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04

       *

        피아는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다.

        ​

        아무래도 실비아씨 앞에서 피아와 대화하는 건 어려우리라는 생각에 계속 무시했더니 삐져버린 모양이었다.

        ​

        물론 내가 피아를 계속 무시했던 건 실비아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

        아기 여우가 어째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는지 원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럽기 때문이기도 했고, 변해버린 그 모습에 아직 적응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

        게다가 자꾸만 놀아달라 보채는 그 모습이 어딘가 라일라를 떠올리게 했기에 더욱 그랬다.

        ​

        녹색의 여인 역시 사람의 형태였던걸 떠올려 보면, 정령은 성장할수록 인간의 형태와 비슷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

        정령의 성장 속도는 어떻게 되는지, 성장의 조건은 무엇인지 등. 

        ​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당장 알아낼 방법도 없었기에 나는 우선 눈앞의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

        ​

        실비아씨가 가져온 여러 물건 덕분에 이제 오두막은 제법 사람이 사는 듯한 생활감을 갖추기 시작했다.

        ​

        각종 잡동사니와 공구, 그리고 각각 입을 천 옷이 세 벌씩은 생겼으니 말이다.

        ​

        알몸으로 다니던 실비아씨나 맨몸이나 다름없던 내 꼴은 원시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명백히 문명인이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실비아씨는 알몸으로 지내던 게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불만이 있는 듯 보였지만, 제발 옷을 입어 달라는 나의 애원에 결국 옷을 입어 주었다.

        ​

        다행히도 멀쩡하게 발동한 내 마법 덕분에 옷에서 불쾌한 냄새도 많이 사라졌고, 세 벌을 몽땅 껴입으면 추위도 제법 막혔다. 

        ​

        덕분에 이제 실비아씨는 낮 중에 한 두 시간 정도는 사냥하다 돌아왔고, 나 역시 나무를 베어와 간단한 의자나 침대 틀 따위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

        이불처럼 사용하던 사슴 가죽은 도저히 옷으로 가공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 그냥 침대 틀에 깔아 간이침대를 완성 시켰다.

        ​

        물론 푹신함 따위는 없는 딱딱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침대였지만, 맨바닥에서 누워 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따듯했기에 만족스러웠다.

        ​

        실비아씨는 사냥을 통해 날마다 약간의 가죽을 수급해 주었고, 나는 매일 하나씩 필요한 가구를 만들었다.

        ​

        실비아씨가 가져왔던 망가진 가죽옷들을 재활용해 만든 방어구도 틈틈이 손을 보았다.

        ​

        생각보다 훨씬 더 바쁜 나날이었지만 놀거리도 일거리도 없는 이런 숲속에서 무언가 몰입할만한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

        게다가 바쁜 와중에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내게 달라붙어 애정을 요구하는 실비아씨의 애달픈 표정이나 가끔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는 피아의 모습 역시도 이 숲속 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었다.

        ​

        정들면 다 고향이라 그랬던가.

        ​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실비아씨의 오두막이 그랬듯이, 이 하자투성이 오두막에도 점점 정이 붙기 시작했다.

        ​

        ​

        ​

        ​

        ​

        ​

        ​

        ​

        ​

        ​

        *

        “안돼.”

        ​

        “실비아 누나, 잠깐은 괜찮다니까요.”

        ​

        “안됀다니까!”

        ​

        ​

        ​

        그녀를 위한 가죽 갑옷이 거의 완성이 되어가던 어느 날.

        ​

        아침부터 실비아씨와 나는 크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

        실비아씨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내게 쓰다듬어지며 콧노래를 부르던 피아는 실비아씨와의 소란이 시작되자 안쪽 다락방으로 도망가 머리만 빼꼼 내놓고 우리의 논쟁을 지켜보았다.

        ​

        실비아씨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

        ​

        ​

        “아직도 밖에 얼마나 마기가 많은 줄 알기나 해?”

        ​

        “모르죠, 못 나가 봤으니까요.”

        ​

        “그래? 그럼 네가 마기에 침식되어 죽어갈 때, 그런 널 보는 내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웠는지는 아니? 그건 네가 직접 봤으니까 알겠지, 어디 한번 대답해봐.”

        ​

        “…실비아 누나.”

        ​

        ​

        ​

        논쟁의 이유는 성묘 때문이었다.

