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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1

       *

        실비와 앨리스가 부딫혔던 그날.

        ​

        두 사람은 가진 힘을 모두 꺼내 서로에게 쏟아 부었다.

        ​

        오직 두 사람만이 본 광경이었다.

        ​

        아마 누군가가 그 광경을 봤다면, 분명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미쳐버렸을 게 분명할 테니까. 

        ​

        그 장면은 단순한 힘 또는 능력이 부딫히는 것 이상으로 치열했다.

        ​

        집착, 질투, 분노, 증오, 그리고 회한.

        ​

        절대 정리되지 못할 감정이 마음속을 들끓게 만드는 두 사람의 내면은 겉모습 이상으로 일그러졌고, 크게 망가져 갔다.

        ​

        그리곤 그 원인을 눈앞의 상대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견디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결코 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

        어쩌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비슷한 존재였다.

        ​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용사로서 해야 할 역할을 요구받았으며, 두 사람 모두 크나큰 실패를 맛보았다.

        ​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했던 친구도 같았다.

        ​

        그리고, 배우자마저도.

        ​

        ​

        그러나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기인했다.

        ​

        그 차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

        ​

        실비아의 눈에 비친 앨리스의 모습은 허우적대며 헛된 발버둥만 치고 있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

        이제 와서 마왕에게 복수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란 생각은 헛된 바람에 불과했다.

        ​

        물론 잠깐의 평화를 맛볼 수는 있으리라.

        ​

        하지만, 앨리스가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얻으려 하는 평화는, 결코 그녀가 원하는 그 예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

        마물이 멸종당해 인간들만 남는다 해도 어차피 전쟁 같은 바보짓이나 저지를 테고, 마왕에게 복수한다 해도 마리아, 그리고 모든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기에,

        ​

        그리고, 애쉬도 결코 앨리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

        ​

        반면에 앨리스의 눈에 비친 실비아는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주저앉아, 모든 걸 잊고 싶어 하는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

        용사의 임무도 다하지 못했고, 마리아를 포함한 수많은 동료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자신의 임무를 끝낼 마음도, 동료들의 복수를 행할 의지도 없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마리아가 죽는 모습을 직접 보지도 못한 앨리스 본인조차 뇌가 익어버릴 듯한 뜨거운 분노에 치를 떠는데, 어떻게 그녀는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단 말인가.

        ​

        몇번이나 격돌해본 결과 그녀는 분명 아직도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

        그런데도 인류도, 동료도, 심지어 친구마저도 전부 잊어버리고 이 숲속에서 알콩달콩 사랑받는 신부 놀이나 즐기겠다고?

        ​

        그것도 마리아의 동생인 애쉬랑?

        ​

        내 절친의 동생이자,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인 그를, 네가 무슨 자격으로?

        ​

        ​

        몇번이나 서로의 몸에 꽂히는 검과 주먹은 그 두터운 감정의 벽만큼 묵직한 통증을 터트렸다.

        ​

        회복될 뿐,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한 치의 빈틈조차 만들지 않기 위해 통증을 무시했다.

        ​

        이를 악물거나 눈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

        그런 데 쓸 한순간의 틈조차 이 순간엔 치명적인 실수가 될 테니까.

        ​

        한치의 기울어짐 없이 치열하게 오가는 공방.

        ​

        그러나, 감정의 크기는 아무래도 앨리스의 것이 조금 더 컸던 모양이었다.

        ​

        그녀의 인공 심장은 감정에 맞춰 폭발적인 신성력을 토해내며 스스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가 앨리스의 분노를 더욱더 자극 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어느 순간, 온몸이 들릴 정도로 센 주먹이 복부에 꽂히는 순간 실비아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

        그때, 실비아는 분명 패배를 직감했었다.

        ​

        그녀가 놓친 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앨리스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순간엔 드디어 죽게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

        그러나,

        ​

        너무나 흥분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 방대한 신성력을 다루는 게 버거웠던 탓일까.

        ​

        앨리스는 검에 신성력을 흘려보내는 걸 잊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

        그리고, 신성력이 담기지 않은 무기는 실비아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었다.

        ​

        ​

        마왕의 저주로 인한 보호.

        ​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웠고, 신성한 기적보다는 현실을 왜곡시키는 요술에 더 가까웠다.

        ​

        그녀를 치유하거나 강화하는 힘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다치지 않도록 억지를 부리는 힘에 더 가까웠다.

        ​

        애쉬에게 처음 자신의 저주에 관해서 설명했던 그날.

        ​

        그녀가 자기 눈에 힘껏 찔러넣은 나이프가 그러했듯이,

        ​

        그녀의 목을 향해 똑바로 날아온 날붙이는 그대로 새카만 잿가루만을 남긴 채 증발해버렸다.

