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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4

       라데아는 황궁 안으로 첫걸음을 들여놓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고 웅장한 복도에 큼직한 기둥들이 일렬로 서 있고, 벽면에는 여러 유리 공예품들로 가득하다.

         

       둥근 천장에는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듯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고, 곳곳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의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오는 새하얀 샹들리에.

         

       복도를 걸을 때마다 등장하는 촛대들은 황금과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어 인상적이다.

         

       겉보기에도 평민의 집 한 채 값은 할 거 같은 예술품들과 장식들.

         

       만약 이걸 잘못 건드려서 부수기라도 하면 몇 대에 걸쳐서 갚아야 할지 계산하니, 라데아의 어깨가 오들오들 떨려왔다.

         

       “화, 황실이 돈이 많긴 하네요…….”

         

       돈지랄에 압도당해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든 라데아. 하지만 워낙 예쁘고 웅장한 모습에 고개가 한 바퀴 돌아갈 정도로 시선을 팔렸다.

         

       “처음 오는 황궁이라 보는 모든 게 신기한 건 이해하지만, 너무 그렇게 둘러보지 말렴. 다른 귀족들이 쳐다보잖니.”

         

       프란체의 말대로 다른 귀족들은 어린아이 같은 라데아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프란체가 곁에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황실 기사가 와서 쫓아냈을 수준이다.

         

       “네…….”

         

       고개를 끄덕이곤 축 늘어지는 라데아. 괜히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프란체였다.

         

       “황궁이 더 구경하고 싶으면 해가 지고 밤에 파티가 열리면 그때 나와서 구경하렴. 옆에는 케일만 있어도 되니까.”

         

       그제야 눈을 번뜩이며 기운을 차리는 라데아.

         

       “정말요? 밤에 저 혼자 돌아다녀도 돼요?”

       “그래. 모처럼 왔는데 구경해도 되겠지.”

       “감사해요, 공녀님.”

         

       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괜스레 흐뭇해지는 프란체. 척박한 북부에서 왔는데 진의 곁에 있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간 너무 사납게 대한 걸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와의 약속만 지켜낸다면 나는 항상 너에게 호의적일 거란다.”

         

       라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이요?”

       “그래.”

       “무슨 약속이요?”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속을 잊고 있던 건가.

         

       “진과 거리를 둘 것. 대화도 최대한 피할 것. 남자로 보지 말 것.”

         

       처음 보는 소녀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라데아는 아름답다고 소문난 귀족들 사이에 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

         

       ‘비록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면 가장 처음 보이는 게 외모다. 라데아가 작정하고 진에게 접근하면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아, 네. 당연히 알고 있죠.”

         

       힐끔. 프란체는 슬쩍 시선을 돌려 라데아의 눈빛을 확인했다. 맑고 흔들림 없는 루비의 눈동자.

         

       “…….”

         

       거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래, 내 말을 잘 따르렴.”

         

       사소한 대화를 나누던 사이, 결혼식이 올라가는 황궁 대강당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 보이는 데카르트 공작가의 자리.

         

       공작과 에덴, 라인이 앉아있었다.

         

       ‘저 사람들이랑 같이 있고 싶진 않은데.’

         

       프란체는 고개를 휘젓곤 타국에서 온 사자들을 위한 자리에 앉았다. 라데아가 물었다.

         

       “공녀님, 여기는 다른 자리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상관없단다. 이쪽 자리는 어차피 항상 남으니까.”

         

       페델리안 제국에서 초대한 타국의 사자가 앉는 자리. 여기는 원래 오기로 한 숫자보다 더 넉넉하게 준비하기에 문제없다.

         

       “너희들도 옆에 앉으렴.”

       “그래도 되나요?”

       “그래. 케일, 너도 앉으렴.”

         

       그렇게 프란체의 양옆을 차지한 케일과 라데아. 잠시 기다리자 귀족들이 착석하고, 타국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근처에 앉았다.

         

       라데아가 속삭였다.

         

       “이제 시작인가요?”

       “그래. 곧 폐하께서 입장하실 거야.”

       “와, 제가 폐하를 보는 날이 오네요.”

