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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2

       동생? 

       

        아, 몰랐어. 보자마자 이름이 딱 내뱉어져서 나도 놀랐다구. 응, 그거 말고는 아는 게 없었어. 나도 정말 처음 보는 애야. 믿어 줘.

         

        어…. 진짜, 정말? 믿어주는 거야? 

         

        고마워. 이거, 해명하기 정말 어려웠는데에.

         

        아까 얘기했던 대로 토카막은 걔한테 줬어. 대신에 좋은 스크롤을 받아왔고.

         

        응, 후회 안 해. 오히려 이쪽이 남는 장사였어. 그러니까 그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도 개안아.

         

        아. 그랬구나.

         

        사실 그동안에 내가 뭘 하고 지냈는지도 너한테 말해주기 힘들었어. 힘들었는데.

         

        좋아.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나는 변방의 작고 약한 마을에서 태어났어. 으음, 그렇게까지 나약한 건 아니었지만. 강대국에 둘러싸여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는. 그런 나라였지.

        

       응? 아마 너에게는 말해줘도 모를 거야. 이 대륙에는 없는 장소니까. 문헌에도 적혀 있진 않을걸.

        

       아무튼 배경은 이 정도뿐이야. 사실 내 고향 이야기는 유달리 할 게 없어. 네가 그렇게까지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유년기에 뭘 하고 살았느냐겠지.

        

       내가 기억하는 가족 구성원은 딱 이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유년기는 뭐 하고 자라는지도 모르겠어. 부모님 얼굴도 기억 안 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묫자리를 찾아가 보지도 않았는데…. 아니, 못 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알맞으려나.

        

       영 좋은 기억은 아냐. 지금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나 한 명뿐이야.

        

       누나? 누나는 어떤 금안족이었냐고?

        

       그, 뭐라 해야 하나. 우리 누나는 금안족이 아니야. 사실 나는, 아니. 아니다. 정 모르겠으면 의붓누나라고 생각하면 돼.

        

       아, 한 잔 더 따라 주려고? 고마워어. 잘 마실게에.

         

        자, 너도 받아. 

        

       …어우. 이거 미쳤네.

         

        어, 근데 맛있어.

        

        잠깐.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거기.

       

       아무튼 나는 그런 섬나라 같지 않은 섬나라에서 지내다가 엘랑카야 산맥으로 왔어. 동족이 많이 살고 있다길래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바다를 건넜지. 섬에선 더는 먹고살 만한 게 없었거드은.

         

        가족? 몰라. 그때쯤엔 뿔뿔이 흩어졌었나.

        

       어쨌건 혼자서 움직였어. 산맥을 건너 남쪽을 쭈욱 돌아다녔지.

         

        그런데, 도무지 금안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어. 엘랑카야 남쪽을 이 잡듯 뒤져봐도 샛노란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지.

        

       하릴없이 북쪽으로 향했어. 왜 제국이 아니라 북쪽이냐니, 그때는 이 나라가…. 아니네. 이건 내가 착각했다. 미안.

        

       아, 머리가 아프네. 이래서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에. 흐흐, 근데 이거 진짜 맛있네. 주전부리로 딱이야.

        

       뭘 어떻게 됐냐니. 지금 말짱히 살아있는 걸 보면 적어도 거기서 객사하지는 않은 거지, 뭐.

        

       하여간 계속해보자. 능선을 따라 쭉 올라가던 중,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어. 시커먼 로브를 쓴 사람이었지. 얼굴을 마스크로 가렸던 탓에 눈 색까진 확인하지 못했어. 그래서 금안족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

        

       그 사람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어. 대뜸 먹을 걸 주면서 자기 집으로 날 초대했… 으아. 왜, 왜 때리는데.

        

       아니,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니까. 

        

       없었어, 정말로. 아무 일도.

        

       그 사람은 날 먹여주고 재워줬어. 뜬금없었지만 잘만 받아먹었지. 그 무렵엔 진짜 아사하기 직전이었는데…. 왜, 뭐.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뜬금없었지만 공부도 배웠다고. 일단 배우고 봐야지 장차 큰일을 한다나 뭐라나. 

        

       그거라도 열심히 했어. 안 그러면 인생 막살게 될 것 같은 거야. 닥치는 대로 익혔지. 마도학, 수학, 역사나 군사학도 조금 배웠고. 책 하나를 다 외우기 전까진 땔감으로도 안 썼어.

        

       그렇게 뒤지도록 공부하다가,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모닥불 앞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어.

        

       ─ 보통 인간의 재능이 아니구나. 이런 곳에서 썩히기 아까워. 내가 너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그곳에서 일해보지 않으련? 장차 나와 큰일을 해낼 때 밑거름이 될 게다.

        

       그 큰일이 뭐냐는 말에, 은사님은 이리 말을 이으셨어.

