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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3

       “짝사랑에 실패한 경험을 듣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일까?”

         

       성지의 하얀 복도를 같이 걸어가던 멜리사가 얼떨떨해했다.

         

       “어렵겠죠? 아무리 상대가 사용인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때의 순정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었을 테니까요.”

         

       허억.

         

       완전 낭만적인 말.

         

       엄마가 한 때는 악마님의 모든 것?

         

       으잉.

         

       기분이 복잡미묘.

         

       상상이 안 가.

         

       “어쩌다 자유연애에 호기심이 생겼나요? 파스텔 당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요?”

         

       멜리사가 의아해했다.

         

       “그건 아니고오. 그러고 보면 앨시어도 자유연애라고 하더라? 귀족으로서 터부시되는 행동인가?”

         

       인기인 파스텔은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것?

         

       멜리사가 살짝 고민했다.

         

       “터부시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권장하진 않는 사람이 많은 편이죠. 어차피 가문의 의사가 중요하니까요.”

         

       가문끼리의 약혼?

         

       헤에.

         

       “멜리사도 약혼 상대가 있다던가?”

         

       멜리사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저는 어머니께서 차차 스스로 결정하라 하셔서요. 크게 생각해 본 적은 아직 없어요.”

         

       스스로 결정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는 모범생 친구. 그게 진정으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본받을 만한 태도야.

         

       “앨시어는 있나?”

       “없을 걸요……?”

         

       멜리사가 금색 머리카락을 꼬았다.

         

       “소식을 듣진 못 했지만 이런 사안은 가문 내사니까요. 잘 모르겠네요.”

       “너희 사이 좋아진 거 맞지?”

         

       나와 떨어진 뒤 같이 기사단 관리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며. 여태 친구 아니라고 부정했던 네 말로는.

         

       “그럼요. 친구, 인진 모르겠지만 평범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으이.

         

       그럼 친구가 아닌 거잖아.

         

       그래도 싸우는 상태보다는 낫나.

         

       “잘됐네!”

       “그렇죠?”

         

       멜리사가 기분 좋은 표정이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문끼리 사이가 안 좋다고 싸우는 것보다는 친한 게 낫지.

         

       “아아~!”

         

       파스텔은 뒷짐을 지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사랑이 필요해요~. 연애, 약혼, 연애, 약혼~. 그 이름을 부르면 연애가 낫지만~.”

       “파스텔 당신이 가주니 자유연애를 해도 약혼과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을 일은 없잖아요.”

       “그런가아? 그러면, 그 이름을 부르면 약혼이 낫지만~.”

         

       약혼이라고 하니 사랑을 알 수 있을진 의문이긴 해도.

         

       “약혼은 어떻게 해?”

         

       멜리사가 잠시 생각했다.

         

       “저도 듣기만 했지만 많은 초상화가 가문에 와요. 그중에서 가문 이력과 인적 사항을 살펴 선별하고는 당사자나 그 부모님이 고르죠. 몇 차례 만나며 인상과 성정을 서로 확인하고 그다음 약식 협의하는 식으로 알고 있어요.”

       “완전 딱딱!”

         

       상상했던 게 아니야!

         

       이런 건 전혀 사랑스럽지 않아!

         

       약혼은 역시 약혼이구나!

         

       “그런가요?”

         

       멜리사가 당혹스러워했다.

         

       “당신이 듣기론 엄격해 보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리 낭만 없이 이루어지진 않아요. 저희 부모님도 이런 방식으로 만나셨지만 금실이 좋으세요.”

       “그래애?”

         

       시대와 상황에 맞는 사랑 방식이 있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재미는 있겠다!”

         

       응응!

         

       멜리사가 살짝 우물쭈물했다. 절친의 너무 가벼운 마인드에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크래프트 가문의 내사에 너무 참견하는 발언일 거 같아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다 결국 다른 얘기를 꺼냈다.

         

       “기사단은 어떻게 정리할까요? 상황상 별수 없이 내통죄로 즉결 심판하긴 했지만 언제까지 제가 통솔권을 쥐고 있긴 난감해요.”

       “아 그거?”

         

       교단과 내통한 계파는 처리했으니 기사단이 알아서 자정 작용하게 내버려도 되겠지만…….

         

       “통솔권을 얻은 김에 구조조정 하는 게 어때? 절반 인원 정도로. 너무 빈자리는 새 사람으로 신규 채용하고.”

       “저, 절반이요?”

         

       멜리사가 충격받은 표정이 됐다.

         

       “응! 어차피 다들 일 못하니까!”

         

       괜한 인원으로 업무 분위기 망가트릴 바에야 정예화라는 거지.

         

       리스크는 있지만 기사단이 여태 한 일을 생각하면 전체를 들어내야겠다. 교단도 한차례 토벌했으니 안전에 여유가 생긴 좋은 시점이기도 하고.

