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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3

     강해지는 건 중요하다.

     

     주변 사람이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강해지는 게 더 중요하다.

     ‘멘테 경에게 황태자를 암살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멘테 경은 팔신장 중 한 명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말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황제의 여덟 마스터도 나름의 서열이 있고, 강함의 정도가 다 달랐다.

     멘테 경은 전쟁 직전에 마스터가 되어 자리를 꿰찼으나, 황제는 황태자인 지금 이 시점에도 이미 마스터를 모아 힘을 기르고 있을 것이다.

     만일 멘테 경에게 목숨을 걸고 임무를 맡긴다면, 내가 황제를 죽이려고 할 때 팔신장 중 누군가를 막아달라고 하는 것 정도겠지.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 위해, 나는 백금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익숙해 보이는구나.”

     “예, 뭐.”

     나는 백금경의 뒤에 탄 채, 하늘을 날고 있다.

     펄럭.

     좌우로 크게 펄럭이는 하얀 날개.

     

     누군가가 이걸 본다면 새라고 생각할 것이며-실제로 나도 이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백금경.”

     “왜 그러느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유니콘입니까?”

     하얀 날개가 달린 말.

     머리에 달린 노란 뿔.

     사람 둘을 등에 태우고도 거뜬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환상 속의 짐승…!

     “유니콘 아니고, 천마(天馬)종이란다. 페가수스.”

     “…….”

     “유니콘은 하늘을 날 수 없어. 그리고 본녀 또한 탈 수 없지.”

     “크흠.”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멘테 경보다 말하는 수위가 더 세다.

     “백금경.”

     “왜 그러느냐.”

     “저는 15세입니다.”

     “500살 이상 먹은 엘프의 눈에는 50살이나 15살이나 다 거기서 거기란다.”

     “인간 세상의 법도를 알면서 그러시는 겁니까?”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15살이면 결혼해서 아이 하나 낳았을 나이란다.”

     깨달았다.

     이 존재, 제국에서는 흔히들 ‘꼰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라는 걸.

     “그보다 의외로구나.”

     “뭐가 의외라는 말입니까?”

     “이 몸이 인간들 기준으로는 덮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건 분명한데, 너는 어떻게 이성적으로 두근거리는 기척이 전혀 없으니.”

     “…하늘을 날고 있지만 않았다면, 바로 이 허리를 잡은 손을 놓고 내렸을 겁니다.”

     “그래? 연상은 취향이 아닌 게냐?”

     “연상이 취향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제 마음에는 이미 한 명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흐으음…. 지브롤터답다면 다운 대답이로구나.”

     “자주 듣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백금경의 말이 옳다.

     “엘프와의 사랑을 로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쉽게도 저는 아니겠네요.”

     하지만 나는 주관이 확신한 사람이기에, 백금경에게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백금경.”

     “역시나 말하는 투가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카디안과 다를 바가 없어.”

     “혹시 카디안 경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그럴 리가. 오히려 원수나 다름없었지.”

     “……예?”

     백금경이 고개를 돌린다.

     “그자는 감히 본녀를 상대로 협박했던 자다.”

     거의 180도에 가깝게, 나와 시선이 정면에 놓일 정도로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본녀가 절치부심하여 수백 년 동안 칼을 갈고 갈아왔지.”

     “…….”

     “엘프가 한을 품으면 평생을 간단다. 조심해두거라.”

     “제가 뭐 백금경에게 잘못을 한 게 아직은 없어 보이는데요.”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이란다.”

     “…….”

     일단 말은 조심해야겠다.

     아버지가 회귀 전에 했던 것처럼, 나중에 도법을 알려주겠다면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본녀는 네가 순순히 따라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수호자 가문의 일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아이가 갑자기 교류도 없던, 그것도 심지어 엘프의 숲에 초대받는다는 게 어디 흔한 일은 아니지. 심지어 응하기까지 했고.”

     “……그.”

     나는 전방을 가리켰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몸은 그렇게 앞을 향하면서 고개만 뒤로 있으면 제가 좀 무서운데요.”

     “그러냐? 그러면…읏차.”

     스륵.

     백금경이 말 위에서 단숨에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이러면 되겠지.”

     심지어 다리를 꼬고 앉으며, 그 무릎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왜. 혹시 안아주는 거라도 기대했느냐?”

