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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2

       이른 오후.

       여름날의 무더운 햇볕이 땅을 내리쬐니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푹푹 찌며 괴로운 날씨가 아닐 수 없었으나, 이러한 불쾌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후우웅! 후웅-!

         

       “…….”

         

       소녀는, 아니 그녀는 묵묵하게 검을 휘둘렀다.

         

       주르륵….

         

       땀방울이 연신 쏟아지며 그녀의 온몸을 불쾌하게 적셨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백 번의 내려치기.

         

       그냥 내려치기 동작이 아니라,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완벽한 내려치기를 구사해야지만 ‘한 번’으로 인정받는 바.

       그런 뜻에서 지금 그녀가, 레비의 내려치기를 무려 7백 번은 가뿐히 넘도록 휘두르고 있었으나 여전히 완전한 백 번을 채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만족할 만한 내려치기를 아직 서른 번밖에 구사하지 못하였기에.

         

       ‘검이란 건, 정말 어려운 거구나.’

         

       입이 바싹 마르다 못해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레비는 지쳐 쓰러지는 대신 검의 심오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 깊이가 남다르다.

       똑같이 휘두른다 생각해도, 휘두를 때마다 보이는 궤적이 다르며 검에 담긴 마음이 달라진다.

         

       하여 레비는.

         

       ‘…재밌어!’

         

       그래, 재밌었다.

       이토록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단 사실이.

       그리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단지 검술만 재밌는 것이 아니다.

       이후 배울 궁술이 기대가 되었으며, 새로운 예법과 언어학 등을 배우는 것도 기대가 된다.

       뿐만 아니라 스승을 위해 요리를 배우는 일도 당장 하고 싶다.

         

       이토록 자유롭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삶이라니…!

         

       이토록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다만.

         

       “아가씨.”

         

       움찔!

         

       “슬슬 지치시는 것 같으니, 훈련을 잠시 멈추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

       “기사님도 말했답니다. 수분 보충과 휴식도 확실히 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는다면 몸에 독이 된다고요. 허니, 이제 그만 멈추시지요, 아가씨.”

       “으음….”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만, 삶의 환경이 갑작스럽게 바뀐 부분만큼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레비였고, 그녀는 소심한 기색으로 시녀에게 말했다.

         

       “그…. 알겠으니까 그 아가씨란 말을 좀 멈춰주면 안 될까요?”

       “어머, 어째서요?”

       “…왠지 안 어울리는 옷을 입거나, 주제 넘는 짓을 하는 것 같아서요.”

         

       레비의 솔직한 심경.

       물론 그녀가 ‘아가씨’란 호칭을 듣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가짜의 삶]이었다고 할지언정, 귀족 영애의 삶을 살았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진심으로 존중 어린 어투로 자신을 대하는 사람을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이게 무어랄까.

       예시를 들자면 그동안 연극배우로 살았는데, 그 연극배우의 삶이 현실이 된 것 같은 느낌?

         

       아마 그러한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었고, 레비는 다른 의미로 땀이 났다.

         

       이러한 과도한 대접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어서.

         

       “어머, 또 땀이. 이러니 검을 수련해도 안에서 해야 하는 건데, 고운 피부가 다 상하시겠어요.”

       “…괘, 괜찮아요. 피부야, 뭐….”

       “피부도 중요하답니다. 아가씨께선 각하의 딸이심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후작 영애란 위치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며, 필요한 품위와 행동거지, 그리고 항상 고결한 몸가짐을 잊으시면 안 된답니다.”

       “…….”

       “항상 타의 모범이 되셔야 할 신분이 되셨으니, 검술뿐만 아니라, 겉모습 또한 타인들에게 경외를 일으키는 분이 되셔야 하는 겁니다. 하니, 부디 제가 쓴 소리를 하여도 이해해주시길.”

       “…아, 무,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딸이라도 수양녀에 불과한데 너무….”

       “호, 감히 가문 내부에서 아가씨가 수양녀란 이유로 핍박하는 무도한 자가 있었습니까-?”

       “…….”

       “있었다면 저에게 바로 말해주시길.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아, 아니요, 그런 사람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군요.”

