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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4

       *

         

         

         “보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네가 따르던 저것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리지.”

         

         

         이반은 머리를 잃은 오크 주술사를 향해 턱짓했다. 오크는 주술사의 시체를 힐끔 바라보고는 덜덜 떨었다.

         

         

         “제가… 제가 뭘, 뭘 하면 됩니까?”

         “잡아라.”

         

         

         발 끝으로 툭, 바닥에 굴러다니는 아티펙트를 밀어 굴렸다.

         

         빙글빙글 굴러간 지팡이가 오크의 발치에 닿았다. 문득, 오크의 시선이 지팡이로 향했다.

         

         공포 속에서도 도드라지는 탐욕이라.

         확실히 뭔가 있는 물건인 건 맞는 모양이군.

         

         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오크를 살폈다. 오크는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지팡이를 주워 들었다.

         

         

         “으으윽…!!”

         “뭔가 보이나?”

         

         

         미래 예지라는 말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무언가 기괴한 주문이 걸려있기는 한 모양.

         

         오크는 움찔거리며 한참 동안 지팡이 끝에 매달린 흑요석 구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반은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도끼 자루가 손가락 사이로 차갑게 감겼다.

         

         

         “뭐가 보이지?”

         

         

        *

         

         

         오크는 작은 눈을 꿈뻑거렸다.

         

         

        -움직이지 마라.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 본능의 어느 한구석에서,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을 벼려내어 뇌리에 처박는 듯한 목소리가.

         

         

        -움직이지 마라.

         

         

         오크는 딱딱하게 굳었다. 지팡이에서 눈을 돌릴 수 없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떤 마법을 품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미래를 속삭이고 있었다.

         

         환영이 그의 눈 위를 덮는다. 서늘한 섬광이 그의 목젖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콰직!!

         

         “으그으억!?”

         

         

         오크는 기겁하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도끼날이 목을 쳐날리고 사라지는 모습, 그 감각을 여실히 느낀 탓이다.

         

         황급히 목덜미를 감싸 쥐었지만 상처가 없다.

         

         환상이다. 오크는 공포 속에서 더듬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움직였다면 이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선 앞에, 죽음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냐고 물었는데.”

         

         

         지팡이를 잡기 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자세.

         편하게 늘어트린 양 팔, 감정 없이 굽어보는 푸른 눈동자,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미동 하나 없는 몸의 윤곽까지.

         

         처음과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존재가 있다.

         

         죽음이 서 있다. 형상화된 죽음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

         

         이제야 알았다. 이 아티펙트, 마왕의 눈이 보여주는 미래를 인지한 덕에 깨달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떤 짓을 하더라도,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에서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눈 앞의 존재가 마음을 먹는 순간 그는 죽고 말 것이다.

         

         오크는 먼 옛날 이런 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필멸자의 육신을 입고 불멸자의 격을 드리우는 존재들을.

         

         마족은 힘을 숭상한다. 오직 생존만이 마족의 본령이다. 그러므로, 오크는 마침내 기꺼이 고개를 조아렸다.

         

         마족 거주구에서부터 이곳 크라실로프까지, 그 기나긴 거리를 다만 ‘마왕의 눈이 보여주는 계시’ 하나만을 믿고 전진했던 강인한 전사였으나.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강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유물을 통해 강자의 눈높이를 강제로 개화해낸 탓에.

         

         마음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어떤 노력과 어떤 우연으로도 닿을 수 없는 존재의 격 앞에서.

         

         오크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지팡이를 가슴에 꾹 붙인 채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그래.”

         

         

         숲의 그림자 아래에서 ‘죽음’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림자 사이의 푸른 눈동자엔 어떤 감정도 없이 그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지팡이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인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오크는 공포 속에서 움츠러들었다.

         

         

         “미래가 보이는 것은 확실하군.”

         

         

         이반은 반쯤 꺼내들었던 도끼를 다시 소드벨트에 꽂아 넣었다.