     “죄송하지만 저는 만일 누군가를 앞에 태울 일이 있다면, 얼굴을 맞대고 안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만 제 앞에 태울 겁니다만.”

     “하하하. 참 좋은 자세야. 그대의 반려가 될 이는 참으로 좋겠어.”

     백금경이 피식 웃으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래, 슬슬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고, 마침 결계도 가까워졌으니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할까.”

     딱.

     백금경이 옆으로 뻗은 손가락을 튕기자, 곧 페가수스가 날개를 천천히 접으며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새가 나뭇가지에 앉듯, 페가수스는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숲의 공터에 천천히 착지했다.

     “따라오너라. 이 영역 너머는 엘프만이 알 수 있는 길이라,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헤맬 수 있으니.”

     “엘프의 숲에 들어갔다 나온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고 들었는데….”

     숲의 입구를 보자마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엘프들은 죽은 자들의 시신을 저렇게 그냥 놔두는 겁니까?”

     거대한 나무 아래, 백골이 널브러져 있다.

     “그래. 하지만 안심하거라. 일부러 둔 건 아니니.”

     어디 동물의 것이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두개골의 형태를 비롯하여 모든 게 인골(人骨)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다.

     “미로의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에서 아사한 거란다.”

     “안 치웁니까?”

     “놔두는 거지. 저것 또한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

     엘프가 인간과 비슷하지만, 역시 엘프의 관점 자체는 인간과 많이 다르다.

     “적어도 저런 게 있어야 겁이 많은 자들은 저걸 보고 돌아갈 게 아니더냐.”

     “겁먹지 않고 엘프를 보겠다면서 들어오는 이들은….”

     “저렇게 되는 거지.”

     조금 숲 안으로 들어간 순간, 또다른 백골이 나타났다.

     앞으로 고꾸라진 백골.

     

     저기 세빌리야 영지에서 굶주림에 쓰러져 죽었던 사람이 생각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

     “이 숲은 말이다. 동물이 없어. 오직 식물만이 존재하지.”

     백금경이 옅게 웃었다.

     “동물이 없다는 건 ‘곤충’도 없다는 말이란다.”

     “…….”

     참으로 무서운 미로가 아닐 수 없다.

     

     * * *

     엘프의 숲.

     끝.

     “다 왔단다.”

     “…….”

     약 2시간 정도 걸었을까.

     미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백금경은 너무나도 쉽게 숲을 빠져나왔다.

     ‘숲이 2시간이라고 하면 길을 잃을 법도 하긴 하네.’

     확실히 이런 미로가 있는 한, 어중이떠중이들은 미로에서 죽기 마련이다.

     심지어 중간까지도 풍화되기 직전인 백골이 많았으나, 중간부터는 아예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었다.

     즉.

     많은 이들이 엘프의 숲을 찾기도 전에 다 아사했다는 말이겠지.

     식량을 얼마나 챙겨오든, 식물만 씹어먹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엘프의 도시보다 미로가 더 신경이 쓰이나보구나. 왜. 나중에 너 혼자 이 길을 찾아오라고 할까봐 두려운 거니?”

     “아니요.”

     새삼, 살짝 두려워졌다.

     “만일 이 미로를 뚫는 자가 있다면, 미로를 어떻게 뚫었을까 싶어서요.”

     황태자는 팔신장과 어떻게 미로를 돌파한 걸까.

     “방법이야 많지. 엘프 도시 내부에 있는 결계를 해제하거나, 미로의 술자인 나를 죽이거나, 아니면 모든 미로를 파괴하거나.”

     “그런 거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구나? 후후후.”

     “…….”

     방심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날카롭다.

     “긴장은 유지하되, 그렇게까지 긴장은 하지 말렴. 이곳의 엘프들은 네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지는 모르겠는데.”

     “……?”

     “일단, 이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벗어던져야겠구나.”

     백금경이 로브를 훌러덩-

     “…지금 뭐하는 겁니까?”

     “뭐하기는?”

     나는 백금경이 옷을 마저 벗기 전, 간신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뭘 하기는. 여기는 엘프의 숲이고, 이건 인간의 문명이니 그러지.”

     “아니, 잠시만요. 이건 엘프의 옷 아닙니까?” 

     “인간들을 상대할 때 격식을 갖추는 예식용 의장일 뿐이란다.”

     이 여자.

     지금 나를 상대로 고도의 기만전술을 펼치는 게 아닐까?

