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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3

     

    나는 내의원에서 나와 월광궁에서 밤을 맞이했다.

     

    저녁 내내 쓰러져 있었기에 아셀라의 저녁 진료는 클로에에게 맡겼다.

     

    “의학이 B랭크로 올랐지.”

     

    수술 경험치가 상당히 쌓여 스킬 랭크가 오른 덕분이다.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은 두 개야.”

     

    [응급처치] 트리에는 새 스킬이 팝업됐다.

    [성형수술]이다.

     

    분명 수요는 많겠지만 당장 필요한 스킬은 아니다.

     

    진단 계열은 [CT촬영]을 습득할 수 있긴 했지만 MRI에 비해 큰 효율이 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MRI로 아셀라의 전신이나 각종 저주 등 버프, 디버프를 가진 마물 등은 촬영을 마치고 휴고에게 자료로 넘겨놨다.

     

    스킬 사용법이 기묘해서 촬영하는 동안 아셀라가 질색하긴 했다.

     

    “처방 계열도 슬슬 올릴 때가 됐나.”

     

    처방의 다음 스킬인 [처방전 작성]을 습득하면 그 다음 스킬트리도 개방되겠지.

     

    쓸만한 게 나올지도 모른다.

     

    “좋아, 열어보자.”

     

    나는 [처방전 작성]을 우선 습득했다.

     

     

    [처방전 작성 C : 환자의 증상을 문서로 작성합니다. 환자가 처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학의 개념을 문서로 남길 수 있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스킬이다.

     

    이걸 쓰면 의학적 기본지식이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 설득할 수 있다.

     

    습득을 완료하니 다음 스킬명이 나타났다.

     

    “[추가 소견]이라.”

     

    세컨드 오피니언이라고도 한다. 한 번의 진료만으론 잘못 진단할 수도 있으니 다른 의사에게 같은 진료를 반복해 받는 행위다.

     

     

    [추가 소견 C : 환자의 가족병력, 유전자를 고려하여 처방전의 적합도를 검증합니다.]

     

     

    재미있네.

     

    내가 처방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요소를 검증해준다는 뜻이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직접 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아셀라에게는 효과적일 수 있겠다.

     

    그녀는 마녀 카밀라의 우수한 마력도 이어받았고, 품은 재능 때문에 사실상 특수 체질이라고 봐야 한다.

     

    의사가 진료하기 까다로운 환자에는 대표적으로 내장 역위증이 있다.

     

    일반적으로 심장은 왼쪽에 위치하지만, 내장 역위증인 사람은 몸 안이 좌우반전 되어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

     

    이걸 파악하지 못하고 심장 수술을 위해 가슴을 째기라도 했다면 그 순간 긴박하게 대응해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아셀라 역시 그런 느낌으로, 특별한 처방이 필요한 체질이다.

     

    “좋아, 습득.”

     

    앞으로 내가 아셀라에게 내릴 처방이 올바른지 판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킬창을 치우니 조금씩 감소하는 체력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

    근력 : 18

    체력 : 20/22

    마력 : 1

    마나 : 36

    신성력 : 38

    신앙심 : 100

    ―――――――――――

     

     

    “디버프로 인한 감소는 일반적인 치유주문으로는 안 올라가.”

     

    토혈도 심해져서 빈혈까지 왔다. 위장에 걸린 디버프가 틀림없다.

     

    재능의 대가는 아셀라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현대 병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아이템, 즉 내가 만든 약제나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러고 있으니 방문이 달칵 열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한 명 뿐이기에 상태창을 치우고 그녀를 맞았다.

     

    “황녀님.”

     

    “공자.”

     

    아셀라는 푹신한 슬리퍼로 양탄자를 밟으며 내 앞에서 팔짱을 꼈다.

     

    “오늘 일에 대해 설명할 거 없어?”

     

    “아, 별일 아닙니다. 최근에 큰 수술이나 약혼식을 하면서 체력이 조금 떨어졌던 모양이에요.”

     

    주치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서일까, 내 대답에 아셀라가 눈가를 찌푸렸다.

     

    어쩐지 걱정도 살짝 드러나는 표정이지만, 아셀라가 내 몸을 걱정할 일은…

     

    뭐, 그럴 수도 있지.

