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말입니까?”
예상조차 하지 못한 제안.
기껏해야 가르침 몇 개 정도만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뜬금없이 태극권을 배우라니, 나를 도사로 만들고 싶다 이건가?
“그래. 태극권 말이다.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
“자세한 설명 부탁 드립니다.”
“허어. 그저 자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태극권에 있다고 결론 내렸을 뿐일세.”
“제 문제…말입니까?”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 아니더냐?”
태허진인의 말대로, 위로 올라가고 싶긴 하지. 하지만 그게 태극권을 배워서 가능하다고?
그리고…
“제가 태극권을 배워도 되는 겁니까? 엄연히 무당의 무공이지 않습니까?”
외부인한테 무당의 무공을 가르치는 건 애로사항이 생길 법도 한데. 물론 내가 이쪽에서는 소속이라고 할만한 게 없지만, 그래도 태극권을 배워도 되는 걸까.
태허진인은 내 걱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술병을 어느샌가 나타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말을 덧붙였다.
“노인네들도 체조용으로 배우는 게 태극권이니, 네가 배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허나 태허진인 님께서 가르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초식만을 가르칠 것이니 고작 그런 걸로 딴지를 거는 속 좁은 도사 놈은 없을 것이다.”
“…구배지례라도 올립니까?”
“잔재주 하나 가르치는 거에 호들갑 떨 필요 없다.”
태극권이 잔재주?
하긴, 저 경지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는 태허진인 입장에서 태극권은 잔재주에 불과하겠지.
“…감사합니다.”
“수련은 잠시 후에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좀 쉬거라. 나는 잠깐 운명이 뒤틀린 아이를 보러 갈 테니.“
운명이 뒤틀린 아이?
나는 무심코 혜령이와 목경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두 사람은 태허진인이 자기들에게 다가오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멸문의 위기에서 벗어난 해남검문과 복수귀의 길에서 비껴간 혜령이.
내가 끼어듦으로서 길이 어긋나기 시작한 목경이.
어느 쪽 이야기일까.
결국 둘 다 운명이 뒤틀린 건 매한가지니, 그가 직접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리라.
…물론 목경이일 확률이 더 높지만.
“천명을 지닌 아이가 내 앞으로 온 것은 하늘이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인가…”
태허진인이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꿈속에서 말했던 대로 천기라도 읽는 모양이었다.
하늘의 뜻을 읽을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인 건지.
사실 천마도 이 사람이 맡아버리면 순식간에 쓰러트리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태허진인에게 그런 일을 맡길 수는 없겠지만.
“너무 복수에 매달리지 말거라.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언젠가 원수들을 만나게 될 터이니. 지금은 그저 네 심신을 단련하거라. 담금질 된 육체만이 네 협을 살릴 수 있으리니.”
“…감사합니다. 도사님.”
목경이는 포권을 하며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어린 아해야.”
“저, 저요?”
혜령이한테도?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인연끼리 엮였으나, 이제는 끈끈하게 엮였으니 조급해하지 말거라.”
“…감사해요 도사님!”
…어디까지 용한 거야?
아니 용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수준인데.
나는 태허진인이 회빙환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으니까.
“그럼 이제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으니…아해야. 태극권을 가르쳐줄 테니 나를 따라오거라.”
“알겠습니다.”
나는 등을 돌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은 작은 초가집 뒤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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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호랑이는…”
“신경쓰지 말거라.”
커다란 백호가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거든요. 저쪽도 딱히 나한테 관심 없는지 앞발이나 핥고 있지만…
“이곳이면 되겠구나.”
“적당히 넓군요.”
“가만히 서서 수련하게 될 터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네. 자, 이곳에 서게나.”
나는 그가 가리킨 지점에 서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태허진인은 서 있는 내 모습을 쓱 훑더니, 입을 열었다.
“태극권은 총 42초식으로 이루어진 권법이니라. 하지만 네가 배울 것은 24초식뿐이다.”
“24초식…말입니까?”
얼추 반 조금 넘는 정도의 초식만 가르쳐주겠다 이건가.
“그 정도면 충분하네. 자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는 것은 도사가 되거나 무당의 무공에 입문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것뿐이니.”
“부족한 것을 채운다…”
저게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전체적인 흐름을 보여줄 테니 잘 보게나.”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1초식부터 24초식까지 천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그의 태극권에 집중했다.
