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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1

       돈 쓰는 거 재밌네.

        

       사실 따지자면 내 돈은 아니지만.

        

       하긴, 전생에서도 돈이 없어서 못 썼지, 있는데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컴퓨터 부품 바꿔 끼우는 것도 좋아했고, 콘솔 게임기를 사거나 몇 번 쓰지도 않을 카메라를 사거나,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가거나. 물론 몇 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이벤트이긴 했지만, 내 취미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 그런데…….”

        

       징계 위원회가 끝나고, 교실 밖으로 나오자 여학생 하나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이래도 되나?’ 싶은 표정을 지은 그 아이는, 손에 두툼한 종이봉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안에는 노란색 지폐 다발이 가득한 종이봉투였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돈을 받았으니, 돈을 받은 만큼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글쎄.”

        

       나는 시선을 살짝 올리고 멍하니 생각했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방법을 묻는 상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긴, 학교 안에서 서로 무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서로 모르는 사이면 인사 같은 것은 하지 않았었으니까. 예사라가 무시당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어도, 예사라와 친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굳이 인사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리라.

        

       특히, 예사라의 재산을 생각하면, 사실 외부 입학생과 친해질 일도 별로 없었겠지.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말했다.

        

       “그냥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나 해.”

        

       “……으, 응?”

        

       “딱히 반갑게 인사하거나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는 없어. 그냥 복도 걷다가, 식당이나…… 혹시 학교 밖에서라도 길 가다가 얼굴 보면 손이나 좀 흔들어주란 말이야.”

        

       사실 그 이상은 바랄 것도 없다. 평범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에 돈 받고 따라다니는 부하 같은 존재는 필요 없다. 그냥 예사라를 무시하지만 않아도, 그 자체로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작 그거 하나를 얻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들었다.

        

       “뭐, 당연히 내가 말 걸면 대답정도는 해주고…… 그 이상은 딱히 바랄 것도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돈이 부족해?”

        

       “어? 아, 아니야! 그런 건 아니니까! 진짜 괜찮거든!?”

        

       뭐, 나도 부족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여도 중소기업에서 실수령 200도 안 되는 돈 받고 일해 본 적이 있단 말이지. 학생 때는 최저시급 받는 알바도 해봤고, 최저시급에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주는 군대에도 다녀왔다.

        

       백 단위, 천 단위의 돈은 재벌들 입장에서 보면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만 원권 한 장이 아쉬운 서민 처지에선 그것만으로도 당장 생활이 편안해질 수 있는 돈이다. 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으면 진짜로 꼭 필요한 돈일 거고.

        

       한 장에 1그램이 채 되지 않는 돈이 1천 장 있어야 1킬로그램이다.

        

       하지만 그 1킬로그램의 무게는, 그저 1킬로그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저, 저기……!”

        

       몇 걸음 정도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이번에는 다른 애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까 교실에 방패막이로 온 아이들의 수는 대충 일곱 명 정도였다. 그래도 한 명한테 몰아주지 않은 것은 ‘집단 따돌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체면치레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

        

       그중에서, 어깨를 덜덜 떨면서 위원회가 열리는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엄청나게 수수한, 솔직히 미연시에 나오는 캐릭터치고는 머리 색도 특이하지 않고, 헤어스타일로 대단히 예쁘지 않은, 대충 자른 것 같은 검은 단발머리에 둥그런 안경을 낀 여자애였다.

        

       얘는 적어도 절대로 주요 인물은 아니었을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CG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소리보다 더 몰개성한 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묘하게 착실해 보이는 인상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바로 나에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무래도 얘는 인상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성격도 착실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행동을 뜻하는지는 쉽게 유추해볼 수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돈을 받지 않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하고 말했다.

        

       “이건 무슨 뜻이야?”

        

       예사라는 예쁘지만, 인상만 보면 엄청나게 날카롭다. 옆구리를 찌르면 괴상한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건 직접 찔러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고. 다른 반이라면 그런 모습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아이를 보자, 그 아이는 작게 “힉.”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눈앞에 내민 종이봉투를 다시 거두어가지는 않았다.

        

       “이,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어……!”

        

       “‘이런 돈’이라니?”

        

       “그, 그러니까…….”

        

       나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어 보인 뒤 말했다.

        

       “이거, 설마 뇌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차마 돈 준 사람에게 그 말을 직접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그 아이는 가만히 눈을 깔았다.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자. ‘뇌물’이라는 게 성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건…….”

        

       그렇다. ‘뇌물’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성립하는가?