     

    걱정해주면 고맙긴 하겠다.

     

    “그게 다야?”

     

    날카롭게 선 말투를 들으니 내 착각이었나 보다.

     

    “공자, 역병에 걸린 건 아니야?”

     

    “갑자기 역병이요? 아뇨, 그럴 리가요.”

     

    뜬금없이 나온 단어에 황당했다.

     

    아셀라는 내가 알려줘서 전염의 원리를 안다. 굳이 역병이라고 짚은 건, 내가 월광궁에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 경계하는 걸까.

     

    직접 역병을 제국에 푼 적도 있는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나.

     

    “정말 역병이라면 다른 분들이 감염되지 않게 제가 먼저 관리할 테니 걱정 마세요.”

     

    “뭐?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리고 그 경우엔 황녀님도 마스크도 안 쓰신 채 제게 접촉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니깐. 내가 알아서 해.”

     

    아셀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무래도 오늘 보인 모습 때문에 그녀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다.

     

    “병은 없어요. 확실합니다.”

     

    디버프는 단순한 병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다른 개념이니까.

     

    “…하아, 알았어. 그런 건 공자가 잘 알겠지. 믿을게.”

     

    “그럼요.”

     

    나는 가볍게 미소를 보이고는 아셀라에게 중요한 이슈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

     

    “일성궁에서 승부 신청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어.”

     

    “잘됐네요. 종목은 전략 모의전이지요. 지금은 저희도 병력이 꽤 있으니 유리한 편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월광궁의 위상을 높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만.”

     

    “맞아. 승부는 받아들였어.”

     

    “그래요?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알려주시면 제가 전략을 연구해 오겠…”

     

    “공자.”

     

    아셀라가 내 말을 끊고는 고개를 숙여 침대에 앉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힘차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명령이야. 이번 승부에서 공자는 빠져.”

     

    “예?”

     

    그리고 조금은 예상외의 발언을 했다.

     

     

     

    ***

     

     

     

    여태껏 없었던 불안과 초조함이 아셀라를 덮쳐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 뻔한 걸 라스의 앞이라 간신히 참아냈다.

     

    “명령이야. 이번 승부에서 공자는 빠져.”

     

    아셀라의 단호한 명령에 라스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눈을 꿈뻑였다.

     

    “빠지라니요?”

     

    “말 그대로야. 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장하겠어.”

     

    라스가 침착하게 아셀라를 설득해왔다.

     

    “황녀님, 오늘 보여드린 추태라면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또 그렇게 갑자기 픽픽 쓰러지진 않아요.”

     

    라스가 강하게 의견을 주장했지만 아셀라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못 믿겠어. 당분간은 내의원에도 나가지 말고 월광궁에서만 근무하도록 해.”

     

    “예에?”

     

    라스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내의원에서 진행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일반 환자 진료는 소속 치유사들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클로에에게 시킨 의학서 작성이나 휴고와의 저주 연구는 자신이 없으면 진행되지 않는다.

     

    출하될 약제도 검수해야 하고, 공주나 알베리치 부인이 퇴원할 때 즈음 경과도 확진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에겐 이번 승부에서 권터를 이겨야 할 목적이 있었다.

     

    당장 권터의 아티팩트를 손에 넣지 않으면 생명의 위기가 닥친다.

     

    자신이 승부 내용을 조율해서 브로치를 손에 넣을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

     

    “황녀님,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야만족을 토벌했을 때도 제 전략이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판단은 내가 내려. 더 토 달지 마.”

     

    “아니.”

     

    라스가 억울해했지만 아셀라에게는 당연한 조치였다.

     

    ‘라스가 그 치유사랑 엮여선 안 돼.’

     

    아셀라는 이미 그를 한 번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큰 절망과 상실감이 몰아닥쳤는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불과 반나절 전에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라스가 죽었어.’

     

    천리안으로 본 광경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피를 토하며 처참하게 죽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라스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그 장면이 진짜로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버렸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그를 잃게 되리라는 불안이, 손과 발끝을 뜨겁게 만들고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라스가 망가지고 추락하는 건 가문이 멸문하면서 시작해.’