        ​

        달력 하나 없는 숲에서의 생활, 그리고 중간에 정령계에서 보낸 몇개월 덕분에 이젠 나도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날씨와 온도,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나뭇잎들의 색으로 대략적인 시기 정도는 여전히 예측할 수 있었다.

        ​

        아마 지금은 초겨울을 지나 본격적인 겨울이 막 시작되었을 시기임이 분명했다.

        ​

        오늘일지 내일일지, 지난주였을지 다음 주 일지,

        ​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분명 라일라의 생일도 이 시기였다.

        ​

        나는 밤 동안 자리를 비운 실비아씨가 돌아온 아침에, 잠시 라일라의 무덤에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

        말없이 나갔다 올 수도 있었지만, 내가 말없이 사라질 때마다 실비아씨가 얼마나 불안해할지 알고 있었기에 일부로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

        하지만, 실비아씨는 라일라에게 간단한 인사말 정도 전하고 오겠다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

        ​

        ​

        “알아요. 실비아 누나는 내가 걱정되서 그런다는 거… 제가 왜 모르겠어요.”

        ​

        “…”

        ​

        “하지만, 제 동생이잖아요. 오래 안 있을 거예요. 같이 가도 좋아요. 그냥 인사만 전하고 올게요.”

        ​

        “애쉬… 라일라는,”

        ​

        ​

        ​

        실비아씨는 무언가 말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

        왠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

        라일라는 이미 죽었으니, 그만 잊으라,

        ​

        뭐 그런 종류의 말이었으리라.

        ​

        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울컥함을 꾹 삼키고 천천히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

        ​

        ​

        “전에도 며칠간은 괜찮았잖아요. 이번엔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거예요. 약속할게요.”

        ​

        “바깥은 위험해.”

        ​

        “그리고 저는 약하죠, 알아요. 그래도 해야만 해요.”

        ​

        “안됀다고 했어. 이 이야기는 그 외의 다른 결론 따위 없어.”

        ​

        “실비아씨도 매일 밤 어디 나가잖아요!”

        ​

        “난 강하니까.”

        ​

        ​

        ​

        하지만 그런데도 무척이나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

        ​

        ​

        “아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안됀다는 거에요!”

        ​

        “몰라서 물어?”

        ​

        ​

        ​

        실비아씨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맸다.

        ​

        평소에도 가끔 그녀가 나를 붙잡는 손길에서 억센 힘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긴 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욱 억세고 강한 힘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

        아무래도 평소에 나를 안거나 만질 때, 힘 조절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

        나는 윽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떨리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

        ​

        ​

        “…싫어, 또 잃어버릴 수 없어. 이제… 이제서야 겨우 만났는데.”

        ​

        “…”

        ​

        “답답하단 거, 알아… 나도 잘 알아 애쉬. 왜 모르겠니… 나도…”

        ​

        “답답해서 나가려는 게 아니에요.”

        ​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더 내 생각을 해주면 안 될까?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

        “…”

        ​

        ​

        ​

        그녀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

        말이 잘 정리되지 않는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진심을 내게 더 선명하기 전해주었기에, 나 역시 웬만해선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생일, 각종 기념일, 그리고 그다음엔 기일.

        ​

        하나씩 잊어버리면 결국 언젠간 내 마음 속에서 라일라에 대한 마음이 옅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

        한번 타협해 버리면, 내가 평생 간직해야 할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도 점차 일상에서 묻힐 것 같았다.

        ​

        너무나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라일라.

        ​

        더 이상 부모님도 살아 계시지 않는 지금, 나마저 그녀를 잊어버린다면 라일라 스태프라는 어여쁜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

        나는 그녀의 절절한 애원에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

        ​

        “꼭 가야만 해요. 누나.”

        ​

        “…이렇게 애원해도?”

        ​

        ​

        ​

        그녀의 그 말, 그리고 표정은 건드리는 것만으로 부서질 것처럼 너무나 연약하고 가냘파 보였다.

        ​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가, 협박과 강압이 아닌 애원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

        나는 천천히 화를 가라앉히곤 천천히 심호흡했다.

        ​

        그리고는 내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점점 그녀의 몸통 쪽으로 내 손을 가져갔다.

        ​

        나는 이내 곧,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가족이 되자면서요.”

        ​

        “…!”