         

       “놀러 온 건지 짐가방에 불필요한 걸 너무 가지고 다니더라구! 소풍인가?”

         

       파스텔은 멜리사에게 다가갔다. 금색 머리카락을 들어 향기를 맡아봤다.

         

       멜리사가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했다.

         

       오잉, 아무 향기도 안 나네?

         

       남부 사령관 후계자님은 현장 야영 중이라고 비누로 씻었는지 아무 향도 안 났다.

         

       “향료 안 썼어?”

       “안 가져왔어요.”

       “기사단 짐에 있던데? 이왕 가져온 김에 빌리지.”

       “저도 그런 건 즐기지만 이럴 땐 삼가고 있어요. 향기는 사냥개에게 추적당하기 좋으니까요. 제 취향을 미리 파악하고 그 향기로 훈련해 두면 아무리 위장해도 위치를 발각되고 말죠.”

         

       으에, 초-엘리트.

         

       막상 머리 감을 땐 뻑뻑한 비누는 시선도 안 준 파스텔은 살짝 찔려.

         

       “멜리사!”

         

       친구를 꼭 끌어안았다.

         

       “내 아래에 멜리사 같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

         

       완전 완전 마음이 편해!

         

       “그, 그런데 절반이나 줄이면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단원도 그렇지만 기사단장님은 컨트롤하기 어려워요.”

         

       기사급이시니까.

         

       “기사단장님과는 내가 이미 협의해 놨어!”

         

       어제는 파릇파릇하지 못한 정신 상태였지만 일은 해놨다구.

         

       기사단에 과하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사실을 덮는 대가로 아카데미의 통제를 따르기로 했다.

         

       “구조조정 구상도 대략 뽑아놨으니 기사단장님과 얘기해 봐!”

         

       기사단을 미리 조사하며 내부 사항을 살펴본 게 도움 됐다. 디테일은 다시 조정하긴 해야겠지만.

         

       멜리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손이 뒤늦게 입을 가렸다.

         

       “역시 당신이에요. 막힘이 없군요. 여기까지 계획했던 거였어요.”

         

       허억.

         

       그런 거야?

       “기사단이 사실상 아카데미 산하에 들어오면 하늘섬에 당신을 막을 사람은 없겠죠. 예전의 영광은 아직 멀어도 크래프트 가문을 재건할 기반이 될 거예요.”

         

       파스텔은 감동했다. 손을 잡고 흔들었다.

         

       “멜리사아! 절친을 이렇게 걱정해 주고 위하다니! 너밖에 없어!”

       “그런가요?”

         

       멜리사가 살포시 웃었다.

         

       “그렇다면 친구로서 말할게요. 이제 불명예스러운 밀무역은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공권 남용이 매우 좋진 않아도 가문 재건을 위한 일이니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어요. 하지만 밀무역은 너무 불명예스러운걸요. 크래프트 상단의 운영비를 학생회가 대는 이상한 구조도요.”

         

       오잉.

         

       파스텔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허억.

         

       복도에 개미가 지나가는 중!

         

       완전 바빠 보인다!

         

       “멜리사! 우리도 개미 친구처럼 일할 시간이야! 노획품 확인은 나 혼자 할 테니 너는 기사단장님과 얘기를 나눠봐!”

       “네?”

         

       파스텔은 후다닥 도망쳤다.

         

       후다다닥.

         

         

         

       #

         

         

         

       “우와아! 엄청 많네요!”

         

       파스텔은 쌓인 황금과 마석을 보고 입이 헤 벌어졌다. 교단이 현물 자산을 죄다 놓고 도망쳐 버린 모양이다.

         

       이것이 약탈의 맛……!

         

       해적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전액 압수! 전액 압수!”

         

       즉석에서 노획품 압수를 결재했다.

         

       어차피 이제 권력자 파스텔 위에 아무도 없어!

         

       “아기새 친구 잘했어!”

         

       옆에 있는 거대 병아리의 털을 거칠게 문질렀다.

         

       “너희가 없었으면 구석 땅굴에 숨겨둔 이것들을 찾기 어려웠을 거야!”

       ―삐약!

         

       아기새가 으스댔다.

         

       “잘했어! 잘했어!”

         

       황금과 그와 비슷한 가격의 마석만 보고도 압수가 결정됐지만 일은 꼼꼼히 해야 하니 전체 노획품을 살폈다. 모아둔 어느 창고에 들어서자 약초 냄새가 났다. 포댓자루와 나무상자가 보였다.

         

       “상비약인가요?”

       “포로를 통해 확인해 보니 하늘고래에서 가져온 것들이라 합니다. 하늘섬을 정기방문하는 고래 말입니다.”

       “아 그 고래 친구요?”

         

       나도 친구친구 모아서 알뜰하게 약초 팔아 학생회 예산을 만들긴 했어.

         

       ―삐약! 삐약!

         

       공로자 지위로 같이 구경하던 아기새가 날개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웬 화려한 보물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잉.

