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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2

     플람벨 남작의 구울화된 시신을 처리하며, 그를 대외적으로 화장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일단 땅에 시신을 그대로 묻는다면, 당연히 시신이 다른 이들의 앞에 보여야 했다.

     관뚜껑을 덮을 때까지 대역을 쓰는 건 말이 안 되고, 심지어 쓰려고 해도 그럴 사람도 없었다.

     마법?

     마법으로 그렇게 정교하게 분신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걸 과연 매장이 끝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묘’의 우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첫 번째는 도굴.

     잘 관리되지 않는 귀족의 무덤은 도굴꾼에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보물단지다.

     

     애장품으로 들어가는 반지라도 건지면 도굴값을 충당하고도 남기 마련.

     이것만 해도 문제가 되는데, 도굴꾼이 ‘시신이 없다’라는 걸 알면 그게 더 문제가 된다.

     ‘뭐든 협박할 소재가 되는 거지.’

     시신이 없다는 건 가모스 세빌리야 남작의 약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도굴꾼만 잘 제어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플람벨이라는 인간의 인성 자체가 우려되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둘째. 부관참시.

     죽은 사람인데도 그 죄가 드러나, 관을 부수고 시신을 꺼내서 참수하고자 하는 형벌이 내려질 경우.

     플람벨이 적어도 선인은 아니었던 만큼, 어떤 중죄로 부관참시를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화장했다.

     덕분에 그의 묫자리는 관에 그대로 묻혀 봉분이 세워지는 것보다 더 좁은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땅.

     면적.

     묘비.

     ‘왕국 개발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된 부분이었지.’

     제국에서는 좁은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사람을 주로 화장했다.

     뼛가루를 유골함에 넣고 납골당에 유골단지만을 놓은 채 추모하는 게 제국의 평균적인 장례식 절차였다.

     여기에서 문제.

     과연 그 납골당 유골함에 든 하얀 가루는 죽은 자의 뼛가루일까?

     아니면 그것처럼 비슷하게 꾸며둔 밀가루일까?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하려고 하는 이도 없을 것이며, 설령 확인하더라도 그 진실을 다른 이들에게 폭로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있었어도, 없던 것이 될 것이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국의 여러 납골당이 아마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시신조차 남겨둘 필요가 없는 자들이라거나.’

     황태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후대에 피를 남겨서는 안 될 열등한 자들.

     가족도 없고 연고도 없어, 그 누구도 묘비조차 찾지 않을 자들.

     흉악범죄를 지어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자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없었는데.’

     내가 머스킷으로 수많은 총살을 집행하기는 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흡혈귀로 끌려온 자는 없었다.

     ‘죽은 뒤에 흡혈귀로 만들 수 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만일 황태자가 배후라면, 적어도 내게 보내는 이들은 죽기 직전에 흡혈귀로 만들어 죽이지는 않았다는 게 된다.

     “…후.”

     “왜 그러니, 아이야.”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배후에 대한.

     “흡혈귀 문제에 관하여 왜 지브롤터를 찾아오신 건가.”

     현실에 대한.

     “왜 저를 숲으로 초대하시는 건가. 그 이유를 짐작하자면.”

     그리고 앞으로의 대처에 대한.

     “백금경께서는 저희 지브롤터가 흡혈귀를 사냥하는 사냥꾼이 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어느정도는.”

     “그리고 저를 엘프의 숲에서 직접 지도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정확하단다.”

     “그리하여, 그레이 지브롤터를 흡혈귀 사냥꾼으로 키울 생각이다?”

     “네가 이미 세빌리야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단다.”

     아이페리아는 거래를 원한다.

     “수호자여. 이 이야기는 기록에도 남기지 말고, 누구에게도 전하지 말거라. 약조할 수 있겠느냐?”

     “지브롤터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말씀하시오.”

     “본녀는 [크로노스트럼]과의 계약에 따라…아. 노스트럼 왕국의 수호룡, 골드 드래곤을 말하는 것이다.”

     “……전설이 아니었습니까?”

     “전설이라니. 실존하는 분을. 그분과의 계약에 따라, 본녀와 엘프들은 숲과 협곡을 넘어 제국 방향으로 갈 수 없다.”

