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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

        “태극권…말입니까?”

        ​

        예상조차 하지 못한 제안.

        ​

        기껏해야 가르침 몇 개 정도만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뜬금없이 태극권을 배우라니, 나를 도사로 만들고 싶다 이건가?

        ​

        “그래. 태극권 말이다.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

        ​

        “자세한 설명 부탁 드립니다.”

        ​

        “허어. 그저 자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태극권에 있다고 결론 내렸을 뿐일세.”

        ​

        “제 문제…말입니까?”

        ​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 아니더냐?”

        ​

        태허진인의 말대로, 위로 올라가고 싶긴 하지. 하지만 그게 태극권을 배워서 가능하다고?

        ​

        그리고…

        ​

        “제가 태극권을 배워도 되는 겁니까? 엄연히 무당의 무공이지 않습니까?”

        ​

        외부인한테 무당의 무공을 가르치는 건 애로사항이 생길 법도 한데. 물론 내가 이쪽에서는 소속이라고 할만한 게 없지만, 그래도 태극권을 배워도 되는 걸까.

        ​

        태허진인은 내 걱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술병을 어느샌가 나타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말을 덧붙였다.

        ​

        “노인네들도 체조용으로 배우는 게 태극권이니, 네가 배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

        “허나 태허진인 님께서 가르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

        “초식만을 가르칠 것이니 고작 그런 걸로 딴지를 거는 속 좁은 도사 놈은 없을 것이다.”

        ​

        “…구배지례라도 올립니까?”

        ​

        “잔재주 하나 가르치는 거에 호들갑 떨 필요 없다.”

        ​

        태극권이 잔재주?

        ​

        하긴, 저 경지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는 태허진인 입장에서 태극권은 잔재주에 불과하겠지.

        ​

        “…감사합니다.”

        ​

        “수련은 잠시 후에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좀 쉬거라. 나는 잠깐 운명이 뒤틀린 아이를 보러 갈 테니.“

        ​

        운명이 뒤틀린 아이?

        ​

        나는 무심코 혜령이와 목경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두 사람은 태허진인이 자기들에게 다가오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멸문의 위기에서 벗어난 해남검문과 복수귀의 길에서 비껴간 혜령이.

        ​

        내가 끼어듦으로서 길이 어긋나기 시작한 목경이.

        ​

        어느 쪽 이야기일까.

        ​

        결국 둘 다 운명이 뒤틀린 건 매한가지니, 그가 직접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리라.

        ​

        …물론 목경이일 확률이 더 높지만.

        ​

        “천명을 지닌 아이가 내 앞으로 온 것은 하늘이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인가…”

        ​

        태허진인이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가 꿈속에서 말했던 대로 천기라도 읽는 모양이었다. 

        ​

        하늘의 뜻을 읽을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인 건지.

        ​

        사실 천마도 이 사람이 맡아버리면 순식간에 쓰러트리고 올 수 있지 않을까.

        ​

        태허진인에게 그런 일을 맡길 수는 없겠지만.

        ​

        “너무 복수에 매달리지 말거라. 흐르는 대로 움직이면 언젠가 원수들을 만나게 될 터이니. 지금은 그저 네 심신을 단련하거라. 담금질 된 육체만이 네 협을 살릴 수 있으리니.”

        ​

        “…감사합니다. 도사님.”

        ​

        목경이는 포권을 하며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

        “그리고…어린 아해야.”

        ​

        “저, 저요?”

        ​

        혜령이한테도?

        ​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인연끼리 엮였으나, 이제는 끈끈하게 엮였으니 조급해하지 말거라.”

        ​

        “…감사해요 도사님!”

        ​

        …어디까지 용한 거야?

        ​

        아니 용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수준인데.

        ​

        나는 태허진인이 회빙환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으니까.

        ​

        “그럼 이제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으니…아해야. 태극권을 가르쳐줄 테니 나를 따라오거라.”

        ​

        “알겠습니다.”

        ​

        나는 등을 돌려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은 작은 초가집 뒤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저 호랑이는…”

        ​

        “신경쓰지 말거라.”

        ​

        커다란 백호가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거든요. 저쪽도 딱히 나한테 관심 없는지 앞발이나 핥고 있지만…

        ​

        “이곳이면 되겠구나.”

        ​

        “적당히 넓군요.”

        ​

        “가만히 서서 수련하게 될 터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네. 자, 이곳에 서게나.”

