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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3

       “딸, 이리 온.”

        

       최나경이 양팔을 벌리는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아니, 본인이 정말로 천천히 팔을 올렸기 때문일까?

        

       어쩌면, 예사라의 몸이 이전보다도 더 최나경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사라의 삶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유일하게 ‘인간다운’ 호감을 보여주었던 최나경. 그리고 너무 어린 시절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최나경 하나에게만 매달린 예사라.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뒤틀려버린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꿀렁이며 쏟아져 나왔다.

        

       한 발자국, 최나경에게 가까워졌다.

        

       느껴지는 것은 환희.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사랑하는 가족과 만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끝도 없는 증오. 자기 삶을 망가뜨린 계모에 대한 환멸.

        

       지난번에 그 감정들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예사라의 몸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느낀 위험한 감각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니, 어쩌면 내가 그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나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날 곳이 없다.

        

       애초에 이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아직 다 피워내지도 못한 한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그런 몸을 멋대로 차지하고 평생 내 것이라는 양 굴 생각은 없다.

        

       그리고, 뭐. 애초에 나는 망자가 아니던가.

        

       아무도 나를 이 세상으로 초대한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떤 방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예사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몸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격하게 예사라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기도 했다.

        

       예사라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가진 친구를 만들고, 학교 내의 규칙을 깨부수고. 그 와중에 내 것이 아닌 것을 마음껏 이용했다.

        

       사실, 처음부터 예사라를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이 몸의 주인에게 찾아올 파멸을 어떻게든 피해 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마 그 유서를 찾아보고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어떤 삶을 살건, 이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 예사라의 삶이다.

        

       주인이 따로 있다면, 돌려주는 것이 옳다. 적어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이미 죽은 망자가 남의 삶을 살아봐야 미련이고 집착일 뿐이었으니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친 한 세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한 참이었다.

        

       지난번처럼 중간에 멈추면 예사라의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뭐, 걱정하지는 않는다.

        

       저 세 사람이라면, 진짜 예사라가 돌아온다고 해도 이전처럼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세 친구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무른 곳은 하늘이의 얼굴이었다.

        

       하늘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지난번에는 너무 오버해서 말했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건 아니었는데. 지금 이 행동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괜찮아.”

        

       혹시라도 최나경이 들을까 봐, 입 모양으로만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다시 돌렸다.

        

       친구들을 돌아보는 나를 보고 잠시 표정이 흐려졌던 최나경은, 눈을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자기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아니면, 찐득한 욕망이 철철 흘러넘치는 표정이던가.

        

       ……그렇게 자기 수양딸이 사랑스러웠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정상적인 어머니가 되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가슴 속에서 흘러넘치는 증오를 그대로 느끼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시 한 걸음, 내디딘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더 진해지고 강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의 격류가 내 몸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전부 적셨을 때쯤,

        

       나는 그 감정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

        

       지난번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사라를 보고서, 최나경은 잠깐 불안감을 느꼈다.

        

       사라가 ‘제발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자신을 진심으로 바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만난 사라는 지난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한 걸음씩, 마치 억지로 걸음을 떼듯 최나경에게 다가오는 사라.

        

       심지어 도중에 멈춰서서, 저 멀리 서 있는 자신의 지인들을 바라보기까지 해서, 최나경은 속이 달았다.

        

       지난번에는 그대로 심기가 뒤틀려서 떠나버리고 말았지만,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지.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사라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최나경과 눈을 마주친 사라는, 곧장 자신을 향해 뛰어왔으니까.

        

       마치,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자기 허리에 매달려, 얼굴을 올려다보며 ‘어머님’이라고 불러주던 시절처럼.

        

       조금은 격하게, 사라가 자신의 품에 안겼다.

        

       사라의 키는 그때보다는 훨씬 컸다. 허리에 매달려서 얼굴을 들고 올려다보던 시절과는 달랐다. 이제 사라의 키는 정수리가 최나경의 눈 아래까지는 올라오는 수준이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도 훨씬 더 길러서 등에 닿는 수준이었다.

        

       사라의 작은 등을 끌어안자, 그 성장의 생생함이 촉각으로 느껴졌다.

        

       아직 풋풋하지만, 서서히 여인이 되어가는 사라의 여리여리한 몸매. 겉보기에는 다소 말라보였지만, 사라의 허리와 둔부는 그 경계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모양이 확연했다.