     백금경이 탁자에 손을 세우고는 서쪽으로 쓸었다.

     “엘프들에게 허가된 곳은 황금룡의 영역뿐. 그대들, 지브롤터가 지키는 노스트럼의 땅을 말하지.”

     “노스트럼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제국 쪽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겁니까?”

     “그래. 규율이며, 맹약이며, 엘프족 전체가 그분과 맺은 계약이자 저주다.”

     “하지만 말씀을 듣자면, 변절자라는 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 황금룡과의 계율을 깨고 스스로 마족이 되어 타락한 자들이 있지. 그들을 두고 우리는 [붉은색의 노예]라고 부른단다.”

     백금경이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잠시 쿠키를 베어 물었다.

     “너희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흡혈귀, 뱀파이어, 블러디 엘프, 회색 숲의 송곳니들, 뭐 그런 거지.”

     “블러디 엘프.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최대한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백은이라는 것을 만드는 겁니까?”

     “아마도. 제국과 손을 잡았거나, 혹은 제국의 노예가 되어 움직이고 있겠지.”

     

     회귀 전에는 알지 못했던, 혹은 관심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았던, 그러나 황태자의 하수인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그러니 제안하마. 수호자. 본녀가 네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성장시켜주겠다. 그러니 그대들은 우리 엘프의 변절자를 없애다오.”

     “…….”

     “이런 걸 두고 서로 윈-윈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대들은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의 일족 흡혈귀를 제거하고, 본녀와 동족은 종족의 배신자를 제거한다. 우리가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그대들을 위해 힘을 기르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건….”

     아버지가 내게 시선을 보낸다.

     “백금경의 뜻은 알겠으나, 당대 지브롤터 백작으로서 말하겠소.”

     “말하렴.”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먼저 결심을 한 듯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흡혈귀라는 자들, 그리고 그 흡혈귀의 잔재를 이용한 자들이 현재 지브롤터는 물론이거니와, 노스트럼을 공격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

     제국의 그림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은 아들을 함부로 엘프의 숲에 보낼 생각은 없소.”

     “흐음….”

     “흡혈귀 사냥 또한 마찬가지. 그것이 우리 지브롤터에 피해를 입힌다면 마땅히 목을 베어 태양 아래 말뚝을 박아놓을 것이나, 그것을 인생의 사명처럼 두지는 않겠소.”

     아버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레이에게는 그레이의 인생이 있으며, 그건 그레이가 선택하는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흡혈귀 사냥꾼이라는 삶을 살기에는 그레이의 재능이 너무나도 아깝지.”

     “…그렇군. 어떤 면으로는 지브롤터답지만, 가장 지브롤터에서 이질적이로구나.”

     백금경이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입술 옆, 점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알겠다. 본녀도 딸의 축복을 받은 아이에게 엘프의 규율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 그렇다면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 수밖에.”

     “거래?”

     “수호자, 그대의 후계자에게 힘을 전수해주겠다. 그 대신 눈에 보이는 흡혈귀들은 절멸시키겠다고 약속해다오.”

     

     백금경의 제안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흡혈귀를 죽이기 위해 힘을 전수했으니, 흡혈귀를 죽이는 건 당연지사. 한평생을 흡혈귀만 죽이기 위해 일생을 바치라는 건 아니지만, 그대들의 앞길에 흡혈귀가 방해된다면 가차 없이 베어 넘기라는 거지.”

     “흐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군. 알겠네. 그렇다면….”

     백금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분 정도 시간을 주지. 그사이에 결정하도록.”

     “…3분? 그사이에 결정하라고?”

     “그렇다만.”

     “빠르게 결정해야 할 만큼 조급한 사안이오?”

     “아니. 그저 본녀가 길게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을 뿐이다.”

     백금경은 초조한 듯 발로 바닥을 계속 두드렸다.

     “그렇게까지는….”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곁을 떠나면 조바심이 나는 것처럼, 엘프의 하이로드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런 건가…?”

     “예. 아무래도 숲을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고, 엘프의 숲에는 그 세계수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과연. 이해했다.”

     아버지가 지금은 좀 여유가 생겼지만, 어머니 대유법은 언제나 통하는 법.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조건 가야 한다.