이것 또한 내게 주어진 기연이었으므로.
그가 24초식까지 마친 것은 체감상 일 다경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동작을 마치자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부드러웠습니다.”
“맞다. 무당의 무공은 순리를 따라 흐르는 부드러움과 태극의 조화를 강조하는 무공이다. 태극권이 비록 기초공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지만, 단언컨대 태극권보다 무당의 정신을 잘 담고있는 무공은 없네. 그렇기에 자네가 태극권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자, 시범을 보여주었으니 한번 따라해 보게나.”
…한 번 보고 따라 하라는 건가.
될까?
나는 머릿속에서 보았던 태극권의 초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24개의 초식들.
나는 기억이 나는 대로 태극권의 초식을 전개했다.
어설프고, 구멍이 숭숭 뚫린 꼴사나운 움직임을.
하지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나는 어정쩡하게 24번째 초식을 마치고 태허진인을 쳐다보았다.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나를 쓱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몇 번 더 보여줄 테니 천천히 배우거라. 시간은 많으니.”
태허진인은 다시 내게 초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초식을 전개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내 움직임을 보강해나갔다.
다행스럽게도 태극권의 초식들은 태반이 간단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괜히 기초공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게 아니지.
그렇게 태극권의 초식을 익히기를 몇 시진.
나는 천주봉을 잡아먹은 어둠 속에서 열심히 팔다리를 놀렸다.
“그만하거라. 나머지는 내일 다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작은 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잠을 자거라.”
“방까지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속세의 술도 즐겼으니…”
그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집안으로 사라지자, 백호도 몸을 일으키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직 꿈속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네.”
꿈일 리가 없지만.
나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작은 방으로 향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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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쓸만한 동작이 나오는구나.”
“그렇습니까?”
며칠 동안 태극권만 해서 그런가, 이제 슬슬 동작이 태허진인의 눈에도 들 정도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초식을 마치고 숨을 내쉬며 태허진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말을 더 꺼낼 것이 확실했으니까.
“자, 태극권을 연마하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물처럼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느냐?”
“초식 하나하나가 끊기지 않고 다음 초식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니, 어찌 부드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느냐?”
“…이유극강(以柔克剛)을 느꼈습니다.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춤사위처럼 보일 정도로 느긋하고 부드럽지만, 그 속에는 어떤 강한 힘이라도 받아넘길 수 있는 굳은 심지가 태극권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흠…꽤 쓸만하구나.”
“과찬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배운 무예도 태극권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면이 있으니 말입니다.”
“일맥상통이라…어떤 면에서 그러하다고 느꼈느냐?”
“제가 배운 검술과 금나수법은 부드러움을 추구했습니다.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다만…그 방향성은 다릅니다. 군인의 무예가 그렇듯 적을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부드러움.
허나 속에 칼을 숨겼는지, 아니면 뜻을 숨겼는지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되는 법.
캄프링엔은 속에 칼을 숨겨 살의를 가진 무술이 되었고, 태극권은 오로지 뜻을 담아 활권(活拳)이 되었다.
내 말에 태허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네 몸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묻어나고 있다네. 종국에는 자네를 집어삼킬 수 있는 짙은 살기 말일세. 무림인들에게 살기는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지만, 자네는 그보다도 더하군. ”
…악명을 떨치는 마두라도 나보다 많은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으리라.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내 몸에 밴 피 냄새는 시체 썩는 악취보다도 더 진할 테니까.
“그래서 제게 태극권을 가르치신 거였군요.”
“맞다.”
“허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길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태허진인은 내 물음에 곧바로 답해주었다.
“가볍게 추수(推手)를 하자꾸나.”
갑자기 대련이라니.
나는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하는 태허진인의 모습에 똑같이 기수식을 취했다.
수십년간 태극권을 연마한 무인과 이제 갓 태극권을 배운 초짜의 대련. 승산은 없다시피 하지만, 어차피 이것은 대련.
중요한 것은 이 대련에서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뿐.
“한 수 부탁드립니다.”
“그래, 선공은 양보할 테니 한번 와 보거라.”
그의 말에 나는 땅을 박차 거리를 좁혔다.
TMI:
추수(推手)는 태극권에서 대련을 말합니다.
이유극강(以柔克刚)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로서 노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메인 소재가 태극권이라 한자 비중이 조금 커졌습니닷.
아무튼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