     “이상하구나. 너는 엘프가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한 번이라도 엘프의 숲에 와봤다면 알 텐데.”

     “저는 15살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니. 하지만 자기 집에서까지 갑갑한 의복을 입지는 않잖니. 너는 잘 때도 외투를 입고 양말에 신발까지 신고 침대에 눕고 그러는 게냐?”

     “그건 아닌데, 백금경은 손님인 제가 숲에 왔는데도 그렇게 가벼운 복장으로 돌아다닐 겁니까?”

     “가벼운 복장? 착각도 심하구나.”

     백금경은 내 손을 뿌리치며, 자신의 원피스같은 외출복 안쪽을 슬쩍 가리켰다.

     “이 의장복 아래에 다른 옷이 있을 것 같으냐?”

     “혹시나 제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냥 그만두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그렇다.

     “저는 엘프의 숲에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이번이 처음이며, 백금경과 만나는 것도 처음입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흐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구나. 좋다.”

     백금경이 벗어던지려던 의장복에서 손을 뗐다.

     “정직해서 좋구나. 하긴. 최소한 엘프를 상대로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그 정도는 압니다.”

     “엘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

     백금경의 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지.”

     진지하게.

     “질문을 바꿔볼까.”

     절벽까지 다가가, 그 아래에 푸르른 녹음이 짙은 숲 너머.

     “이곳은 엘프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 세계의 주축이라고 불리는 ‘세계수’를 지키는 정령들의 도시.”

     “…….”

     나무와 나무 사이, 회색 진흙을 굳혀 만든 것 같은 정교한 고대 도시가 숲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곳이 멸망한다면, 어떻게 멸망할 것 같으냐?”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직접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고, 누군가에게 함부로 밝힌 것도 아니지만.

     “그저 꿈속에서 풍문으로 들었다고 한다면.”

     회귀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엘프의 숲을 불태우고, 엘프를 도륙 냈노라.”

     “…….”

     “다른 건 몰라도 그자는 흡혈귀의 권속도 아니고, 마족의 피가 흐르는 자도 아닌 분명한 ‘인간’이라는 것.”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라는 자의 가장 두려운 점은 그가 저지르는 행동이나 가지고 있는 사상이 어떠하든.

     “어떤 인간이 자랑하듯, 엘프의 숲을 파괴했다고 그랬습니다.”

     종족으로서는 분명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그런가.”

     백금경이 아련한 눈으로 회색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인간은 변절자들과 손을 잡았거나, 그 꿈속에서 그대가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있었거나 그랬겠지.”

     “…….”

     모르겠다.

     제국과 흡혈귀 사이의 연관성은 솔직히 말하자면 ‘백은’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회귀 이후에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가능성을 백금경의 이야기를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애초에 흡혈귀 따위, 황제와 팔신장 옆에는 그 무엇도 없-

     “…….”

     “왜 그러느냐. 뭔가 떠오른 것이라도 있느냐?”

     “…….”

     그저, 가능성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내부의 위험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인간의 싸움만을 준비했다면?’

     황제는 엘프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했다.

     “백금경.”

     “그래.”

     “인간들이 뱀파이어라고 부르는 흡혈귀들 말입니다. 오염된 권속이 아닌 진짜 원조…그러니까….”

     “자기네들은 스스로를 ‘진조(眞祖)’라고 표현하지. 같잖은 것들이.”

     “…….”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 보이는데,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구나.”

     엘프를 처리하다.

     ‘모든 엘프’를 처리하다.

     흡혈귀는 죽여서 잿가루로 재활용할 수 있다.

     “…하.”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준비했구나.’

     더욱더 두려워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더 간절해진다.

     “가시죠, 백금경.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좋단다. 그런데….”

     백금경은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보여드리고 싶다는 것이 혹시 몸이더냐?”

     “……예?”

     “아니. 그냥. 본녀는 네가 엘프의 문화에 따르기로 결정한 줄 알았지.”

     “저기….”

     “보아라.”

     백금경이 앞을 가리키자, 마침 엘프들이 회색 건물의 옥상 위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연의 정령, 엘프의 숲을.”

     “…….”

     나는 너무나도 자연 그 자체인 엘프들의 모습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백금경.”

     “또 왜.”

     “엘프에게는 의생활 문화라는 게 문명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하.”

     자연.

     “너.”

     또 다른 이름.

     “에르윈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야생(野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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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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