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01

       “완전 나쁜 아빠! 완전 완전 완전!”

         

       파스텔은 악마에게 안겨 울분을 쏟아냈다.

         

       상대가 말할 땐 반박 못 하고 당하다가 막상 자기 전에 반박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말문이 트였다.

         

       “와안전 나빠!”

         

       백만 배 나빠!

         

       악마가 등을 쓸어줬다.

         

       『그래. 진정하고 숨부터 쉬어라. 다소 과호흡이다.』

         

       파스텔은 천천히 크게 숨을 쉬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말로 하지 말고.』

         

       입을 꾹 다물고 코로 숨을 쉬었다.

         

       들숨, 날숨, 들숨…….

         

       악마를 꼭 끌어안자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왜인지 비누 냄새나. 청결한 향기였다.

         

       호흡이 진정되자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물 자국과 뒤섞여 붉은 액체가 묻어나왔다.

         

       “으에.”

         

       분홍 눈동자가 멍해졌다.

         

       허억.

         

       나 어디 다침?

         

       손으로 머리 이곳저곳을 짚었지만 멀쩡했다.

         

       아하, 다른 사람 피구나.

         

       호르몬 친구가 만들어 낸 결과다. 피 냄새가 풍겼다. 몸이 살짝 으슬 떨렸다.

         

       으에에.

         

       따듯한 물에 노곤노곤하게 목욕하고 싶어.

         

       『하아.』

         

       악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붉은 눈동자가 내려보다가 상대를 쳐다봤다.

         

       『애 앞에서 차마 부모를 손볼 수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아버지가 유물 장치를 손에서 굴리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묘한 눈빛이 악마를 응시했다.

         

       “데모니우스.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남의 가정에 신경 쓰는 거야?”

         

       옛 친구를 대하는 듯한 힘 풀린 목소리에 파스텔은 살짝 움찔했다. 안긴 자세를 조금씩 바꾸며 악마의 등 뒤에 숨듯이 움직였다.

         

       악마가 뒤로 팔을 뻗어 감싸며 혀를 찼다.

         

       『최소한 아비 몫도 못 하는 놈보단 자격이 있겠군. 다 크지도 않은 애를 누가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파스텔을 직시했다. 시선을 느끼고 등 뒤로 다시 숨는 분홍 머릿결을 주시하다가 악마를 묘하게 돌아봤다.

         

       “아직 어려도 똑 닮긴 했어. 하지만, 다른 인격체야. 자식에게 상대를 투영하지 마. 블로섬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뭐……?』

         

       악마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얼토당토않은 말이 머리에 입력이 잘 안되는 듯 멍한 기색이었다.

         

       “아니면, 블로섬이 악마 신분을 사면받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먼저 저버리고 너를 다시 감옥에 가둬버렸으니 딸에게 해코지라도 하겠다?”

         

       아버지가 경멸하는 눈빛이 됐다.

         

       “그러지 마. 블로섬의 명예에 먹칠하는 짓이야.”

       『하.』

         

       악마가 헛웃음을 냈다. 손바닥이 얼굴을 쓸었다.

         

       『매우 옳은 걱정이지만……. 그딴 말을 네가, 하.』

         

       다소 진정된 파스텔은 힐끔 악마를 살폈다.

         

       악마님은 심정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듯한 상태였다.

         

       파스텔은 손을 떨다가 심호흡했다. 긴장을 털어내곤 숨었던 상반신을 완전히 내밀었다.

         

       “아, 아버지!”

         

       시선이 쏠렸다.

         

       “악마님을 곡해하지 마세요! 악마님은 굉장히 착하시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세요! 나쁜 의도나 목적은 전혀 없었다고요!”

         

       파스텔은 진심을 담아 외쳤다.

         

       “정신이 미약해진 틈을 타 관계를 형성했다거나! 하루 종일 같이 지내며 다른 관계가 생기는 걸 방해했다거나! 그런 일이 매번 있긴 했지만 결코 이 관계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한 악랄한 수법이라거나 하진 않았어요!”

         

       악마가 멍하게 내려봤다. 정신이 살짝 아찔해진 듯 붉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아버지를 돌아봤다.

