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로구나.’
노예중에 가장 가치가 큰 노예.
그것은 바로 이종족 노예다.
잘 보기도 힘들 뿐 더러, 사로잡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
드워프와 엘프가 한곳에 모여 있다니.
평생 잡아보지 못한 이종족 노예가 생길 기회인 것이다.
거기에다 아이까지.
요즘들어 아이의 값이 치솟은 걸 생각하면 이번 한탕으로도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으리라.
‘저 늙은이들은 대충 팔아버려야겠군.’
솔직히 팔릴지는 의문이었다.
미묘하게 주름이 없고 젊어 보이지만, 늙은이들을 누가 돈주고 사가겠는가.
‘차라리 저 젊은 놈이 더 값이 나가겠어.’
이종족과 함께 다니는 것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인원만 사십.
그중에는 3써클의 마법사가 무려 둘이나 포함되어 있다.
‘살살 구슬려 방심만 유도하면 되겠구나!’
최근에 좋은 방법이 생겼다.
얼마전부터 퍼지기 시작한 소문.
크리스라는 사람을 따라 하면 너도나도 지갑을 풀어 헤치며 달려왔으니까.
생각을 마친 제라드가 작은 종을 흔들었다.
땡 – 땡 –
“험험, 일리아 신께서 말씀하시길…”
“하부?”
아기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을 끊었다.
“그렇단다. 일리아님께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단다.”
“마쟈!”
“어쨌든 제가 모시는 일리아님께서 말씀하시길.”
피식 –
제라드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경우가 있기는 했다.
운명을 본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제라드조차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으니까.
“웃을 일이 아니오.”
제라드가 인상을 구기며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저는 성녀를 모시는 몸. 감히 일리아의 이름 앞에서 비웃음을 흘리다니!”
늙은 노인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 푸들거리는 입매들.
금발을 가진 노인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신성을 모독해서야 쓰겠는가! 여기가 어디라고.”
“험험,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가 봅니다.”
제라드가 근엄한 표정을 만들었다.
“일리아께서 알려주신 운명에 대해 말씀드리겠소.”
“하부가 말해쪄?”
“…그렇단다.”
“아닌데…!”
아기의 말은 무시한 제라드가 종을 흔들었다.
땡 – 땡 –
종소리와 함께 입을 열려는 찰나, 이번엔 드워프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들을때마다 졸렬한 소리다. 귀가 썩어버릴 것 같군.”
“어허! 이 종이 바로 일리아의 신탁을 전해 받는 성물이요!”
성물이라는 소리에 노인과 드워프, 아기가 청년에게로 눈을 돌렸다.
천으로 감싸진 허리춤에 매달린 물건.
검으로 보이는 무언가였다.
제라드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값비싼 물건이겠구나.’
그래도 성물이라고 내세워서 일까.
금발을 한 노인에게서 금방 반응이 나왔다.
“그, 그것이 정말 성물이란 말이오?”
“영감께서는 알아본 모양입니다!”
“시장에서 본 것 같소만?”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이보게, 저게 성물이라는군.”
“염병하고 자빠졌네요.”
“이익…!”
제라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제라드가 속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무력으로 이들을 사로잡기로.
고작 몇명을 상대로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는가.
‘저 노인은 팔 하나를 잘라서 팔아치울 것이다!’
눈짓을 주자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는 부하들.
저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편하게 팔려갔을 것을… 네놈들이 자초한 일이다!”
이종족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인질을 잡으면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법.
제라드가 단검을 뽑아 들고 금발의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뻗어져야 하지만 멈춰있는 팔.
움직이지 않는 다리.
“마법…!”
이죽거리던 노인이 마법사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마법사라면 이쪽에도 있었다.
눈알을 굴려 부하들을 바라본 제라드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으…으헉…!”
“이 정도의 마나라면…!”
덜덜덜 –
몸을 떨고 있는 마법사들.
드래곤이라도 본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답답한 행동에 제라드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순간, 마법이 풀리며 제라드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금발의 노인이 마법사라면, 다른 인질을 잡으면 될 터.
제라드의 몸이 검을 차고 있는 노인에게로 쏘아졌다.
빠악!
눈에 보이는 파란 하늘.
“….?”
갑자기 느려진 시간 속에서 제라드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풀썩.
제라드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드워프의 얼굴.
