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읏,”
무릎에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촉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실비아씨와 재회한 이후, 나는 눈을 뜰 때마다 버릇처럼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오늘도… 나갔네.”
실비아씨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잠들어 있는 새벽쯤에 먼저 일어나 산책이라도 나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오두막에서 살 때는 분명 그녀에게 그런 습관은 없었다.
피부에 와 닿는 싸늘함으로, 나는 그녀가 이미 밤부터 내 옆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었다.
나 역시 그녀처럼 점점 시간이나 날짜를 세는 일이 어려워 지고 있어 확실하진 않으나, 이 텅 빈 오두막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이 아마 한 달은 될 것이다.
그 한 달간의 고독 덕분에 내 피부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온기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곤 했고, 그 예민한 감각은 내게 그녀의 부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내가 잠들고 나면 실비아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잠을 전혀 자지 않는 것 같았다.
온통 부족한 것투성이인 이 오두막에서 몸을 쓰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몰려드는 잠기운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써봐도 결국 눈이 스르르 잠겨버리곤 했다.
천천히 감겨가는 내 시야에 비치는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실비아씨의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그녀의 잠드는 모습을 본 적은 지난 며칠간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단순히 나보다 늦게 자서 나보다 먼저 깨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차갑게 식어있는 오두막의 공허한 빈자리는 그녀가 밤중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내게 강력하게 주장하곤 했다.
“…하.”
나는 누운 채로 머리를 헝클이며 긁적거렸다.
이 공허한 아침이 너무나 싫었다.
내게 불길한 상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미친 건가…”
아침에 눈을 뜨고 그녀가 없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나는 혹시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고민하곤 했다.
사실 실비아씨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고, 이건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얼어 죽어가는 내가 보는 비참한 환각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런 고민 말이다.
하,
아니지,
어쩌면, 나는 실비아씨와 헤어지던 그날 빗속에서 죽어가며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정령 술사라니,
어쩌면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아무런 힘이 없던 나약한 내가 만들어낸 비참한 상상력에 불과한 건 아닐까.
온몸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지금 숲속에서 죽어가는 내 몸 위로차 가운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지, 아니야.
빗줄기 하면 오히려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가야지.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그 비 오던 날 밤에 마차 사고를 당한 내가 온몸이 부러진 채 비참하게 쓰러져 보는 긴 주마등 같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라일라 옆에서 미약한 숨을 몰아쉬는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라보는 세상일지도 모르지.
사실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기도 했다.
용사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누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숨겨진 힘과 운명도 찾는다.
어린아이의 꿈처럼 허무맹랑한 이 이야기는 얼핏 살펴보면 다 내가 원하던 것들이었다.
나 역시 남자이기에 멋진 여자와 사랑도 해보고 싶었고 섹스도 해보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고, 속으로는 그런 누나를 부러워하며 질투했기에 그녀만큼의 능력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다.
하, 딱딱 들어맞네.
동화 속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나 역시 죽어가며 이 모든 환상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점 확신이 들어찼다.
“…실비아 씨… 빨리 와줘요.”
나는 그녀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중얼거렸다.
실비아씨와 보낸 나날들이 나의 비참한 상상력이 빚어낸 허망한 상상이 아니기를, 그녀가 나를 안아주는 온기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회한 이후로는 그녀를 ‘실비아 누나’ 라고 부르며 어울리지도 않는 아양까지 떨어댄 것이다.
이제서야 실비아씨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내 가족이 되겠다며 이상한 행동을 했었는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혼자 있을 땐 무감각하다 오히려 곁에 누군가가 있어 주는 순간,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이 무시무시한 크기의 공허함.
그녀는 내 존재에, 내 온기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녀의 존재에 목말라 있는 것처럼.
“…그 천둥 번개.”
옛날 그녀가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여동생 흉내를 냈을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땐 실비아씨의 그런 이상 행동이 무척 기괴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야속한 생각이었다.
어제 보았는데, 심지어 어제 하루종일 그녀와 몸을 겹쳤는데.
너무나도 실비아씨가 보고 싶었다.