        

       ─ 이 세상 마도의 정점에 서는 것이란다.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지. 그래, 어둡고도 어려운 마(魔)의 길이다.

        

       그땐 너무나도 추상적인 말이라 잘 이해하지 못했어. 사실 지금도 그래. 은사께서 뭘 하시려는지 온전히 아는 날이 오긴 할까? 그래도 일단은 날 먹여주고 재워주며 교육까지 해준 사람이니까 조금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는 최종적으로 헤어졌지. 보답을 하겠답시고 웬만큼 도와주다가 달이 차서 독립했어.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언제더라. 어으, 기억이 안 나.

        

       나는 그 뒤로 엘랑카야 산맥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어. 머리 좀 컸다고 생각한 거지.

        

        오산이었어. 엘랑카야 산맥 남부에서 머무르다가 제국 노예상에게 잡혔고, 그대로 수도에 팔려 왔어. 운이 없었던 걸까?

        

       아, 얘기 안 해줬구나. 난 너와 만나기 직전까지 하스펠트 교수의 사노비였어.

        

       어? 응. 맞아. 그땐 그 사람이 노예상인 줄 몰랐지. 우리 스승님처럼 그냥 날 조금 도와주려나 싶었는데, 두 번은 아니더라고.

        

       그게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적어도 내가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다 착했어. 너처럼.

        

       아, 그런데 노예상은 몰라도 하스펠트 교수는 아니야. 그 사람은, 일을 잘 해줘도 칭찬 한 번을 안 해줬어. 잘하면 더 잘하라고 해. 마치 실적에 사로잡힌 악령 같았어.

        

       그치. 이해되지? 황자랑 교수가 싸운 것도 그것 때문이야. 교수가 날 황실에 팔아버리려고 했어. 그것도 몸종으로. 그래서 아카데미로 도망쳐 나온 거야.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있었으니까 어렵지는 않았는데.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마. 지나간 일이니까.

       

       하아. 원래 친구랑 술자리에서 담임 뒷담 까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니까. 이거 여기서 더 마시면 안 대는데.

         

        아이 모르게따. 한 잔만 더. 헤으.

        

       플레어어? 어, 그러치이.

        

       하스펠트가 연구하라고 시켰어. 그걸 시켜놓고 자기는 날 팔아버리려고 뒤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우스워. 그래서 그대로 너 엿이나 먹어 바라아아, 이렇게. 어예. 

        

       그렇잖아. 그건 믿음에 대한 배신이었어. 나한테는 그걸 기한 내에 만들어놓으라고 하고, 다 끝나면 자긴 돈 받겠답시고 토사구팽하겠단 소리였잖아. 그런 인간군상은 질색이야.

        

       한 번만 더 그런 거 당하나 봐라. 진짜 다 빵빵 터뜨려버릴 거야아.

        

       우욱, 속이 이상해애.

        

        어? 뭐. 무슨 할 말?

         

        플레어 비슷한 거? 뭐?

         

        에이, 거짓말하지 마.

         

        …….

         

        그래, 그랬구나.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백작님이 피치블렌드 마석을 정제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계셨고, 지금은 그게 강력한 에너지원이라는 사실까지 알았다 이거지.

         

        그래서 내가 새벽에 산에 올랐을 때 긴장을 느꼈고. 그 교수처럼 될까 봐 말이야.

         

        됐어. 나도 몰랐어. 여기 온 건 그냥 친구 보려고 그런 거라니까? 

         

        어. 걔가 거짓말친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만나면 한 대 때려버려야겠다.

         

        잠깐. 그런데 그렇게 가문에서 비밀스레 하고 있었던 일이면 나에게 말을… 어으, 그걸 허락을 받았어? 아까 목욕하기 전에 백작님에게 갔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백작님께서 왜 날 곱게 봐주셨는지 모르겠네. 응, 이해 안 돼. 남몰래 개발하는 마도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서 좋을 거 하나도 없잖아. 심지어 10년 넘게 연구하신 거면….

         

        로테, 넌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내가 지금 말을 꾸미고 있는 거면 어떡하려고 그런 소리를….

         

        …….

         

        에라, 모르겠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끝나버렸네. 굳이 숨길 이유도 없게써.

         

        좋아. 네가 나에게 진심을 보여줬으니, 나도 그에 맞는 답례를 해 줘야겠지.

         

        아니, 인제 와서 거창해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사양할 필요는 없어. 난 받으면 무조건 갚아 줘야 속이 시원하거든. 그게 은혜이건 원수이건 간에 말이야.

         

        응. 그래. 네가 전에 물어봤던 그거. 

         

        텔러-울람 설계.

         

        마왕군을 이 세계에서 지워버리는 방법을 알려줄게.

