨리스의 몸을 짓이기며 말했다.
“너는, 내가 몇번이나 죽으려 시도했는지 알아?”
“…어… 크어억”
입과 목이 부러진 앨리스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실비아는 그 머리에 주먹을 꽃아, 부수며 또다시 물었다.
“내가 죽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해봤는지 알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며 물어본 질문이 아니었기에, 실비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기대해, 넌 내 상상력을 두려워하게 될 테니까.”
앨리스가 묽고 붉은 고기죽 처럼 변할 때까지, 실비아는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
애쉬가 잠든 걸 확인한 후 몰래 빠져나온 밤.
아직도 애쉬와의 정사로 인한 여운이 다리 사이에 남아있던 실비아는 행복한 듯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듯이 걷고 있었다.
호숫가를 벗어난 후, 이제는 완전히 불타 흔적도 거의 없어진 밀우드 마을을 지나, 애쉬와의 추억이 가득한 강가에 도착한 실비아는 추위 따위 느껴지지도 않는지, 거침없이 강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허리가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간 그녀는 천천히 발로 무언가를 찾듯이 더듬거리다 이내 곧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커다랗고 묵직한 무언가를 꺼내 물 밖으로 휙 집어 던졌다.
쿵 소리를 내며 모래밭 위에 떨어진 그 무언가는 찌그러진 쇠공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짓눌리고 구겨진 얊은 틈 사이에선 쉴 새 없이 붉은 물이 새어 나왔다.
실비아는 여유롭게 물 밖으로 나와 그 쇳덩이를 툭툭 걷어차 세로로 세웠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빨리 끝내줄게. 앨리스”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쪼그려 앉았다.
자세히 보니 그 무언가의 정체는 앨리스가 입고 있던 갑옷이었다.
팔과 목, 몸통이 지나가야 하는 구멍을 꽉꽉 짓눌러 붙여버린 갑옷.
실비아는 쉴 새 없이 묽은 핏물을 흘려대는 틈에 손을 밀어 넣어 힘겹게 열어젖혔다.
그 안엔 꿈틀거리는 검붉은 살덩이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 살덩이가 바로 앨리스였다.
실비아에게 패배한 뒤 자기 갑옷 안에 구겨 넣어진 이후로, 그녀는 하루종일 몸을 재생하고 매일 밤 실비아에게 곤죽이 되기를 반복했다.
“뭐야, 오늘은 많이 재생 하지 않았네?”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의아해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 갑옷으로 만든 감옥을 열면 그 안엔 회복은 했지만 좁은 갑옷에 맞게 뒤틀린 앨리스의 몸이 꽉 차게 들어 있었다.
물론, 아무리 회복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몸은 이 자그마한 강철 틀 속에 짓눌리기에, 그녀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단 인간을 억지로 부러트려 공으로 빚어놓은 모습에 가까웠다.
당연히 그 꼴로는 실비아에게 별다른 반항조차 할 수 없었고, 앨리스는 뒤틀린 턱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짓이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앨리스가 오늘은 어째선지 어제 실비아가 짓이겨놓은 검붉은 살덩이 형태 그대로 놓여있었다.
“겨우 죽은 건가?”
자세히 보니 여전히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해 보였다.
실비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덩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살코기 안쪽에서 멀쩡한 손 한 짝이 불쑥 튀어나와 실비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
자기 턱을 가격하는 손.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피하려는 시늉도 없이 그 주먹을 맞았다.
그러나 미약한 손은 실비아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여유롭게 그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완전히 질려버렸어”
실비아는 손목을 부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팔 한 짝만 재생한 거였구나. 온몸을 다 재생시키면 공간이 없으니까… 하, 진짜 잔머리하고는…”
실비아는 천천히 일어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근데 주먹은 팔로만 치는 게 아니야. 너도 알지?”
팔, 어깨, 허리 그리고 단단한 지면을 세게 박차는 힘.
강한 주먹은 그 모든 조건을 더할 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조금 전, 실비아의 턱에 닿은 앨리스의 주먹이 형편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비아는 앨리스의 살코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가 딛고 있던 지면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한 힘이 그대로 앨리스의 팔과 살덩이를 또 다시 짓이겨 놓았다.
실비아의 얼굴과 몸에 핏덩이와 살덩이가 마구 튀어 올랐지만, 실비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얼굴에 뜨거운 핏물이 튈 때마다 히죽 거리는 걸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참 동안 앨리스의 살코기를 다지던 실비아는 다시 그녀의 흉갑을 덮고, 벌어진 틈새를 꾹꾹 눌러 짓뭉개 놓았다.
실비아는 자신의 악력에 의해 마치 찰흙처럼 구부러진 쇳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 애쉬가 나랑 몇번이나 섹스했게?”
실비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마치 십 대 소녀가 자기 경험을 친구에게 수줍게 자랑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실비아는 갑옷 안의 살덩이들이 살짝 꿈틀거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내가 그만해달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듣지도 않고 계속 찔러대는 거 있지, 정말… 너무 기분 좋아서 허리가 빠지고 다리도 후들거려서… 못 걷겠더라고…”
실비아는 천천히 쇳덩이를 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또 할 거 같아. 나 이러다 임신하는 거 아닐까? 물론 애쉬는 조심하지만 그래도 실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
처음 앨리스를 꺼낸 그 위치.
언제나 자신이 앨리스를 담가두는 그 위치에 도착하자 실비아는 표정과 목소리를 확 가라앉히곤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슬슬 이해 하는 게 어때? 같잖은 수작은 그만 부리고. 나는 안 가, 너도 못가, 애쉬도 못 보내… 아니지, 애쉬는 나를 사랑하니까 안 간다는 게 좀 더 말이 맞겠네.”
“…”
“네 자리는 없다고 했는데, 아니, 여기가 네 자리야. 네 잘난 갑옷 속에서 살코기로 존재하는 거.”
“…”
“또 모르지? 애쉬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네 살점 조금 떼어가 줄지? 어차피 너는 그 부서지지도 않는 기계를 중심으로 부활하니까, 네 몸 일부를 고기처럼 써도 상관없긴 하잖아?”
“…”
갑옷이 부르르 떨리자, 실비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네 더러운 몸을 어떻게 애쉬한테 먹여.”
그녀는 천천히 갑옷을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갑옷의 작은 빈틈 사이로 공기 방울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잘자, 앨리스. 내일 또 보자.”
실비아는 발로 앨리스의 갑옷에 모래를 덮고, 돌로 받쳐 단단히 고정한 후, 천천히 강물에 몸을 뉘었다.
흐르는 강물이 몸에 묻은 피와 살점을 천천히 흘려보내길 기다리며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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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를 위한 히로인의 고군분투.
아 감동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