         

       감격의 표정을 짓는 라데아. 케일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삐딱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제 조용. 곧 결혼식이 시작될 거야.”

         

       프란체의 말에 라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기다리자 술렁이던 강당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황제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오늘 같은 축복이 함께하는 날에 참가해준 귀족들, 그리고 타국에서 온 귀빈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소.”

         

       황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역사서에 줄을 남길 결혼식이라나 뭐라나.

         

       ‘웃기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성녀라 해도 본질은 평민. 그간 고귀한 핏줄을 고집해온 황실의 이중성에 프란체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권태로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자니, 대망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저벅. 저벅. 길게 쭉 뻗은 다리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고개는 뻣뻣하게 세워져 있고 미간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멍청한 황태자가 긴장했나 보네.’

         

       차기 황제가 저 황태자라니 웃기는 소리다. 뭐, 그래도 프란체에게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제국도 먹을 수 있겠어.’

         

       진이 설계한 대로 프란체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될 예정이다. 황실의 무능함은 곧 프란체의 권위를 더욱더 상승시켜줄 터.

         

       그리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성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태자에 이어서 성녀까지 입장했다.

         

       수정이 곳곳에 박히고 흰 장미까지 붙은 새하얀 웨딩드레스. 신부의 순수성과 겸손을 상징하는 베일. 손에는 분홍색 장미로 이루어진 부케가 들려있다.

         

       “푸훗.”

         

       여기서 프란체는 더 웃음이 터졌다. 그럴 것이, 분홍색 장미로 이루어진 부케의 꽃말은 열렬한 사랑, 뜨거운 사랑이다.

         

       ‘저 멍청한 황태자와 열렬하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겠다고?’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끼리끼리 주제에 맞게 이어진다고. 조상님들이 괜히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게 아니다.

         

       ‘아쉽네.’

         

       이 감정과 생각을 같이 공유할 진이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 나란히 서 있는 저 둘의 조합을 봤더라면 진도 빵 터졌을 텐데.

         

       ‘진은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 * *

         

         

       내가 진 바렌베르크로 빙의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 각인을 새겨준 망할 초월 마법사.

         

       깊게 파인 주름과 칠흑과도 같은 눈. 보고만 있어도 목덜미가 서려오는 인상이다.

         

       “생긴 건 여전하군, 초월 마법사.”

       “킬킬, 첫인사 한 번 건방지구먼?”

         

       초월 마법사는 굽은 허리를 일으켜 손가락을 튕겼다.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소파 두 개가 등장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지? 앉으라.”

       “…….”

         

       딱히 대화를 피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오러로 강화된 시야로 소파를 살펴보고, 안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 앉았다.

         

       “흐음. 노예 각인이 여전한 걸 보니 돌아오진 않았군.”

         

       초월 마법사는 턱을 어루만지며 눈썹을 좁히더니 멋대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를 찾아왔다니, 킬킬. 확실히 다른 회차와는 달라. 그 말도 안 되는 마법식이 성공적이었나 보구나!”

         

       입꼬리가 올라가 광대에 걸치며 칠흑과도 같은 눈동자가 빛난다. 소름이 끼치는 미소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래, 가짜 진 바렌베르크. 궁금한 걸 물어라.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답해주지!”

         

       뭐가 그리 신난 건지 텐션이 하늘을 찌를 것 같다.

         

       “거의 확정했지만, 혹시 모르니 한 번 묻지. 내 몸에 새겨진 회귀와 이동의 마법진은 네가 새긴 건가?”

         

       초월 마법사는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 새기느라 정말 힘들었지. 내가 만든 마법식만 보면 용언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야, 킬킬.”

         

       회귀와 이동의 마법진의 설명은 카자르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너는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내가 맞춰보지. 이 몸의 원래 주인, 진 바렌베르크는 계속되는 회귀를 통해 영혼이 완전히 손상됐어. 그래서 차원 이동 마법을 사용해 나를 데려온 것. 맞나?”

         

       눈을 얕게 뜨고 쏘아봤다. 지금은 얼굴의 미세한 변화라도 포착해야 한다.

         

       “킬킬킬,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지?”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거여.”