         

       “저건 뭐예요?”

         

       기사단원이 곤혹스러워했다.

         

       “저희도 잘은……. 교단이 하늘고래 등 위에서 망가진 유적을 발견하고 조사했다가 발견한 전리품이라 합니다.”

       “뭐가 들었는데요?”

       “그건, 모르겠군요.”

       “안 열어보셨어요?”

         

       노획품을 관리할 거면 열어보는 게 맞지 않나.

         

       기사단원이 당황했다. 스스로도 왜 열어볼 생각을 안 한 건지 굉장히 믿기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확인해 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뭔가 고개가 갸웃되는 기이한 실수였다. 파스텔은 구조조정 목록을 갱신하려다가 말았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꼼꼼히 하세요!”

         

       보물 상자를 열어보실까나.

         

       파스텔은 흥얼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상자가 기분 좋게 딸깍이며 열렸다. 이렇게 쉬운 걸 열 생각도 못 하다니.

         

       상자 안을 들여다 보자 뭔가 익숙한 보석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마왕의 유적에서 얻었던 것들처럼 생겼다. 마석 섭취의 권능이라거나 마석 조종의 권능 같은 거.

         

       손이 슬쩍 상자를 덮었다. 조용히 생각하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작은 나침반이 꺼내졌다. 나침이 상자를 가리켰다.

         

       우와앙!

         

       전대 마왕님이 유산 찾으라고 줬던 운명 나침반이! 존재도 까먹고 있었지만……!

         

       “압수! 압수! 전량 압수!”

         

       상자를 통째로 챙겨 들었다.

         

       “위험해 보이니 이건 손수 관리하겠어요!”

         

       일을 빠르게 끝냈다.

         

       조리실에서 파이 반죽을 만들던 악마에게 달려갔다.

         

       “악마님! 악마님!”

         

       머리에 얹은 보물 상자가 흔들렸다.

         

       『기다려라. 아직 안 됐다. 저기에 앉아 기다리, 그건 왜 머리에 올린 거지?』

       “이건 그냥 모자구요!”

         

       보물 상자를 대충 선반에 놓았다.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냈다.

         

       “마왕의 유산!”

         

       똑똑한 파스텔이 찾아냈음!

         

       『성지에 유적이라도 있었나?』

         

       악마가 앞치마를 벗었다.

         

       『괜히 떨어져 있었군. 다친 곳은 없는 건가?』

         

       붉은 눈동자가 살펴봤다.

         

       “악마님께 차마 말할 순 없지만 저 혼자 매우 고된 여정 끝에 유적을 공략하고 권능을 당당히 쟁취해 냈어요!”

         

       뿌듯.

         

       『어떤 여정이었길래 그러는 거지?』

       “엄청난 여정이요! 하늘고래 백만 마리와 친구가 되는 여정!”

         

       허억, 엄청나다.

         

       이 정도면 세계 정복도 할 듯!

         

       『고생했군.』

       “맞아요!”

         

       운명 나침반 겸 보석함을 열어 보석을 수납했다. 빈자리에 알맞게 착 들어갔다.

         

       “허억!”

         

       분홍 눈동자가 동그랗게 됐다.

         

       “이 느낌은! 이 느낌은!”

         

       파스텔은 굉장히 흥분하다가 눈을 굴렸다.

         

       아무 느낌도 안 나.

         

       전대 마왕님, 사용 설명서 좀.

         

       『이건 마석 변환의 권능이군.』

         

       허억.

         

       마석 변환?

         

       “마석을 피자로 바꿀 수 있다거나?!”

         

       근데 말하고 보니 황금 가격인 마석을 피자로 바꾸면 백만 배 손해!

         

       『피자가 될 리가.』

       “역시 그렇겠죠!”

         

       헤헤.

         

       파스텔은 주머니에서 간식용 마석을 꺼냈다. 이 마석 친구는 주머니에 있고 싶다고 사정해서 특별히 소원을 들어준 참이다.

         

       『거리를 벌리는 게 좋겠군.』

       “네에.”

         

       야외로 나와 바위에 마석을 올려놨다.

         

       양손을 뻗었다.

         

       “흐아압!”

         

       뭔지 모르겠지만 권능 빔~!

         

       “초능력 빔빔~!”

         

       마석이 검은빛을 냈다.

         

       이것은? 이것은?

         

       마석에서 에너지가 몰아쳤다. 임계점에 달한 순간 강렬한 빛이 몰아쳤다. 폭발이 일고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후폭풍이 바람을 일으켜 분홍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으에.

         

       파인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악마가 담담히 말했다.

         

       『마석이 에너지로 변환됐다.』

         

       파스텔에겐 이렇게 들렸다.

         

       황금이 공기로 변함.

         

       “으아아! 내 황금값이……!”

         

       가루도 안 남은 잔해가 보였다.

         

       털썩.

         

       “마석 친구우!”

         

       차라리 피자로 변해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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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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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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