         

         

        *

         

         

         에시디스는 창의력 넘치는 학생이다. 사실, 어지간한 창의력이 없다면 드로안에서 음대생이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창의력은 대부분 주접과 망상으로 이어지곤 했지만 특별한 몇몇 순간엔 놀라운 학습능력을 발휘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지점이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가장 경계해라.

         

         

         이건 이반 삼촌의 가르침이다. 이반 삼촌은 아주 사소한 결점을 제외하면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분이었으므로, 에시디스는 그의 모든 가르침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외우려 노력했다.

         

         따라서.

         

         

         “끄우어어억!!”

         

         

         이반과 방첩사령부가 이 숲 전역에 전개했던 함정을, 그 위치와 종류를 빠짐없이 파악한 뒤에 역이용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다.

         

         이반 삼촌은 친절하게도 모든 함정 인근에 [가르침]을 적어 두었으므로. 학습 능률이 두 배는 올라갔다 하겠다.

         

         

        -자연 상태에 직선은 없다.

         

         

         기초적인 밧줄 함정, 다소 복잡한 그물 함정, 그 함정 옆을 지나쳐 교묘하게 숨겨둔 바닥 함정까지.

         

         에시디스는 머리에 위장용 덤불을 얹은 채로 고요히 숨어서 함정에 희생되는 오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회고했듯이, 에시디스는 잠복의 달인이다. 드로안 궁정 시절 그녀가 잠복했을 때 그 누구도 그녀의 은신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허스칼들은 에시디스를 귀여워한다.)

         

         

         ‘어쩌면 나, 첩보요원에 자질이 있는 걸지도 몰라.’

         

         

         숲에서 유격을 하는 것은 첩보요원의 자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첩보요원은 사실 은신과 잠복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슬픈 진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에시디스가 살면서 봐온 유일한 첩보 요원은 이반이었으며, 이반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이건 어쩌면 세계 최고의 첩보요원 후계자쯤이 아닌가 할 뿐.

         

         에시디스는 뿌듯하게 웃으며 쾅쾅이 2세(지휘봉, 2개월)을 들어 올렸다.

         

         저것들을 정리하고 정찰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조난 엿새 차.

         

         (신) 용사 파티는 이제 완전히 척후팀이 되어 있었다.

         

         좋은 선생을 만난 덕이었다.

         

         

        *

         

         

         마왕은 단순한 군주의 호칭이 아니다.

         

         힘으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오직 투쟁만이 저 자신의 본령이라 여기는 동족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잠시 서로를 향한 칼날을 늘어트릴 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마왕의 신앙이다. 더 나은 땅,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등대이며, 어둠을 사위는 십자성이며, 약자를 위한 요람이고, 전사들을 위한 요새다.

         

         그러니.

         

         

         “너희가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일지라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안위함이라.”

         

         

         오크들은 일반적으로 우둔하다는 편견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다. 학습역량 전체를 투쟁에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암송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마왕을 위한 기도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오크들은 저마다 경건한 표정으로, 자신의 병장기를 꾹 움켜쥐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가장 어둔 밤의 십자성이요.

         나는 폭풍 이는 바다의 등대이니라.

         나는 너희의 요람이요, 너희의 요새이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안위함이라.”

         

         

         [제 2용장 103보병대대 23타격대]라는 영광스러운 과거의 이력도.

         [제 3분면 마족 거주구 북서부 카다론 평원 수용소]라는 오늘날의 치욕도.

         

         그 어떤 호칭과 경력도 그들의 지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지금 이들은 그저 기도하고 있는 한 사람의 마족일 따름이었다.

         

         오크들은 기도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러운 인간 놈들.”

         

         

         오크 하나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살아남은 몇몇 오크들은 저마다 호응하며 소리를 질렀다.

         

         마왕께서 직접 계시하신 땅에, 대체 어떻게 알고 사전에 온갖 함정을 깔아두질 않나.

         

         행군 도중에 갑작스러운 급습으로 대주술사와 대전사를 모조리 납치해가고.

         

         함정을 피하다보면 어느새 전사가 둘에서 셋, 많으면 다섯까지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들을 찾아 돌아다니다보니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인원이라곤 고작 넷.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을 이끌어줄 우두머리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왕의 눈’조차도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오크들은 절망감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부스럭.