         

       당혹스럽다. 이 회귀와 차원 이동의 마법진으로 유추한 건데 전제가 틀렸다고?

         

       “그래도 하나 맞는 게 있구먼. 계속되는 회귀를 통해 영혼이 손상됐다는 것. 이건 맞어.”

         

       고작 맞춘 건 하나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질문했다.

         

       “그럼 내가 말한 것에 대한 진실은 뭐지?”

       “아쉽게도 그건 대답해줄 수가 없구먼.”

       “뭐? 아까는 다 물어보라며?”

       “진짜 진과 한 계약 내용이라 말이지.”

         

       그 계약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내용은 발설할 수 없다는 건가. 더 캐묻고 싶은데…….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고.’

         

       어쩔 수 없군. 다음 질문이다.

         

       “성녀, 소미레와는 무슨 관계냐. 초월 마법사쯤이나 되는 네가 왜 소미레를 대신하면서 움직이는 거지?”

         

       시답잖은 암살자를 보냈던 것도, 모옥을 움직인 것도 초월 마법사다. 소미레는 프란체를 죽이려 하고 있고, 초월 마법사는 그걸 돕고 있다.

         

       “그 우매한 년이 부탁해서지. 그렇게 된 건 내 책임도 있고 말이야.”

         

       태도를 봤을때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는 아니다. 소미레의 부탁을 마지 못해 들어주고 있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이게 책임이라는 거겠지.

         

       “소미레가 원하는 건 뭐지?”

       “그건 대답 못혀. 계약인지라.”

         

       뭐, 상관없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럼 내가 그 원하는 걸 맞춰보지. 소미레는 왜 프란체를 죽이려 하고 있지?”

         

       초월 마법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킬킬, 그건 알고 있군. 그것도 계약 내용인지라 말할 수가 없구먼. 다른 질문.”

         

       이 망할 마귀할멈이. 그냥 다 대답해줄 생각 없는 거잖나.

         

       “쯧.”

         

       나는 일방적으로 궁금한 입장이고 초월 마법사는 모든 걸 알고 대답해주는 입장이다. 주도권은 상대에게 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나는 진 바렌베르크와 다른 인물이다. 특정 조건에 맞춰서 동기화가 심화한다는 음성이 들리지. 이건 진 바렌베르크가 몸을 다시 차지하려고 하는 건가?”

         

       내 말에 초월 마법사는 폭소했다.

         

       “킬킬킬! 이거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나!”

         

       나는 “뭐?”하면서 미간을 구겼다.

         

       “정말, 나를 찾아왔길래 조금은 기대했건만 자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먼. 흥미가 가셨다.”

         

       초월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앉아있던 소파가 사라지며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뭐야?”

       “나가라. 지금 단계에서 할 얘기는 없어.”

       “잠깐, 아직 물을 게 더…!”

         

       화아악─! 바로 뒤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마치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여 온몸에 오러를 싣고 버텼다. 아직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초월 마법사! 나는 진 바렌베르크에게 먹히고 있는 건가!? 먹히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너와의 거래, 계약은 뭐야! 동기화할 때마다 들려오는 음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간 궁금해서 답답했던 질문들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하지만 초월 마법사는 이걸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다시 찾아와. 아, 그리고 이건 선물이여.”

         

       딱!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더니 별안간 등에서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커흑!”

         

       갑자기 찾아온 고통이 오러를 흩어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진공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풀썩! 풀밭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야?”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있는 곳은 황궁 외곽에 있는 탑의 앞이었다.

         

       “허, 그대로 쫓아낸 건가.”

         

       궁금했던 게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굳이 얻은 거라면 지금까지 생각한 게 전부 틀렸다는 것과 소미레와 초월 마법사의 계약 내용 일부인가.

         

       ‘근데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마치 노예 각인을 새긴 것처럼 등이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나는 근처에 있던 연못으로 가 제복을 벗고 거울삼아 등을 확인했다.

         

       “어?”

         

       몸을 구속하는 것처럼 싸매져 있던 붉은 사슬의 문양이 사라졌다.

         

       노예 각인이 해제된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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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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