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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2

     

    아셀라는 권터에게 모의전 신청을 받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황태자를 상대로 능력을 보이고 월광궁의 위상을 증명할 찬스다.

     

    그에게 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전략 싸움이라면 승산이 굉장히 높았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건수임에도 안달이 난 건 권터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답해줄게.”

     

    이미 심리전은 시작했다. 아셀라는 그의 초조함을 가중시키고, 승리를 방해할 불안요소를 미리 체크하기 위해 여유를 두었다.

     

     

    권터가 돌아간 후, 아셀라는 즉시 시녀장을 시켜 일성궁의 동태를 보고하도록 했다.

     

    서류를 읽으며 권터의 근황을 파악하는데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최근에 주치의가 새로 들어왔었지. 그 같잖았던 이단심문관의 후임이야?”

     

    “네. 황태자에게 활기를 찾아줬고, 얼마 전에는 게다 전하를 살려냈을 정도로 실력이 좋다고 합니다.”

     

    별 사건이 없는데도 권터의 태도가 바뀌었다면 변화한 환경에도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일성궁의 최근 특이사항은 새 주치의뿐.

    아셀라는 그가 모종의 역할을 했으리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공자가 맡은 완다뿐만 아니라 게다도 고비였다고 했었지. 실력자이려나. 있다가 공자에게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아셀라가 페이지를 넘겨 주치의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눈매를 찌푸렸다.

     

    “얘 걔잖아.”

     

    천리안으로 봤던 황제가 사망하는 사건.

     

    그곳에서 고트베르크 가문을 끌어들였던 장발의 치유사였다.

     

    “황녀님,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

     

    아셀라가 부정했다. 자신은 실제로 그를 만나본 적 없으니까.

     

    ‘나쁜 느낌이 들어.’

     

    천리안에서 자신은 그 남자에 주목하고 있었다.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암살의 진범일지도 모른다.

     

    ‘좀 더 정보가 필요해.’

     

    아셀라는 훈련장으로 향해 천리안을 시전했다.

     

    시전할 때마다 점점 익숙해진다. 그녀의 마법 실력은 끝을 모르고 좋아지고 있었다.

     

    화악, 시야가 빨려 들어간다.

     

    시점이 움직이는 짧은 순간 아셀라는 목격했다.

     

    번쩍이는 시간선이 밧줄처럼 얽히고 설켜 이어지는 광경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기묘한 구간이 있었다.

     

    ‘종점… 아니, 시작지점처럼 보여.’

     

    한 줄의 밧줄로 이어지던 시간선이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여러 가닥으로 분열한다.

     

    얼핏 백 개를 조금 넘는 숫자로 보였다.

     

    다만, 몇 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선이 도려낸 듯 끝이 잘려있다.

     

    ‘왜 끝나있지?’

     

    천리안은 기본적으로 그 시간대의 자신이 보는 광경을 보여준다.

     

    시전자가 시간선 위에 없다면 천리안은 작동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이 그 지점에서 죽는다는 소리일까.

     

    비주얼로 보니 시모어가 말했던 가능성이 무엇인지 이해됐다.

     

    주어진 수많은 미래 중, 그때그때 선택에 따라 하나의 시간선을 타게 된다.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거나 새로운 시간선을 분기시키는 일도 가능할 거야.’

     

    끝이 끊기지 않고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진 시간선도 있었다.

     

    ‘분기점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길이로 보아 먼 시기는 아닌 것 같다.

    몇 년 후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걸 잡으면….’

     

    아셀라가 시간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간선을 붙잡으면 원하는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윽.’

     

    하지만 유령이라도 된 듯 팔에는 힘이 없고, 발버둥칠수록 시간선은 멀어져만 갔다.

     

    결국 원하는 지점을 선택하지 못한 아셀라의 몸이 떠밀리고, 그녀는 백 개로 분열한 어느 끝 지점에 떨어졌다.

     

     

    ‘여기는.’

     

    아셀라는 제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탑 발코니에 서 있었다.

     

    자신이 슬쩍 거울을 바라봤다.

     

    황제 아셀라.

     

    전에 봤던 즉위 직후가 아니라, 성장을 끝내 어엿한 성인이 된 자신이다.

     

    ‘20대 중반쯤 됐을까?’

     

    황제 아셀라가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아름다움이 마음에 든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셀라는 그 미소를 보고 소름이 끼쳤다. 생기 없는 눈동자를 한 그녀는 폭군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주변에는 시녀장인 루시도, 주치의인 라스도, 월광궁 기사단장이나 잘 알던 호위기사들도 없다.

     

    전부 자신을 떠난 걸까.

     

    아셀라는 조금은 외로워졌다.

     

    자신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황제 폐하! 우민들을 도와주십시오!

    ―자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이유를 바로 눈치챘다.

     

    역병이다. 광장이 만인의 기침소리로 가득 찼고 토혈하다가 쓰러진 이도 있었다.

     

    황제인 자신은 그들을 내려보기만 한다.

     

    아니, 그저 보는 건 아니었다.

     

    ‘즐거워하잖아.’

     

    자신도 모르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멈출 수가 없다.

     

    가슴 속에 희열이 피어났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건…’

     

    라스에게 짓궂게 구는 건 즐거웠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에 웃음이 나오진 않는다.

    지금 같은 태도를 이어나가면 저렇게 사악해지는 걸까. 자신의 성향에 의구심이 들었다.

     

    아셀라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쾅!

     

    그때 등 뒤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기사들이 창으로 입구를 막아 그를 저지했다.

     

    “아셀라 황제!!”

     

    분노가 가득 들어찬 외침이었다.

     

    아셀라는 심장이 철렁했다.