       “…….”

         

       …무섭다. 아니, 어렵다.

         

       검보다 대하기 어렵다.

         

       이 사람, 처리한다는 게 그 사람을 묻어버리겠다는 뜻처럼 들린다.

         

       하여 레비는 결심했다.

         

       ‘앞으로 입조심해야지.’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 사람 여러 명 죽어나갈 우려가 있으니, 앞으로 절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자고.

         

       레비 19세.

         

       트리스탄 영애로서의 삶이 역시 과분하다는 것을 여실 없이 느끼는 하루였다.

         

       * * *

         

       – 네, 될게요.

       – …….

       – 아, 혹시 농담이셨나요?

       – 아, 아닐세. 오히려 너무 흔쾌히 받아들여서 놀랐을 뿐이지, 허허….

         

       종업식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비는 트리스탄 후작에게서 입양 제의를 받게 되었고, 이를 1초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

         

       당연한 노릇이었다.

       언제까지도 사부님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며, 더 이상 빌붙는 것은 염치가 없는 거니까.

       그녀는 사부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 거머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여 트리스탄 후작이 건넨 제안은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다.

       비록 결혼까지 할 뻔한 사람의 딸이 된다는 것이지만, 이런 제의가 감히 돈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기적임을 그녀가 모를 수가 없다.

         

       무엇보다.

         

       – 감사해요, 사부님.

         

       이 또한 사부의, …그녀의 인생에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사람이 피땀을 흘리며 만들어 준 과분한 기회임을 알기에 받아들이는 게 당연할 따름.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 하, 하지만 한 가지 말해야만 하는 게 있어요. 저는….

       – 아, 그 점이라면 알고 있네. 딱히 밝히지 않아도 되고.

       – 네에?

       – 허허, 이건 선물이네. 알아서 잘 쓰도록 하게나.

       – …….

         

       레비는 감추고 있던 것.

       그건 바로 자신의 출신과 신분이었다.

         

       이를 제 입으로 밝히고자 했지만, 후작은 그녀의 말을 막으며 반지와 양피지 한 장을 내밀 따름이었고, 이를 보며 레비는 두 눈을 부릅떴다.

         

       – 그, 그게 어째서….

       – 폴트 가문의 모녀가 각각 보관하고 있더군. 아마 제 남편이나 아비에게 받은 것이겠지.

       – …….

       – 일단 우리 쪽에서 수거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인은 따로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 …후작님은, 이걸 아시면서도 저를 받아주시는 건가요?

       – 받아주는 게 아니네. 도리어 내쪽에서 부탁하는 거지. 자네처럼 재능 많은 아이를 자녀로 삼을 수 있는 기회를 부디 내게 줄 수 있냐며 부탁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야, 허허.

       – …….

         

       레비는 이때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자신이 이토록 가치 있는 사람이었나 싶은 의아함과 넘치도록 찾아오는 행운에 마냥 아연실색한 것이었다.

       그러며 저도 모르게.

         

       – 사부님….

         

       이 행운을 불러주신 자신만의 파랑새를 부르며 눈물 대신 미소가 그려지더라.

         

       사람은 때론, 너무 행복하면 눈물 대신 웃음이 난다는 걸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현재.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레비는 자신의 땀을 닦아주는 낯선 시녀의 손길을 견뎌내며 애써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후작이 준 양피지…, 아니 그녀가 원해서 쓴 게 아닌 강제로 납치당하며 쓰게 되었던 ‘노예 계약서.’

         

       그 계약서를 불태운 건 벌써 일주일이 흘러간다.

         

       …다만, 반지.

         

       이건 어떻게 함부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비록 노예 신분은 사라졌지만, 자신의 등 뒤에는 여전히 [복종의 각인]이 남아 있는 바.

       그리고 이 반지는 그런 복종의 각인의 촉매와도 같은 것으로 이것을 없애는 게 제일이겠지만.

         

       ‘그건 하책이죠.’

         

       복종의 각인이 괜히 저주라 불리겠는가?

       한 번 새기는 순간 촉매를 없앨지언정 쉽게 사라지지 않기에 저주라 불리는 것이다.