         

       기존보다 월등히 경멸하는 눈빛이 왔다.

         

       “그러고 살지 마.”

       『아니.』

         

       악마가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

         

       파스텔은 뿌듯해졌다.

         

       나쁜 친권자 앞에서 착한 보호자를 당당히 옹호했어. 그동안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 이걸로 보은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쯤은 갚았겠지.

         

       테라스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그림자가 지더니 새를 탄 남자가 착륙했다.

         

       “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나요?”

         

       기사급 교단원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다 하셨습니까?”

         

       아버지가 하얀 마법진들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테라스로 걸어갔다.

         

       “다 했다.”

         

       아버지가 다른 새에 올라타다가 돌아봤다. 인공 햇살의 역광이 눈을 시리게 했다.

         

       “파스텔, 조언 하나 해주마.”

         

       파스텔은 움찔하곤 멍하게 바라봤다.

         

       “대악마의 봉인을 풀기 위해선 크래프트 혈족의 심장이 필요해.”

         

       어잉.

         

       『잠깐.』

         

       악마가 당혹스러워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듣지 못했다면, 검은 속내가 있는 거지.”

         

       아버지의 손이 고삐를 잡았다. 새가 날개를 펼쳤다.

         

       “어머니를 살리는 걸 돕고 싶을 땐 마계로 와. 자리를 줄 테니.”

         

       날개짓 소리와 함께 아버지는 떠났다.

         

         

         

       #

         

         

         

       파스텔은 세면 거울을 바라봤다.

         

       멍한 분홍 눈동자가 보였다. 찐득하게 눌어붙은 핏자국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물들였다.

         

       여기는 병실이 아니건만 피 냄새가 났다.

         

       으에.

         

       『흠.』

         

       악마가 옆에서 비누 거품을 냈다. 손에 듬뿍 거품을 만들더니 파스텔의 얼굴에 비볐다.

         

       찰박찰박.

         

       “우아! 우아!”

       『가만히 좀 있어라. 씻을 여건은 아니니 세수만 간단히 해야겠군.』

         

       으아아!

         

       “입에 비눗물 들어갔어요!”

         

       에퉤퉤!

         

       『입을 열면 당연히 들어간다.』

         

       허억.

         

       몰랐던 사실.

         

       어푸어푸.

         

       뽀득뽀득.

         

       악마가 수건으로 파스텔의 얼굴을 문질렀다. 말랑한 볼이 뭉개졌다.

         

       우아악.

         

       “이 정도는 알아서 할래요!”

       『그래라.』

         

       파스텔은 겨우겨우 수건을 건네받고 얼굴을 닦았다. 그럭저럭 깔끔해진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비누 냄새나…….”

         

       청결청결.

         

       으에.

         

       세면실을 나와 하얀 복도를 걸었다. 악마가 같이 걸어갔다.

         

       파스텔은 살짝 뚱해진 표정이 됐다.

         

       “악마님, 저한테 뭐 할 얘기 없으세요?”

         

       심장심장이라던가.

         

       『흠.』

         

       악마가 턱을 문질렀다.

         

       『애한테 불필요한 사실을 알려버렸군.』

       “으아아~!”

         

       파스텔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포! 혼란! 두려움!”

         

       믿었던 악마님에겐 사실 검은 속내가……!

         

       순진순진 파스텔은 이대로 대악마의 부활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인가!

         

       붉은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내려봤다.

         

       『그러게 진작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했어야지. 앞으론 아침 이부자리는 스스로 정돈해라.』

         

       허억.

         

       충격받은 파스텔은 손을 떨었다.

         

       그리곤 못 들은 척했다.

         

       와아, 반대편에서 은발 소녀가 오고 있어.

         

       “친구우!”

       “크래프트.”

         

       짐가방을 짊어진 앨시어가 걸어왔다.

         

       “캐머롯이 네 계획대로 교단의 근거지 토벌을 완료했다며 다음 스텝을 알려달래.”

         

       내 계획?

         

       황실령이 보장한 캐머롯의 권한으로 기사단의 군사권을 강탈하고 이곳을 기습한 일?