        

       ……마치, 그 시절의 그녀를 보는 것처럼.

        

       물론 완전히 그녀와 같아지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겠지만, 사라는 반이 섞인 그 유전자가 걱정되지 않을 정도로, 그 시절의 그녀와 똑같이 닮아가고 있었다.

        

       최나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던 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라의 키는 최나경보다는 확실하게 작았기에, 눈을 마주하려면 사라가 최나경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 거리가 결코 부족하지는 않았다.

        

       “…….”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에는 절대 멀지 않은 거리였으니까.

        

       아직,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

        

       그녀의 그 모습보다도, 아직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최나경은 천천히 손을 들어, 사라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부드러운 뺨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사라는 눈을 감고 그 손에 얼굴을 기대왔다.

        

       천천히 사라의 뺨을 매만지던 최나경의 손은 조금씩 더 크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사라의 뺨을 쓰다듬고, 턱 아래를 만지고, 입술을 만졌다.

        

       갈라진 곳 하나 없이 보드라운 입술이었다.

        

       그 입술의 틈으로, 사라의 숨이 내쉬어진다.

        

       손가락 끝으로 그 뜨거운 숨을 느끼는데, 사라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보기 좋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그 사이로—

        

       “어머님.”

        

       이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

        

       사라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최나경의 손길이 멈췄다.

        

       사라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듯,

        

       “어머님…….”

        

       다시 한번, 그렇게 되뇌는 것이다.

        

       “…….”

        

       대체 왜?

        

       갑자기 호칭이 다시 바뀐 거지?

        

       최나경은, 사라에게 그저 어머님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렇게 거리를 두고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은 것도 참은 채로 그렇게 천천히 공을 들여, 드디어 그녀가 그자에게 했던 말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어머님?”

        

       사라가 감았던 눈을 뜨고, 최나경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뜬 그 눈은, 마치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

        

       최나경은 사라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바로 조금 전까지 멍했던 머리가 드디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사라는 여전히 ‘사라’였다. 그녀가 아니라.

        

       그리고, 그녀의 처음도, ‘그녀’의 처음도, 아무 때나 낭비할 수 없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

        

       그 말에, 사라의 어깨가 움츠려졌다. 바로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그 이전과 같은 반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고 보아온, 사라 특유의 몸짓.

        

       역시,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했다. 조금 더 확실하게, 제대로 시간을 들여 움직였어야 했는데.

        

       “…….”

        

       최나경은 시선을 돌려, 사라를 따라온 세 명의 아이를 보았다.

        

       머리를 뒤로 모아 하나로 묶은, 당돌해 보이는 아이. 이 아이는 대단한 것이 없어 보였다. 뒷배경도 없고, 본인의 능력도 장학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특출난 것이 없다.

        

       금발의, 한눈에 봐도 혼혈이라는 것이 보이는 양 갈래 머리. ……이원양행의 영애라고 했나.

        

       그 집안의 사람들과 한 번 제대로 날을 잡아 대화해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혜인과 그 ‘후임’이라는 자.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나경은 여기까지 와서야 알았다. 그나마도 사라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들은 이야기라 짧고 구체적이지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사라가, 주체성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사라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마치 손이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양.

        

       하지만, 사라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보이던 순간은 종종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또 정해진 날에 다시 오도록 하마.”

        

       그 말에, 사라는 “으에……?”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친구들과의 감정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일은, 반드시, 반드시 수습해야만 한다.

        

       시간을 들여서, 확실하게.

        

       *

        

       최나경은 그렇게 떠났지만, 사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유하늘도, 이수아도, 신소희도, 빠르게 서 있는 사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사라의 상태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가까이 가서 본 사라는, 조금 이상했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어있다가 지금 막 깨어난 것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해 보인다는 것처럼.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라야?”

        

       가장 먼저 사라 곁으로 달려온 유하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사라가 고개를 들어 유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눈동자뿐만이 아니다.

        

       손도, 어깨도.

        

       마치 엄청나게 두려운 무언가를 본 것처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나, 나는…….”

        

       “사라…….”

        

       유하늘이 사라에게 한걸음 가까이 걸어갔다.

        

       “대체, 어떻게……?”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다.

        

       아.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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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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