“요즘은 이런 식으로 자살을 하나보군.”
“….?”
“다, 단장!”
“모두 공격해!”
제라드의 부하들이 병장기를 집어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단장이 보낸 신호대로 전부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움직이면 죽는다…!’
‘최소한 세써클의 차이다.’
다급하게 사람들을 말려보려 했지만 입을 열 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주위를 감싼 마나들이 뿜어내는 압박감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엘프년 부터 잡아!”
“저년만 잡아도 우리는 부자다!”
달려가는 남자들의 눈에 음욕이 넘쳐흘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흐르는 아름다움.
남자라면 시선을 빼았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가녀린 몸을 보면 당장에라도 손목을 잡아 챌 수 있을듯했다.
하지만 엘프의 강함을 모르는 그들은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싸늘한 얼굴의 세레나에게.
“…더러워서 정령에게도 실례가 되겠네요.”
검을 휘두르던 팔이 세레나의 손에 잡혀 반대로 꺾였다.
우드득 –
“끄어억…!”
비명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팔이 검을 잡은체로 동료를 향해 겨눠졌다.
푸우욱 –
몸을 한차례 꿰뚫은 검.
그 검은 어느새 세레나의 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검이 한차례 움직일 때마다 노예 상인들의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났다.
스거억 –
팔목을 가르고.
푸욱 –
복부를 꿰뚫고 빠져나온 검이 옆에 있던 사람의 다리를 베어냈다.
“내..내 다리가!”
힘줄이 끊어진 다리가 몸을 버텨 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풀썩 –
서거억.
세레나의 몸이 병장기들 사이를 누비며 곡선을 그렸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비명과 신음들.
피가 줄줄 흐르는 손목을 움켜쥔 제라드의 부하가 몸을 떨었다.
‘엘프가 아니라 다른 놈들을 노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부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질만 확보하면 이년을…!’
지금쯤 동료들이 인질을 확보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린 그는 동료들의 모습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콰아앙 –
단 한 번의 주먹질.
마치 마법이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람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털썩.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주먹.
꽈앙!
“….”
터져 나오는 비명은 없었다.
맞는 즉시 기절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린 괴물 같은 노인이 손을 까딱였다.
“들어와보시게.”
방금의 광경을 보고 누가 저 노인에게 접근할 수가 있겠는가.
창이고 칼이고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닿을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상황은 금발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화르르륵 –
허공을 떠다니는 불덩어리들.
공격마법중 하나인 파이어볼이었다.
하나가 터지면 사람이 세네 명씩은 족히 죽어 나간다.
그정도야 몸을 던지면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저게 무슨…”
어디까지나 파이어볼이 하나일때의 이야기였다.
저렇게 열 개가 넘는 불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건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다.
“드워프라도 잡아야 한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드워프는 상체를 감싸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한쪽 팔을 들어올리고는 창을 향해 옆구리를 내미는 드워프.
채앵 –
콰득 –
갑옷과 부딪치자 창이 통째로 부서졌다.
드워프가 옆구리를 두드렸다.
툭툭 –
“다시 쳐 봐라.”
“이…이…!”
또 다른 검이 그곳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카앙 –
뚜둑 –
창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는 두 동강이 난 검.
바닥에 누워 있던 제라드의 부하는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이들이 뭘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인가?
하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한 명이 남아 있다면….
‘아기를 업고 있던 놈!’
이중에 제일 평범해 보이던 놈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백발을 가진 그놈이 엎드려 있는 눈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언제…”
검을 들지도, 마법을 쓰지도 않고 있었다.
예상대로 평범한 사람인 걸까?
제라드의 부하는 깨달았다.
자기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던 눈이 미묘하게 자신의 뒤로 향해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비명횡사 하셨나봐? 어린 나이에 이별했구만.”
“….!!!”
“집에 불이라도 났었나 보네?”
“그,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동료들이라면 있었지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디 보자…이름이 페란트?”
“허억…!!”
“하실말이 있으시다니까 잘 들어.”
조용히 귓속말로 전해지는 말들.
페란트와 그의 부모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남들에게 말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일들.
“으…으아악…!”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상식과 다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본능적인 이질감.
페란트가 바닥을 짚으며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직 남았는데?”
“흐어억…!”
“위로는 해드려야 할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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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 모두 항상 재밌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