         

         

         그때, 그들이 모인 공터 너머에서 수풀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크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서서 수풀을 노려보았다.

         

         

         이제 끝인가. 하지만 적어도 투모르께서 보시기에 흡족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그렇게 전사다운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던 그 때에.

         

         

         “너희, 너희뿐이냐?”

         “이그낙?! 살, 살아 있었습니까?”

         “그래.”

         

         

         턱, 턱. 지팡이를 짚으며 나타난 오크는 사라졌던 대전사 중 하나. 대전사의 말석이었던 이그낙이었다.

         

         오크들은 그의 손에 쥐인 유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로츠로그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나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그낙은 어두운 얼굴로 지팡이를 흔들었다.

         

         

         “로츠로그께서는 마지막 순간 내게 이걸 건네고 시간을 버셨다. 인간 놈들이 지금 이 숲을 포위하고 있어.”

         “마지막 전투가 되겠군요. 투모르께서 가호하시길.”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예?”

         

         

         이그낙은 굳건한 눈으로 오크들을 훑었다.

         

         

         “이 숲엔 인간 귀족 꼬마들이 휴양 삼아 ‘야영’을 즐기고 있다고 하더군. 그 꼬마들의 취미에 우리 전사 몇몇이 ‘사냥’ 당했다고도. 그렇다면 우리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

         

         

         전쟁을 겪어보지도 못했던 꼬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소꿉놀이나 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어린 것들을 포로로 잡아서 이 지옥 같은 숲을 탈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이그낙은 마왕의 눈을 꽉 움켜쥐며 선언했다.

         

         

         “나 또한 계시를 볼 수 있다. 형제들. 비록 로츠로그처럼 먼 미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날 따라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이그낙. 로츠로그가 보았던 ‘계시’는요?”

         “고향에서 다른 주술사를 찾아 돌아와야 한다. 우리 중엔 마왕의 계시를 직접 해석할 수 있는 이가 없지 않나.”

         

         

         이번 작전은 실패다. 주술사를 잃은 순간부터 애초에 주술사가 보았다는 ‘마왕의 계시’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도 남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장렬하게 옥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향의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지 못한다면, 동포들은 그저 그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천천히 고사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누구 한 사람은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이그낙의 말에 설득된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밤의 숲에서 불꽃은 너무나 시인성 좋은 표적지가 된다.

         

         타닥, 타닥. 빨간 불똥을 흩날리며 타들어가는 모닥불과, 그 위로 자욱하고 올라오는 새하얀 연기가 숲 한가운데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오크가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번쩍이는 창칼을 높게 들고. 결연한 표정으로, 두려움 없이.

         

         

        *

         

         

        -목표 포착.

         

         

         엘피헤라는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 눈 앞에 검지와 엄지를 맞닿아 원을 그린 상태로 속삭였다.

         

         원견 주문과 암흑시야 주문을 그 자리에서 섞어 새로운 마법으로 재창조한 상황.

         

         숲의 어둠은 더 이상 그녀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나무 위에 올라 손가락 사이로 주문을 유지하며 오크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시디스가 손을 휙휙 흔들었다.

         

         

        -부스럭!

         

         

         모닥불을 중심으로 맞은편 수풀 사이에서 주먹이 한 차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확인. 준비 완료. 그런 의미였다.

         

         밤의 숲에서 불꽃은 시인성 좋은 표적이 된다. 이것은 이반이 가르쳐준 ‘상식’이다.

         

         이반이 평소에 하는 모든 조언이 그렇듯이, 이것 또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성이 좋다는 것은 포식자에게 들킬 위험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미끼란 본디 잘 보이는 곳에서 사냥감을 유혹해야 하는 법이므로.

         

         이제 어엿한 사냥꾼이 되어버린 척후병 꿈나무(20대, 대학생)들은 싸늘한 눈으로 다가오는 오크 무리를 노려보았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금요일 휴재분 보충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이 포함된 장문의 고해는 공지에 업로드 해두었으므로, 작가의 말엔 사죄만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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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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