       반지를 없앤다고 한들, 위법 마법사 같은 것들이 그녀의 각인을 본다면 즉각 새로운 촉매를 만드는 것도 쉽다.

         

       하니 기존의 촉매를 없애는 게 아닌, 복종의 각인 자체를 그녀의 몸에서 추출하는 게 답이었고, 안전하게 추출하는 방법을 찾을 때 동안만큼은….

         

       ‘반지는 지금 당장 없애면 안 돼요.’

         

       오히려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 반지는 말 그대로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이니까.

         

       하여 레비는 오랜 고민 끝에 이 반지를 타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것?

       그것만큼 불안한 게 없다.

       아직 보호받는 것밖에 못하는 약한 그녀가 어찌 이 반지를 지킬 수 있으랴.

         

       하니 맡길 것이다.

       믿음직하고, 그녀가 아는 한 가장 듬직한 남자에게.

         

       다름 아닌.

         

       “…사부님은 어디 계시죠?”

       “기사단이랑 같이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안내를-.”

       “아, 아니에요. 제, 제가 찾아갈 수 있어요.”

         

       레비는 멀리서 대기하는 시녀들이 따라올까 싶어 재빨리 발걸음을 놀렸다.

       움직일 때마다 시녀 다섯 명 이상이 따라오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그녀는 땅을 박차듯 내달렸다.

         

       “아가씨!”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비는 마음 속으로 사죄를 건넬 뿐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후작가 영애의 삶이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아마 5년은 지나야 익숙해지지 않을까?

         

       소시민을 넘어 사람에게 많은 배신을 당한 상처 입은 파란 고양이의 트리스탄 적응기는 한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 * *

         

       쏴아아아.

         

       역시 대귀족 가문의 훈련장이라고 해야 할까?

       흔히 훈련 시설이라고 하면, 그냥 평범한 연병장이나 그도 아니면 헬스장 시설 정도가 훈련장이라 할 만한데, 그들…, 적혈수리 기사단이 훈련하는 훈련장은 아예.

         

       ‘어떻게 훈련장에 폭포도 있냐?’

         

       그 수준이, 아니 환경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흐르는 폭포는 마냥 시냇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수준의 폭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폭포.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한데 그런 폭포가 훈련장에 있다.

       마법사들을 대거 동원하여 만든 인공 폭포라고 하는데, 역시 대귀족 정도 되면 훈련장에 투자하는 클래스조차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게 폭포지.’

         

       물론 폭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클라이밍이란 스포츠조차 없는데도, 이와 비슷한 절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냈을뿐더러, 30미터 밧줄 오르기나 늪지대와 모래 지대 같은 훈련 시설조차 있으니, 원.

         

       ‘백은사자는 이런 시설 없던데.’

         

       뭐, 거긴 개인 훈련을 중시하는지라 이런 시설이 없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왕실 기사단인데, 이게 참….

         

       ‘비교 안 하고 싶어도 비교를 하게 되네.’

         

       마치 마이너 리그에 있다가, 갑작스레 올림픽 선수를 위한 최고급 훈련시설에 오게 된 느낌.

         

       ‘이야, 가정방문 자주 해야겠다.’

         

       다른 시설도 물론이지만, 아무래도 폭포가 가장 시선과 가슴을 사로잡았기에.

         

       “…무협식 훈련은 역시 이게 제일이지.”

         

       폭포 맞기 훈련.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던 훈련을 할 수 있음에 흐뭇함을 머금는 이한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전에도 물어봤지만, 대체 그놈의 무협이 뭔가?”

       “나 같은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지.”

       “…그거 참, 무서운 동네가 아닐 수 없군.”

         

       적혈수리 기사단의 부단장 베일.

         

       그는 실시간으로 수백 키로의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 속에서 ‘스쿼트’를 하며 즐겁게 웃는 그를 향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며 생각한다.

         

       ‘무협이라, …어떠한 곳인지 모르겠으나 저런 가학을 즐기는 변태밖에 없는 것인가?’

         

       …참으로 몹쓸 동네가 아닐 수 없구나.

         

         

       무협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오해가 생기는 베일이었다.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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