        ​

        “나는 이제 실비아 누나가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

        “애쉬…”

        ​

        “누나는 내 아내니까.”

        ​

        “…아, 아아. 응,”

        ​

        ​

        ​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나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

        ​

        ​

        “그건 즉, 실비아 누나도 라일라의 가족이란 뜻이나 다름없어요.”

        ​

        “…”

        ​

        “나를 걱정하는 거, 잘 알아요. 고마워요. 정말…” 

        ​

        ​

        ​

        물론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내 뜻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

        그녀의 눈빛 속에선 가끔 마기에 중독되어 죽어가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

        비록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날의 슬픔과 절망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

        하지만, 실비아씨가 걱정할 거란 생각은 했었음에도, 설마 이 정도로 거세게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

        하지만 나는 애써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천천히 그녀에게 내 뜻을 단호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전하도록 노력했다.

        ​

        이미 이 세상엔 없지만, 내 아내라면 내 여동생을 예뻐해 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닐 테니 말이다.

        ​

        ​

        ​

        “잡초는… 겨울이니까 다 죽었겠죠. 그럼 비석에 먼지 좀 털고,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만 좀 하다 올게요.”

        ​

        ​

        ​

        실비아씨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

        허락의 말도 없었지만, 무턱대고 안된다는 반대의 뜻도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조금만 더 설득하면 되리라 생각한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

        ​

        ​

        “같이 가서 그렇게 인사하고, 실비아 누나랑 사랑하는 관계가 됬다고 얘기도 하고…”

        ​

        “하, 애쉬 너 정말…”

        ​

        “운명이 조금만 우리에게 친절했다면, 라일라가 누나를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해 보세요.”

        ​

        “…”

        ​

        “전에 말한 대로 참 착하고 예쁜 아이가 언니, 언니 하면서 누나 등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거예요.”

        ​

        “…”

        ​

        ​

        ​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망설임이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뭣하면 같이 예전처럼 강가에 들려서 목욕이라도 할까요? 엄청 춥긴 하겠지만, 그래도 불 마법으로 금방 말릴,”

        ​

        “안돼.”

        ​

        ​

        ​

        실비아씨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

        조금 전까지 보인 애원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강압적인 태도.

       

       그 무서운 기세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로 넘실거렸다.

        ​

        ​

        ​

        “애쉬, 안돼. 못 나가.”

        ​

        “실비아… 누나?”

        ​

        “못 나가. 절대.”

        ​

        ​

        ​

        뭘 잘못 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

        내가 감기 걸릴까 봐 이러는 걸까?

        ​

        그녀는 한 순간에 마치 전혀 다른 얼굴을 갈아 끼운 것 처럼 급변했다.

        ​

        나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 같은 기분에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

        ​

        ​

        “전 가야만 한다니,”

        ​

        “애쉬.”

        ​

        ​

        ​

        그 순간, 내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손아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아니,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녀는 내 어깨를 뜯어버릴 듯한 기세로 꾹 눌러 쥐었다.

        ​

        ​

        ​

        “으, 크앗, 시, 실비아,”

        ​

        “애쉬는 착하니까, 내 말 잘 들을 거지?”

        ​

        “누나아악, 으악!”

        ​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아도, 말 들을 거지?”

        ​

        “아파, 아파요! 누나!”

        ​

        ​

        ​

        극심한 고통에 절로 무릎이 꿇렸다.

        ​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몸부림쳤지만, 마치 사냥감을 옭아맨 덫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내가 발버둥 칠수록 더욱 내 근육을 뚫어버릴 기세로 강하게 눌렀다.

        ​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손가락이 피부를 찢고 내 살갗을 꿰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

        내가 비명을 지르자, 피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실비아를 향해 당장 달려들 기세로 몸을 웅크렸다.

        ​

        나는 버둥거리던 손을 피아를 향해 뻗어 제지했다.

        ​

        ​

        ​

        “말해, 애쉬.”

        ​

        “아악,”

        ​

        “말해, 안가겠다고. 내 말 듣겠다고.”

        ​

        “왜, 왜 이러는,”

        ​

        “… 아니, 몰래 갈 게 분명해.”

        ​

        ​

        ​

        나는 실비아씨가 천천히 손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 그다음 순간, 

        ​

        시야가 끊겼다.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아 그 강을…
    다음화 보기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