         

         

        **

       

         

        대화는 깊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에테르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로테는 비틀거리며 남은 잔을 털어냈다. 어지럽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둘 다 책상에서 잠들어 버린다면 몸살에 걸릴 게 분명하니 최선을 다해 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후우.”

         

        호젓한 밤이었다. 월광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고, 책상 너머로는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테는 에테르를 둘러메고는 그대로 침대에 눕혀놓았다.

         

        술을 어찌나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로테는 친구가 호흡을 편히 할 수 있도록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주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에테르의 얼굴은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었다.

         

        이리저리 헝클어진 검은 머릿결. 기다란 속눈썹 위로 또렷하게 진 쌍꺼풀. 입술은 앵둣빛을 띠었고, 피부는 소나무에 쌓인 눈가루처럼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자신의 성별이 반대였더라면 음험한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

         

        “내가 미쳤지.”

         

        취하긴 했나 보다. 이런 몹쓸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안 그래도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로테의 침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사실 몇 걸음은 안 됐지만, 저기까지 가는 게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다.

         

        “에테르, 먄해. 잠깐 여기 누울께해.”

         

        쌔근거리는 소녀의 숨결에서는 단내가 났다. 로테는 에테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방금까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소녀와 아카샤라는 소녀의 관계성.

         

        에테르가 이곳에 온 이유.

         

        노예 생활과, 하스펠트 교수와의 사연.

         

        하나같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중 일부는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 이야기였고.

         

        에테르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였다. 처음에는 그간 무엇이든 알려주었던 친구가, ‘텔러-울람 설계’를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퉁명스러운 정도였는데.

         

        아카샤라는 아이를 만나고 나서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분명히 외모는 같은데, 아카샤에게서는 악의와 살기가 느껴졌다.

         

        ─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렴. 네가 믿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으면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믿거라. 그게 너와 네 친구를 위한 길일 테니까.

         

        그나마 정령마도사인 아버지의 조언 덕분에 응어리를 깨끗이 풀 수 있었다.

         

        정령, 여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종족.

         

        티끌 하나 없는 선인(善人)에게는 정령이 찾아온다. 가령 로테의 아버지나, 카우렐리아에서 도를 닦은 상당수의 엘프가 그러했다. 아니면 여러 정령과 계약한 그 ‘클라라 하스펠트’라던가.

         

        정령에게 선택받은 자는 미약하게나마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런 아버지가 아카샤는 경계했고, 에테르는 경계하지 않았다는 걸 오늘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판단으로 아까 아버지를 찾아갔다. 자신도 모르게 아카샤가 피치블렌드 마석 정련기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괜찮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니.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는 로테에게, 아버지는 온화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이셨다.

         

        ─ 로테야. 아버지는 성과 따위 상관없다. 그러고 보니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 네?

        ─ 내가 이 연구를 비밀로 하고자 했던 이유가 뭐였는지 생각나니?

         

        “피치블렌드를 가공했을 때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가문의 영광스러운 대업을 빼앗겨선 안 된다’ 따위의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아버지께서 하시는 연구는 모두 백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같은 화계마도사 가문인 하스펠트가 ‘전투’에 특화된 마도를 내놓는다면, 살리에르는 늘 ‘실용성’과 ‘복지’에 초점을 맞춰왔다.

         

        ─ 네 말대로 그 친구가 피치블렌드의 쓰임새를 알고 있다면 오히려 그 아이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 이게 정말 안전한지 아닌지. 또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야.

         

        과음을 해서 그런 걸까?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 일단 네가 말한 그 정련기로 마석을 갈아내. 그다음 플루오린에 잘 적셔서 육불화우라나이트를 만들어. 이걸 여차여차 잘 농축해서 마석의 주성분을 80… 아니, 90퍼센트 이상으로 모으는 거야. 이걸 웬만큼 모아서 1차 폭탄을 만든다?

         

        ─ 여기까진 그냥 조금 센 폭탄이고. 텔러-울람 설계는 그딴 게 아니야. 거기서 2차, 3차를 더 만들어. 공계마도를 잘 쓰면 어떻게든 돼. 아, 외형 구축할 때 지계도 필요하겠네. 음, 그리고…. 어떻게든 완성해 놓으면 뇌관을 설치하지. 거기에 화계 스크롤로 점화를 해 주면, 퍼엉. 오케이?

         

        결과는 간단했다. 에테르는 피치블렌드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2시간 넘게 그 주제만으로 이야기를 떠들 정도로 지식의 이해도가 남달랐다.

         

        비록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아카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모두 중상모략, 이간질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에테르가 정말 살리에르 가문의 연구를 노린 것이라면 그만한 지식을 알려줄 리가 없었고, 알고 있었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흐으.”

         

        모든 생각을 마치니 졸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떡하지. 잠깐만 누워있다가 건너편 침대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눈꺼풀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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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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