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는 나타날 때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래도 실비아씨 앞에서 피아와 대화하는 건 어려우리라는 생각에 계속 무시했더니 삐져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피아를 계속 무시했던 건 실비아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기 여우가 어째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는지 원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럽기 때문이기도 했고, 변해버린 그 모습에 아직 적응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꾸만 놀아달라 보채는 그 모습이 어딘가 라일라를 떠올리게 했기에 더욱 그랬다.
녹색의 여인 역시 사람의 형태였던걸 떠올려 보면, 정령은 성장할수록 인간의 형태와 비슷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정령의 성장 속도는 어떻게 되는지, 성장의 조건은 무엇인지 등.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당장 알아낼 방법도 없었기에 나는 우선 눈앞의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실비아씨가 가져온 여러 물건 덕분에 이제 오두막은 제법 사람이 사는 듯한 생활감을 갖추기 시작했다.
각종 잡동사니와 공구, 그리고 각각 입을 천 옷이 세 벌씩은 생겼으니 말이다.
알몸으로 다니던 실비아씨나 맨몸이나 다름없던 내 꼴은 원시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명백히 문명인이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비아씨는 알몸으로 지내던 게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불만이 있는 듯 보였지만, 제발 옷을 입어 달라는 나의 애원에 결국 옷을 입어 주었다.
다행히도 멀쩡하게 발동한 내 마법 덕분에 옷에서 불쾌한 냄새도 많이 사라졌고, 세 벌을 몽땅 껴입으면 추위도 제법 막혔다.
덕분에 이제 실비아씨는 낮 중에 한 두 시간 정도는 사냥하다 돌아왔고, 나 역시 나무를 베어와 간단한 의자나 침대 틀 따위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불처럼 사용하던 사슴 가죽은 도저히 옷으로 가공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 그냥 침대 틀에 깔아 간이침대를 완성 시켰다.
물론 푹신함 따위는 없는 딱딱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침대였지만, 맨바닥에서 누워 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따듯했기에 만족스러웠다.
실비아씨는 사냥을 통해 날마다 약간의 가죽을 수급해 주었고, 나는 매일 하나씩 필요한 가구를 만들었다.
실비아씨가 가져왔던 망가진 가죽옷들을 재활용해 만든 방어구도 틈틈이 손을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바쁜 나날이었지만 놀거리도 일거리도 없는 이런 숲속에서 무언가 몰입할만한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바쁜 와중에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내게 달라붙어 애정을 요구하는 실비아씨의 애달픈 표정이나 가끔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는 피아의 모습 역시도 이 숲속 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었다.
정들면 다 고향이라 그랬던가.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실비아씨의 오두막이 그랬듯이, 이 하자투성이 오두막에도 점점 정이 붙기 시작했다.
*
“안돼.”
“실비아 누나, 잠깐은 괜찮다니까요.”
“안됀다니까!”
그녀를 위한 가죽 갑옷이 거의 완성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침부터 실비아씨와 나는 크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실비아씨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내게 쓰다듬어지며 콧노래를 부르던 피아는 실비아씨와의 소란이 시작되자 안쪽 다락방으로 도망가 머리만 빼꼼 내놓고 우리의 논쟁을 지켜보았다.
실비아씨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아직도 밖에 얼마나 마기가 많은 줄 알기나 해?”
“모르죠, 못 나가 봤으니까요.”
“그래? 그럼 네가 마기에 침식되어 죽어갈 때, 그런 널 보는 내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웠는지는 아니? 그건 네가 직접 봤으니까 알겠지, 어디 한번 대답해봐.”
“…실비아 누나.”
논쟁의 이유는 성묘 때문이었다.
달력 하나 없는 숲에서의 생활, 그리고 중간에 정령계에서 보낸 몇개월 덕분에 이젠 나도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날씨와 온도,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나뭇잎들의 색으로 대략적인 시기 정도는 여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은 초겨울을 지나 본격적인 겨울이 막 시작되었을 시기임이 분명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지난주였을지 다음 주 일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분명 라일라의 생일도 이 시기였다.
나는 밤 동안 자리를 비운 실비아씨가 돌아온 아침에, 잠시 라일라의 무덤에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말없이 나갔다 올 수도 있었지만, 내가 말없이 사라질 때마다 실비아씨가 얼마나 불안해할지 알고 있었기에 일부로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하지만, 실비아씨는 라일라에게 간단한 인사말 정도 전하고 오겠다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알아요. 실비아 누나는 내가 걱정되서 그런다는 거… 제가 왜 모르겠어요.”
“…”
“하지만, 제 동생이잖아요. 오래 안 있을 거예요. 같이 가도 좋아요. 그냥 인사만 전하고 올게요.”
“애쉬… 라일라는,”
실비아씨는 무언가 말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라일라는 이미 죽었으니, 그만 잊으라,
뭐 그런 종류의 말이었으리라.
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울컥함을 꾹 삼키고 천천히 최대한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전에도 며칠간은 괜찮았잖아요. 이번엔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거예요. 약속할게요.”
“바깥은 위험해.”