     

    아셀라에겐 그 단초를 제공할 리비오를 라스가 엮이지 못하게 할 의도가 있었다.

     

    라스의 성격이라면 적극적으로 전략을 개발하고 모의전에도 직접 참가하려 할 터.

     

    그러면 리비오와 맞붙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설령 황제가 음해당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라스를 그 치료에는 절대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녀님, 이유만이라도 설명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유, 이유라.’

     

    ―나는 미래를 알아.

     

    그런 말을 대체 누가 믿겠는가.

     

    심지어 어느 마법사가 자신의 경지를 낱낱들이 남에게 말한단 말인가.

     

    그녀의 모친인 카밀라도 그녀만 쓸 수 있는 분신 마법의 원리나 도달한 과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로 했다.

     

    시모어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마법에 능통한 현자인 그가 주력으로 연구하는 경지가 어느 방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법사에게 경지의 지식은 곧 최대의 재산이자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천리안은 말할 수 없어.’

     

    아셀라가 라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공자,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야. 일성궁에서 관심 끄도록 해.”

     

    아셀라는 이번 모의전에서 권터만큼 리비오를 떨어트리는 일도 중요하다 판단했다.

     

    파벌이 약해지면 그 남자가 라스를 끌어들이는 일도 불가능해질 터.

     

    철저하게 짓밟을 각오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라스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녀님, 설득도 하시지 않고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시면 제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불합리하다니, 납득이 왜 필요한데? 황녀인 내가 내리는 명령이잖아.”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니 라스도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래, 진작 이렇게 대해야 했어.

     

    내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니 이리저리 설치다가 벌집을 쑤시는 거잖아.

     

    아셀라가 그리 생각하는데 라스가 마지막 제안을 해왔다.

     

    “명은 받들겠습니다. 다만 내의원에는 나가게 해 주십시오. 제가 없으면 파벌이 안 굴러가고 맙니다.”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아셀라가 라스의 어깨를 양손으로 팍 치며 외쳤다.

     

    왜 이 남자는 자기를 위해 해주는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걸까.

     

    “자꾸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라스가 아셀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잃으며 침대에 쓰러졌다.

     

    아셀라는 그런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누르며 눈을 마주쳤다.

     

    …자신에게 불만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런 시선을 받으니 가슴 한 켠이 아려왔지만, 강하게 밀고 나가야만 했다.

     

    지금은 생기와 의지로 반짝이는 라스의 눈빛이지만.

     

    죽음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썩은 동태처럼 시꺼매진 그의 얼굴을 아셀라는 잊을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섞였다.

     

    아셀라는 한참이나 라스를 노려보았다.

     

    라스 역시 아셀라를 노려본다.

     

     

    도중, 아셀라는 자신과 라스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아셀라의 종아리가 라스의 안쪽 허벅지에 닿았다.

     

    라스를 덮치며 쓰러트린 아셀라는 마치 먹이를 물어뜯으려는 표범의 모습이었다.

     

    “…읏.”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아셀라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한참 눈싸움을 한 끝에, 그녀는 먼저 시선을 피하고 팔의 힘을 누그러뜨렸다.

     

    이 남자가 엮이면 늘 지금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내의원에는 가도 좋아. 대신 사무실에서만 일하도록 해.”

     

    “관대하신 포용에 감사드립니다.”

     

    예의를 한껏 지키는 신하다운 말투.

     

    아셀라는 어쩐지 그 말투에 속이 답답해지고 울컥할 것만 같아서, 라스를 내버려 둔 채 방을 뛰쳐나왔다.

     

    거친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내가 해결하면 돼.’

     

    침대에 몸을 던진 아셀라는 심호흡을 하며 권터를 이길 전략을 구상하려 했다.

     

    “…윽.”

     

    하지만 그마저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조금씩 느껴지는 복통과 동시에 귓가에 속삭이듯 환청이 들려온다.

     

    ―나는 나쁘지 않아.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걸.

    ―나쁜 건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이잖아.

     

    “…시끄러워.”

     

    아셀라가 슬쩍 약지에 낀 반지를 흘겨보았다.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태아처럼 웅크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팔로 감싼 복부가 콕콕, 그녀를 약 올리듯 찔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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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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