     

    자신을 향해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남자는 다름 아닌 라스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완전히 어른이 된 라스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고, 몸에는 잔흉터가 가득하다.

     

    그가 목숨도 아깝지 않은지 황제를 향해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전부 죽었어! 용사파티 전원 역병에 걸려 죽었다고! 대체 뭐야, 이 꼴은! 황제라는 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상황을 방치해? 이 무능한 폭군아!”

     

    기사들이 라스를 제압해 무릎 꿇렸다.

     

    아셀라는 또각또각 걸어 그런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리석은 소리구나, 치유사여. 병을 고치는 건 네 일 아니겠니? 그리도 제국민이 걱정되었다면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지 그랬느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역병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게 내버려 둔 건 당신이잖아!”

     

    쿨럭, 하는 기침과 함께 라스가 대량으로 피를 쏟아냈다.

     

    그가 다크서클 가득한 지친 눈으로 아셀라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시선을 오히려 즐기듯, 악마 같이 웃었다.

     

    “무능한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구금해라. 마왕을 토벌하지 못한 죄도 물리겠다.”

     

    “아셀라아!!”

     

    라스가 단말마를 질러내고는 혼절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죽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아셀라는 아쉬운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약하기는. 더 고통스럽게 벌을 주려 했거늘.”

     

    다시 발코니로 나간다.

    아셀라가 민중을 바라보며 그들의 절규를 안주 삼아 술잔을 들었다.

     

     

    ―팟.

     

    시야가 끊기고 아셀라가 현실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빴다. 이마에 땀이 가득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윽.”

     

    어쩐지 복통이 재발하려는 낌새였다.

     

    방금 본 광경에 흥분한 듯, 내장이 뒤틀리려 했다.

     

    “라스.”

     

    지팡이를 쥔 아셀라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라스가 죽었어.”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나 그가 죽는 장면을 직접 본 건 커다란 충격이었다.

     

    “용사파티에서 무리하다가 역병에 걸려 죽은 거야.”

     

    아셀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라스가 용사파티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애초에 그가 용사파티로 차출된 건 가문이 없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권력이 있다면 그런 위험한 곳에서 굳이 직접 뛰지 않는다. 부하를 보내 정치적인 이권만 챙기면 그만이다.

     

    “라스의 가문.”

     

    황제를 암살했다는 이유로 멸문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리비오라는 치유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라스가 걔랑 엮이면 안 돼.”

     

    아셀라가 그리 생각하며 작동을 멈춘 마법진을 거둬들였을 때였다.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라스와 타냐가 보였다.

     

    “하아.”

     

    아셀라는 살아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더할 나위 없이 안도했다.

     

    아직 살아있다. 그런 불행한 미래가 찾아올 리 없다고 희망을 가진 순간.

     

    풀썩, 라스의 자세가 별안간 무너지며 그가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라스?”

     

    아셀라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그를 향해 뛰어갔다.

     

    “라스!!”

     

    타냐가 쓰러진 라스의 머리를 받쳤다.

     

    두 사람에게 도착한 아셀라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그를 살폈다.

     

    얼굴에 손을 대니 손이 델 것처럼 뜨겁다.

     

    “쿨럭.”

     

    그 순간 라스가 기침을 했다.

     

    아셀라의 손이 라스가 토해낸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라, 라스…?”

     

    아셀라의 어깨가 떨렸다.

     

    방금 천리안으로 본, 역병이 그를 앗아가는 장면이 오버랩되며 뇌리에 강렬히 박혔다.

     

    “얘, 라스!”

     

    “제가 즉시 내의원으로 모셔가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황녀님.”

     

    타냐가 침착하게 라스를 안아들고는 즉시 발을 옮겼다.

     

     

    아셀라는 배터리가 나간 것처럼 그 자리에 꿇어앉은 채로 손을 떨었다.

     

    시녀장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온 것도 모른 채,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라스는 건강이 약한 게 틀림없어.’

     

    전에도 주치의 시험을 보거나 사룡과 싸웠을 때 등.

     

    그는 자주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곤 했다.

     

    자기 몸을 관리 못 하는 주치의라니.

     

    ‘…아냐. 라스니까.’

     

    분명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최선이 저것이라면, 본래는 훨씬 심각한 상태라는 뜻이 아닐까.

     

    “루시.”

     

    “네, 황녀님.”

     

    “권터에게 답장을 보내. 당장 승부를 겨루자고. 걸 것은 서로의 기사단과 궁의 재원, 그리고.”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가넷 브로치도 걸라고 해.”

     

    불사조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그 아티팩트라면 라스의 상태를 호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셀라는 치유술이나 의학에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기에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다주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월광궁은 일성궁을 잡아먹는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라스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을 삼키며, 아셀라는 걸음을 옮겼다.

     

     

     

    ***

     

     

     

    “아이고 머리야. 넘어질 때 부딪쳤나.”

     

    “허억. 아, 아직 일어나지 마세요…!”

     

    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내의원에서 클로에의 간호를 받으며 상태창을 여니 체력이 조금씩 감소하는 게 보였다.

    사탕의 회복량이 디버프의 피해를 상당량 상쇄해서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진 않다.

     

    “이제 사탕으로 커버 안 되는 수준까지 와버렸나.”

     

    나는 여유롭게 장미 사탕을 쪽쪽 빨면서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대략 한 달이다.

     

    운동으로 체력을 키워놓은 보람이 있었다. 최대치가 높으니 아직 여유가 있다.

     

    그동안 체력 하락을 커버할 수단을 찾아야 한다.

     

    “방법이야 있지.”

     

    권터가 꽤 비싼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100년 기한 정도로 빌려줄려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파페포포님 후원 감사해요! 항상 봐주셔서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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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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