         

       내가 언제 그런 계획을 세웠더라아.

         

       애초에 군사권 강탈 같은 무서운 권한이 멜리사에게 있었다니. 그래 놓고 항상 존댓말 쓰며 사근사근하게 군 거야? 남부 후계자님 완전 무섭잖아아. 완전 크래프트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차피 해낸 당사자도 모르는 거 위대한 파스텔 각하의 똑똑한 공로로 하면 좋을 거 같았다.

         

       파스텔은 고개를 치켜 세웠다.

         

       “맞아! 내가 계획했어!”

         

       똑똑한 내 머리를 쫓아 오다니!

         

       너희 눈치가 빠른데!

         

       앨시어가 묘하게 바라봤다.

         

       “캐머롯의 다소 과한 해석일 거라 의심하기도 했는데 역시 아니었구나.”

         

       허억.

         

       앨시어 백만 배는 똑똑한 듯.

         

       저 머리로 왜 아직도 짐가방을 지고 있는 걸까.

         

       미스터리~.

         

       “어쨌든 내가 직접 현장에 갈게! 멜리사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지!”

         

       파스텔은 같이 복도를 걸어갔다.

         

       “아기새와 눈싸움은 왜 했던 거야?”

       “기사단의 짐을 얹어줬더니 자꾸 나한테 넘기려 하길래.”

       “헤에.”

         

       그래서 거대 병아리와 눈싸움?

         

       “헤에에.”

         

       대화는 서서히 끊겼다.

         

       뒤따라오는 악마님은 사용인 신분상 남들 옆에서 말 걸고 말하기도 미묘하다. 앨시어도 원래 먼저 말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본래라면 파스텔 자신이 정적을 어색해할 앨시어를 위해 어련히 대화거리를 만들거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파스텔은 그리 썩 좋은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끝을 문질렀다. 마른 핏가루가 손에 묻어나왔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 사랑.

         

       그 무엇보다 고귀한 사랑.

         

       사랑, 사랑.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랑.

         

       그렇기에 내겐 오지 않는 사랑.

         

       앨시어가 쳐다봤다.

         

       “뭔가 막혔어?”

       “사랑이 필요해.”

         

       은발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유연애라도 하게?”

       “연애……?”

       “하긴 네가 가주고, 좋아할 상대도 많으니.”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그러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분홍 눈동자가 반짝였다.

         

       “앨시어!”

         

       손을 붙잡았다. 소녀가 움찔 놀랐다.

         

       “응?”

       “너 고민 상담 꽤 잘하는구나! 처음 볼 때부터 이런 재능을 가진 줄 나는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우린 절친이니까!”

         

       파스텔은 앨시어를 친구에서 절친으로 격상시켜줬다. 처음 마주쳤을 땐 대뜸 절친이라 불렀으니 그때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었다.

         

       분홍분홍 파스텔에게 고민 상담해 주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 그걸 넘어 방안까지 제시해 주다니!

         

       넌 절친의 자격이 있어!

         

       붙잡은 손을 흔들었다.

         

       “앨시어! 짐가방은 그만 내려둬도 좋아!”

         

       절친 사이에 명령한 적은 없지만!

         

       “정말? 알겠어.”

         

       앨시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준기사급이라 힘들진 않지만 짐꾼 일은 공작 영애로서 여러모로 궁상맞았던 모양이다.

         

       앨시어가 짐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푸! 푸! 푸!

         

       파스텔은 복도 한복판에 섰다. 양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인기인 파스텔.

         

       연애는 그 무엇보다 손쉽다!

         

       떨어져 걷던 악마가 다가왔다.

         

       “악마님! 악마님! 들으셨어요?”

       『뭘 말이지?』

         

       한쪽 팔을 번쩍 들었다.

         

       “인기인 파스텔!”

         

       손짓이 스스로를 가리켰다.

         

       “연애를 시작하겠어요!”

         

       뚜루 뚜뚜!

         

       악마가 멍해졌다.

         

       『뭐라고……?』

         

       청천벽력 같은 미래를 알게 된 표정이었다.

         

         

         

         

         

       

       

    다음화 보기


           


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