     “제 스승은 멘테 경이지만, 멘테 경은 지금 자기조정이 필요한 순간이죠. 제법 길게.”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멘테 경이 마스터로서 확실히 자리 잡는 동안 저는 엘프의 사냥법을 배워보겠습니다.”

     “엘프에 관한 건 그저 전설로만 들어왔을 뿐이다. 괜찮겠느냐?”

     “예.”

     무엇이 괜찮은가.

     “혼자 가도, 저는 괜찮습니다.”

     엘프에게는 인간의 상식과 법도가 통하지 않는다.

     “괜히 대외적으로 그레이 지브롤터가 엘프에게 초대받았다느니 뭐니 떠들게 할 생각도 없는 만큼, 조용히 혼자 다녀오면 되겠죠.”

     “…….”

     호위는 없다.

     가는 건 오직 나,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인간 한 명뿐.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엘프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진심이다.

     ‘순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거의 단기간에 일어난 일일 거야.’

     에르윈 아이페리아의 사망.

     엘프족 전멸.

     ‘에르윈 아이페리아는 아스타시아를 인질로 삼아 묶어둔 뒤, 마스터 8명을 데리고 엘프의 숲을 습격해 백금경과 엘프들을 학살했다.’

     가능성 있다.

     아니, 거의 확정된 미래에 가깝다.

     ‘엘프의 숲을 지나는 진군 루트도 있었으니까, 거슬리는 엘프들을 치워버린 거겠지.’

     예상이 가는바.

     “한 가지, 백금경께 여쭙겠습니다.”

     “물어보렴.”

     “인간과 엘프의 차이에 대해 잘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런데, 솔직하게 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질문이니?”

     “아뇨. 질문은….”

     나는 내 이마를 가리켰다.

     “에르윈 아이페리아를 사랑하십니까?”

     “…….”

     “당신의 딸. 그녀가 만일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너는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이야.”

     백금경은 정색하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엘프와 인간은 분명 차이가 있지. 하지만.”

     심호흡까지 하며.

     “어떤 생물이 위험에 처한 자식을 그대로 놔둘 수 있겠느냐. 나는 엘프이기도 하지만, 에르윈의 어머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답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3시간 내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백금경의 말대로, 인간과 엘프 이전에 어머니는 모두 같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렇게 급작스럽게 정해버리니. 아니,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긴 한데.”

     방에서 불려 온 어머니는 상황을 듣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니?”

     “예. 괜찮습니다.”

     “사냥 원정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니. 하아….”

     “나중에는 아카데미에 가게 되면 지금보다 더 오래 떨어지게 될 텐데, 익숙해지셔야죠.”

     “…….”

     “저도 이렇게 정을 떼기 힘들어하시는데, 누아르나 레타르, 루비, 마린, 사피는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그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해서, 너를 덜 신경 쓴다는 건 아니란다.”

     어머니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답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백작님처럼 너를 믿는 것뿐이야. 네가 언제나 그렇듯 옳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단다.”

     “어머니.”

     “그래도 시간만 좀 있었다면, 어떻게 뭔가 조금이라도 챙겨줄….”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잠시 착각을 하신 모양인데.”

     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반응이 나오는 어머니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는 장소가 엘프의 숲이라서 그런 거지, 그냥 단기 유학일 뿐입니다.”

     “…응?”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백금경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기로 해서, 열흘에 한 번 정도는 영지에 올 수도 있고요.”

     “……뭐?”

     어머니가 잠시 표정이 굳었다, 그대로 다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너, 너…!”

     “제가 뭐 1년, 아니 3년 막 넘게 엘프의 숲에 있는 줄 아셨습니까?”

     “그러면 그것부터 미리 말했어야지!”

     “그걸 말하기도 전에 먼저 넘겨짚어서 울려고 하시길래,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를, 동생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무력도 재력도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이미 지브롤터에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말 하면 이상하기는 하지만, 엘프의 숲도 사람 사는 동네일 겁니다.”

     어머니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야, 지브롤터가 굳건할 수 있으니.

     “엘프의 숲에 무슨 큰 문제라도 있겠습니까. 힘을 기르러 가는 건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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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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