        ​

        ​

        ​

        “어?”

        ​

        ​

        ​

        앨리스가 당황한 그 짧은 찰나.

        ​

        거의 일 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한순간.

        ​

        실비아는 앨리스의 몸을 말 그대로 짓이겨 버렸다.

        ​

        금방 회복할 것이란 걸 알기에, 실비아는 쉬지 않고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연신 두들겨댔다.

        ​

        앨리스는 입술에서 새카만 핏덩이를 토해내며 말했다.

        ​

        ​

        ​

        “큭, 어디, 언제까지 하나 보자, 윽! 네가 그만두는 게 빠른지, 내가 포기하는 게 빠를…크악,”

        ​

        “…”

        ​

        ​

        ​

        실비아는 쉴 새 없이 앨리스의 몸을 짓이기며 말했다.

        ​

        ​

        ​

        “너는, 내가 몇번이나 죽으려 시도했는지 알아?”

        ​

        “…어… 크어억”

        ​

        ​

        ​

        입과 목이 부러진 앨리스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

        실비아는 그 머리에 주먹을 꽃아, 부수며 또다시 물었다.

        ​

        ​

        ​

        “내가 죽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해봤는지 알아?”

        ​

        ​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며 물어본 질문이 아니었기에, 실비아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

        ​

        ​

        “기대해, 넌 내 상상력을 두려워하게 될 테니까.”

        ​

        ​

        ​

        앨리스가 묽고 붉은 고기죽 처럼 변할 때까지, 실비아는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

        ​

        ​

        ​

        ​

        ​

        ​

        ​

        ​

        ​

        *

        애쉬가 잠든 걸 확인한 후 몰래 빠져나온 밤.

        ​

        아직도 애쉬와의 정사로 인한 여운이 다리 사이에 남아있던 실비아는 행복한 듯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듯이 걷고 있었다.

        ​

        호숫가를 벗어난 후, 이제는 완전히 불타 흔적도 거의 없어진 밀우드 마을을 지나, 애쉬와의 추억이 가득한 강가에 도착한 실비아는 추위 따위 느껴지지도 않는지, 거침없이 강물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

        허리가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간 그녀는 천천히 발로 무언가를 찾듯이 더듬거리다 이내 곧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커다랗고 묵직한 무언가를 꺼내 물 밖으로 휙 집어 던졌다.

        ​

        쿵 소리를 내며 모래밭 위에 떨어진 그 무언가는 찌그러진 쇠공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짓눌리고 구겨진 얊은 틈 사이에선 쉴 새 없이 붉은 물이 새어 나왔다.

        ​

        실비아는 여유롭게 물 밖으로 나와 그 쇳덩이를 툭툭 걷어차 세로로 세웠다.

        ​

        ​

        ​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빨리 끝내줄게. 앨리스”

        ​

        ​

        ​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쪼그려 앉았다.

        ​

        자세히 보니 그 무언가의 정체는 앨리스가 입고 있던 갑옷이었다.

        ​

        팔과 목, 몸통이 지나가야 하는 구멍을 꽉꽉 짓눌러 붙여버린 갑옷.

        ​

        실비아는 쉴 새 없이 묽은 핏물을 흘려대는 틈에 손을 밀어 넣어 힘겹게 열어젖혔다.

        ​

        그 안엔 꿈틀거리는 검붉은 살덩이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

        그 살덩이가 바로 앨리스였다.

        ​

        실비아에게 패배한 뒤 자기 갑옷 안에 구겨 넣어진 이후로, 그녀는 하루종일 몸을 재생하고 매일 밤 실비아에게 곤죽이 되기를 반복했다.

        ​

        ​

        ​

        “뭐야, 오늘은 많이 재생 하지 않았네?”

        ​

        ​

        ​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의아해했다.

        ​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 갑옷으로 만든 감옥을 열면 그 안엔 회복은 했지만 좁은 갑옷에 맞게 뒤틀린 앨리스의 몸이 꽉 차게 들어 있었다.

        ​

        물론, 아무리 회복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몸은 이 자그마한 강철 틀 속에 짓눌리기에, 그녀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단 인간을 억지로 부러트려 공으로 빚어놓은 모습에 가까웠다.

        ​

        당연히 그 꼴로는 실비아에게 별다른 반항조차 할 수 없었고, 앨리스는 뒤틀린 턱으로 욕지거리를 뱉으며 짓이겨질 수밖에 없었다.

        ​

        그랬던 앨리스가 오늘은 어째선지 어제 실비아가 짓이겨놓은 검붉은 살덩이 형태 그대로 놓여있었다.

        ​

        ​

        ​

        “겨우 죽은 건가?”