“그리고 저는 약하죠, 알아요. 그래도 해야만 해요.”
“안됀다고 했어. 이 이야기는 그 외의 다른 결론 따위 없어.”
“실비아씨도 매일 밤 어디 나가잖아요!”
“난 강하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무척이나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안됀다는 거에요!”
“몰라서 물어?”
실비아씨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맸다.
평소에도 가끔 그녀가 나를 붙잡는 손길에서 억센 힘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긴 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더욱 억세고 강한 힘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평소에 나를 안거나 만질 때, 힘 조절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윽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떨리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싫어, 또 잃어버릴 수 없어. 이제… 이제서야 겨우 만났는데.”
“…”
“답답하단 거, 알아… 나도 잘 알아 애쉬. 왜 모르겠니… 나도…”
“답답해서 나가려는 게 아니에요.”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더 내 생각을 해주면 안 될까?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
그녀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말이 잘 정리되지 않는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진심을 내게 더 선명하기 전해주었기에, 나 역시 웬만해선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생일, 각종 기념일, 그리고 그다음엔 기일.
하나씩 잊어버리면 결국 언젠간 내 마음 속에서 라일라에 대한 마음이 옅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번 타협해 버리면, 내가 평생 간직해야 할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도 점차 일상에서 묻힐 것 같았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라일라.
더 이상 부모님도 살아 계시지 않는 지금, 나마저 그녀를 잊어버린다면 라일라 스태프라는 어여쁜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나는 그녀의 절절한 애원에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꼭 가야만 해요. 누나.”
“…이렇게 애원해도?”
그녀의 그 말, 그리고 표정은 건드리는 것만으로 부서질 것처럼 너무나 연약하고 가냘파 보였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가, 협박과 강압이 아닌 애원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는 천천히 화를 가라앉히곤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점점 그녀의 몸통 쪽으로 내 손을 가져갔다.
나는 이내 곧,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이 되자면서요.”
“…!”
“나는 이제 실비아 누나가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애쉬…”
“누나는 내 아내니까.”
“…아, 아아.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건 즉, 실비아 누나도 라일라의 가족이란 뜻이나 다름없어요.”
“…”
“나를 걱정하는 거, 잘 알아요. 고마워요. 정말…”
물론 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내 뜻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선 가끔 마기에 중독되어 죽어가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비록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날의 슬픔과 절망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실비아씨가 걱정할 거란 생각은 했었음에도, 설마 이 정도로 거세게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애써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천천히 그녀에게 내 뜻을 단호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전하도록 노력했다.
이미 이 세상엔 없지만, 내 아내라면 내 여동생을 예뻐해 주길 바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닐 테니 말이다.
“잡초는… 겨울이니까 다 죽었겠죠. 그럼 비석에 먼지 좀 털고,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만 좀 하다 올게요.”
실비아씨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허락의 말도 없었지만, 무턱대고 안된다는 반대의 뜻도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조금만 더 설득하면 되리라 생각한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같이 가서 그렇게 인사하고, 실비아 누나랑 사랑하는 관계가 됬다고 얘기도 하고…”
“하, 애쉬 너 정말…”
“운명이 조금만 우리에게 친절했다면, 라일라가 누나를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해 보세요.”
“…”
“전에 말한 대로 참 착하고 예쁜 아이가 언니, 언니 하면서 누나 등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거예요.”
“…”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망설임이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뭣하면 같이 예전처럼 강가에 들려서 목욕이라도 할까요? 엄청 춥긴 하겠지만, 그래도 불 마법으로 금방 말릴,”
“안돼.”
실비아씨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보인 애원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강압적인 태도.
그 무서운 기세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로 넘실거렸다.
“애쉬, 안돼. 못 나가.”
“실비아… 누나?”
“못 나가. 절대.”
뭘 잘못 건드렸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감기 걸릴까 봐 이러는 걸까?
그녀는 한 순간에 마치 전혀 다른 얼굴을 갈아 끼운 것 처럼 급변했다.
나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 같은 기분에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전 가야만 한다니,”
“애쉬.”
그 순간, 내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손아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내 어깨를 뜯어버릴 듯한 기세로 꾹 눌러 쥐었다.
“으, 크앗, 시, 실비아,”
“애쉬는 착하니까, 내 말 잘 들을 거지?”
“누나아악, 으악!”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아도, 말 들을 거지?”
“아파, 아파요! 누나!”
극심한 고통에 절로 무릎이 꿇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몸부림쳤지만, 마치 사냥감을 옭아맨 덫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내가 발버둥 칠수록 더욱 내 근육을 뚫어버릴 기세로 강하게 눌렀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손가락이 피부를 찢고 내 살갗을 꿰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피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실비아를 향해 당장 달려들 기세로 몸을 웅크렸다.
나는 버둥거리던 손을 피아를 향해 뻗어 제지했다.
“말해, 애쉬.”
“아악,”
“말해, 안가겠다고. 내 말 듣겠다고.”
“왜, 왜 이러는,”
“… 아니, 몰래 갈 게 분명해.”
나는 실비아씨가 천천히 손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시야가 끊겼다.
.
님아 그 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