보통 그녀는 이쯤 되면 나타나곤 했는데, 오늘은 아직도 그녀가 나타나질 않았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무릎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
아직 제대로 된 처리가 덜 끝난 가죽인지라, 혹시 사슴의 털에 살고 있던 이라도 옮은 걸까 싶었던 나는 천천히 이불 대신 덮고 있던 사슴 가죽을 들추었다.
“피아?”
내 자그마한 수호 정령이 이불 아래에서 꼼지락대며 내 무릎을 핧고 있었다.
*
그저께였나.
실비아씨와의 뜨거운 밤을 보내던 도중 나도 모르는 새 무릎이 까졌었다.
실비아씨도 눈치 못 챘을 정도로 사소한 상처였고, 나 역시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해달라 징징대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두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피아가 내 무릎의 상처를 핧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도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타난 피아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피아는 평소처럼 불덩이를 몸에 두른 모습이 아닌 푸른빛이 도는 은색 빛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정령은 불꽃의 정령이 아니라, 그저 정령과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르던 나의 불꽃을 타고 나타나던 것뿐이라고 녹색의 여인이 설명해주었던 게 떠올랐다.
나는 피딱지가 진 내 무릎을 연신 할짝대는 자그마한 아기 여우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마음이 편해지는 치명적인 귀여움을 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피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피아는 내 손길에 잠깐 움찔거리더니 이내 곧 제 머리를 내 손바닥에 꾹꾹 밀어 올리며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보채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공허함과 우울감이 조금 수그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실비아씨가 없던 그 시간 동안 피아가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음을 새삼 떠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내 말을 알아 듣는 건지 모르는 건지, 피아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다시 여우 특유의 실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기분 좋은 듯 머리 위의 양쪽 귀가 살짝 까닥거린다.
나는 피아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실비아씨가 없는 동안 따듯한 피아의 몸을 끌어안으며 잠을 청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녔다 보니, 그 북슬북슬한 꼬리털의 감촉도 그립기도 했기에, 오랜만에 꼭 안아주려는 생각이었다.
“피아, 조금 커졌네?”
피아의 앞다리 아래로 양손을 넣어 들어 올리자 이전보다 묵직한 무게감과 훨씬 크게 잡히는 둘레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피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나를 빤히 바라보며 코끝을 킁킁거렸다.
“그새 자라기라도 했나… 내가 딱히 밥 같은 걸 챙겨준 기억은 없는데, 아니… 정령이 뭘 먹긴 하던가?”
갑작스러운 수호 정령의 변화에 나는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왜 빨리 안아주지 않느냐는 듯 네 다리를 버둥거리는 피아를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피아를 품에 폭 안았다.
“낑”
얇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피아는 내 품 안에 폭 안겨들었다.
오히려 크기가 커지니 안는 기분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부들부들한 몸체와 북슬북슬한 털,
그리고 깨끗한 매끈매끈한 피부의 감촉이 보드라워 몇분이고 몇시간이고 계속 안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피부?
나는 깜짝 놀라 피아를 떼어내 바라보았다.
“왜?”
피아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며 왜 그러냐는 듯, 내게 물어보았다.
물어보았다…?
나는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빨리, 안아줘.”
피아는 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되어있었다.
“피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폭 안겨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뻣뻣한 동작으로 아이를 토닥이며 안았다.
푸른빛의 은색이 도는 머리카락을 보면, 이 녀석이 내 수호 정령 피아임은 확실해 보였다.
아니, 대체 왜 사람의 모습이 된 거지?
“쓰다듬어줘.”
“아, 응…”
녀석의 요구대로 머리를 쓰다듬자, 머리카락에 딱 붙어 뒤로 넘겨진 커다란 두 쌍의 귀가 만져졌다.
내 손이 닿자, 여우의 것을 닮은 그 귀 두짝이 쫑긋 일어섰다.
나는 천천히 피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사람의 귀가 위치해야하는 부분을 만져보았으나, 그곳엔 북슬거리는 머리카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 정말… 피아 맞아?”
“?”
피아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거나.
멍하니 피아의 머리를 토닥이며 상황 파악이 덜 끝난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애쉬, 일어났…”
“아, 실비아씨.”
“… 어?”
아니, 지옥문이 열렸다.
.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