        ​

        ​

        ​

        자세히 보니 여전히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 듯했다.

        ​

        하지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해 보였다.

        ​

        실비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덩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

        그때였다.

        ​

        살코기 안쪽에서 멀쩡한 손 한 짝이 불쑥 튀어나와 실비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하,”

        ​

        ​

        ​

        자기 턱을 가격하는 손.

        ​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피하려는 시늉도 없이 그 주먹을 맞았다.

        ​

        그러나 미약한 손은 실비아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못했다.

        ​

        그녀는 여유롭게 그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

        ​

        ​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완전히 질려버렸어”

        ​

        ​

        ​

        실비아는 손목을 부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

        ​

        ​

        “팔 한 짝만 재생한 거였구나. 온몸을 다 재생시키면 공간이 없으니까… 하, 진짜 잔머리하고는…”

        ​

        ​

        ​

        실비아는 천천히 일어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

        ​

        ​

        “근데 주먹은 팔로만 치는 게 아니야. 너도 알지?”

        ​

        ​

        ​

        팔, 어깨, 허리 그리고 단단한 지면을 세게 박차는 힘.

        ​

        강한 주먹은 그 모든 조건을 더할 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

        조금 전, 실비아의 턱에 닿은 앨리스의 주먹이 형편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

        ​

        ​

        “이렇게.”

        ​

        ​

        ​

        실비아는 앨리스의 살코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그녀가 딛고 있던 지면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한 힘이 그대로 앨리스의 팔과 살덩이를 또 다시 짓이겨 놓았다.

       

       실비아의 얼굴과 몸에 핏덩이와 살덩이가 마구 튀어 올랐지만, 실비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얼굴에 뜨거운 핏물이 튈 때마다 히죽 거리는 걸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

        한참 동안 앨리스의 살코기를 다지던 실비아는 다시 그녀의 흉갑을 덮고, 벌어진 틈새를 꾹꾹 눌러 짓뭉개 놓았다.

        ​

        실비아는 자신의 악력에 의해 마치 찰흙처럼 구부러진 쇳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

        ​

        ​

        “오늘, 애쉬가 나랑 몇번이나 섹스했게?”

        ​

        ​

        ​

        실비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마치 십 대 소녀가 자기 경험을 친구에게 수줍게 자랑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

        실비아는 갑옷 안의 살덩이들이 살짝 꿈틀거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

        ​

        ​

        “내가 그만해달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듣지도 않고 계속 찔러대는 거 있지, 정말… 너무 기분 좋아서 허리가 빠지고 다리도 후들거려서… 못 걷겠더라고…”

        ​

        ​

        ​

        실비아는 천천히 쇳덩이를 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

        ​

        ​

        “아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또 할 거 같아. 나 이러다 임신하는 거 아닐까? 물론 애쉬는 조심하지만 그래도 실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으니까…”

        ​

        ​

        ​

        처음 앨리스를 꺼낸 그 위치. 

        ​

        언제나 자신이 앨리스를 담가두는 그 위치에 도착하자 실비아는 표정과 목소리를 확 가라앉히곤 나지막이 말했다.

        ​

        ​

        ​

        “이제 슬슬 이해 하는 게 어때? 같잖은 수작은 그만 부리고. 나는 안 가, 너도 못가, 애쉬도 못 보내… 아니지, 애쉬는 나를 사랑하니까 안 간다는 게 좀 더 말이 맞겠네.”

        ​

        “…”

        ​

        “네 자리는 없다고 했는데, 아니, 여기가 네 자리야. 네 잘난 갑옷 속에서 살코기로 존재하는 거.”

        ​

        “…”

        ​

        “또 모르지? 애쉬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네 살점 조금 떼어가 줄지? 어차피 너는 그 부서지지도 않는 기계를 중심으로 부활하니까, 네 몸 일부를 고기처럼 써도 상관없긴 하잖아?”

        ​

        “…”

        ​

        ​

        ​

        갑옷이 부르르 떨리자, 실비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

        ​

        ​

        “농담이야, 네 더러운 몸을 어떻게 애쉬한테 먹여.”

        ​

        ​

        ​

        그녀는 천천히 갑옷을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

        갑옷의 작은 빈틈 사이로 공기 방울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

        ​

        ​

        “잘자, 앨리스. 내일 또 보자.”

        ​

        ​

        ​

        실비아는 발로 앨리스의 갑옷에 모래를 덮고, 돌로 받쳐 단단히 고정한 후, 천천히 강물에 몸을 뉘었다.

        ​

        흐르는 강물이 몸에 묻은 피와 살점을 천천히 흘려보내길 기다리며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순애를 위한 히로인의 고군분투.

    아 감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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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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