        

       아주아주 넓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날 좀 잘 봐달라고 주는 모든 돈은 뇌물이다. 잘 사는 집 부모가 학교 애들에게 자기 애랑 친하게 지내달라고 음식 사 주는 것도 넓게 보면 뇌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뭐, 만약에 네가 나에게 돈을 줬다면 뇌물이 되겠지. 따지자면 내가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 중 하나니까. 사건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하거나, 뭐 그런 이유로 돈을 줄 수는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돈을 주는 건 너가 아니고 나거든? 이 상황에서 내가 너에게 ‘뇌물’을 먹였다고 할 수 있을까?”

        

       교내 따돌림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수천만 원을 건넨다. 누가 봐도 영 그림이 이상하다. 솔직히 전후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들으면 뉴스에서 대서특필할 이야기였다.

        

       단순히 수천만 원을 건넸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십 대’가 돈을 건넨 게 문제다.

        

       ‘유진 그룹의 상속녀가 교내 따돌림 끝에 견디지 못하고 가해자들에게 수천만 원을 상납했다!’

        

       이런 건 ‘뇌물’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외부 입학생답게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걱정할 거 없어. 그런 거로 내가 신고할 일은 없으니까.”

        

       “하, 하지만, 그래도…….”

        

       “만약에 이 돈이 더러운 돈일 거라고 생각하면 그 걱정도 할 필요 없어. 그냥 ‘내 돈’이거든. 꺼내는 과정에서 자금추적이라도 당하면 귀찮으니 이런저런 방법으로 몰래 빼 오긴 했지만, 완전무결하게 내 돈이야. 그렇죠?”

        

       내가 어느새 근처까지 온 한가람 팀장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자, 한가람 팀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죠! 고객님의 계좌와 금고에서 나온 돈이니까요. 그리고, 증여세는 깔끔하게 계산해서 미리 떼어 놨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돈을 주는데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문제지, 돈을 주는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요. 나라에서는 세금만 제대로 내고 불법적인 돈만 아니라면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서요.”

        

       사실 세금도 안 내고 불법적인 돈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이건 다른 경우니까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나는 눈앞에 내민 돈을 손으로 꾹 눌러 다시 그 애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니가 나에게 돈을 돌려주면, 저 뒤에 있는 애들은 어떻게 되겠어? 그림이 좀 많이 이상하지 않을까?”

        

       뒤에 서 있는 나머지 여섯 명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건, 각자 나름대로 이유로 이 돈을 꼭 그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가족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쓰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이미 준 돈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가져가면 그만이야.”

        

       “…….”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이 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사라졌는지, 결국 그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내 뒤로 소희, 하늘, 수아, 손아름, 그리고 한가람 팀장이 따라붙었다.

        

       “선생들 표정 봤어?”

        

       소희가 잔뜩 흥분해서 나에게 물었다.

        

       선생들은 소희가 책상을 발로 찍은 뒤부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내가 날뛰는 것만으로도 수업이 마비될 지경이었는데, 안 그래도 십수억을 먹이고 학교에 들어온 소희가 난리를 치기 시작하면 누구 하나 피를 보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이제 이 학교에서 너를 무시할 사람은 없겠네.”

        

       하늘이가 속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복도를 걷는 우리를 다른 학생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저 애들은 위원회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나를 무시하기는 힘들게 되겠지.

        

       “잘됐다, 응?”

        

       수아가 살며시 웃길래, 나도 수아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뭐, 지금 당장은 두려움 때문에 나를 무시하지는 못하겠지만…… 아직 시간은 있다.

        

       예사라가 돌아올 때 쯤에는 그 두려움도 어느 정도 지워놔야겠지. ‘평범하게’생활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정말로 괜찮은 걸까……?”

        

       정작 판을 깔아준 건 본인이면서, 손아름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걱정이긴 했다. 돈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돈이 끊어지면 그대로 끊어지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그저 ‘무시하지 마’정도로만 만들어 둔 것이다. 최소한의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조건. 그 정도만 있으면 그 뒤로는 돈이 아니라도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잇고 쌓아갈 수 있을 테니까.

        

       “…….”

        

       반쯤 비어버린 여행 가방을 끌고 나를 따라오는 한가람 팀장은 한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가,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라고, 지난번의 그 당당한 헛소리를 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뭐, 성공보수 정도는 드릴게요.”

        

       당연히 500억은 아니지만.

        

       “세금 덜 뗄 방법 정도는 미리 생각해 두시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객님! 앞으로도 꾸준히 이용해주세요! 제발!”

        

       한가람 팀장은 뛸 듯이 좋아했다.

        

       ……그렇게 돈이 좋을까?

        

       하긴, 나도 좋긴 하다.

        

       ……그러니, 부디 예사라가 깨어나서 나더러 다시 갚으라는 말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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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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