        ​

        나는 그가 가리킨 지점에 서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태허진인은 서 있는 내 모습을 쓱 훑더니, 입을 열었다.

        ​

        “태극권은 총 42초식으로 이루어진 권법이니라. 하지만 네가 배울 것은 24초식뿐이다.”

        ​

        “24초식…말입니까?”

        ​

        얼추 반 조금 넘는 정도의 초식만 가르쳐주겠다 이건가. 

        ​

        “그 정도면 충분하네. 자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는 것은 도사가 되거나 무당의 무공에 입문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것뿐이니.”

        ​

        “부족한 것을 채운다…”

        ​

        저게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

        “전체적인 흐름을 보여줄 테니 잘 보게나.”

        ​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1초식부터 24초식까지 천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

        나는 그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그의 태극권에 집중했다.

        ​

        이것 또한 내게 주어진 기연이었으므로. 

        ​

        그가 24초식까지 마친 것은 체감상 일 다경도 되지 않아서였다.

        ​

        그는 동작을 마치자 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

        “부드러웠습니다.”

        ​

        “맞다. 무당의 무공은 순리를 따라 흐르는 부드러움과 태극의 조화를 강조하는 무공이다. 태극권이 비록 기초공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지만, 단언컨대 태극권보다 무당의 정신을 잘 담고있는 무공은 없네. 그렇기에 자네가 태극권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자, 시범을 보여주었으니 한번 따라해 보게나.”

        ​

        …한 번 보고 따라 하라는 건가.

        ​

        될까?

        ​

        나는 머릿속에서 보았던 태극권의 초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24개의 초식들.

        ​

        나는 기억이 나는 대로 태극권의 초식을 전개했다.

        ​

        어설프고, 구멍이 숭숭 뚫린 꼴사나운 움직임을. 

        ​

        하지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

        나는 어정쩡하게 24번째 초식을 마치고 태허진인을 쳐다보았다. 뒷짐을 지고 선 채로 나를 쓱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몇 번 더 보여줄 테니 천천히 배우거라. 시간은 많으니.”

        ​

        태허진인은 다시 내게 초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초식을 전개하는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내 움직임을 보강해나갔다.

        ​

        다행스럽게도 태극권의 초식들은 태반이 간단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괜히 기초공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게 아니지.

        ​

        그렇게 태극권의 초식을 익히기를 몇 시진.

        ​

        나는 천주봉을 잡아먹은 어둠 속에서 열심히 팔다리를 놀렸다.

        ​

        “그만하거라. 나머지는 내일 다시 하자꾸나.”

        ​

        “알겠습니다.”

        ​

        “작은 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잠을 자거라.”

        ​

        “방까지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속세의 술도 즐겼으니…”

        ​

        그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집안으로 사라지자, 백호도 몸을 일으키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

        “…아직 꿈속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네.”

        ​

        꿈일 리가 없지만.

        ​

        나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작은 방으로 향헀다.

        ​

        ——————————-

        ​

        “이제 좀 쓸만한 동작이 나오는구나.”

        ​

        “그렇습니까?”

        ​

        며칠 동안 태극권만 해서 그런가, 이제 슬슬 동작이 태허진인의 눈에도 들 정도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초식을 마치고 숨을 내쉬며 태허진인의 말을 기다렸다.

        ​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말을 더 꺼낼 것이 확실했으니까.

        ​

        “자, 태극권을 연마하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

        “…물처럼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느냐?”

        ​

        “초식 하나하나가 끊기지 않고 다음 초식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니, 어찌 부드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느냐?”

        ​

        “…이유극강(以柔克剛)을 느꼈습니다.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춤사위처럼 보일 정도로 느긋하고 부드럽지만, 그 속에는 어떤 강한 힘이라도 받아넘길 수 있는 굳은 심지가 태극권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

        “흠…꽤 쓸만하구나.”

        ​

        “과찬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배운 무예도 태극권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면이 있으니 말입니다.”

        ​

        “일맥상통이라…어떤 면에서 그러하다고 느꼈느냐?”

        ​

        “제가 배운 검술과 금나수법은 부드러움을 추구했습니다.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다만…그 방향성은 다릅니다. 군인의 무예가 그렇듯 적을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해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

        부드러움.

        ​

        허나 속에 칼을 숨겼는지, 아니면 뜻을 숨겼는지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되는 법.

        ​

        캄프링엔은 속에 칼을 숨겨 살의를 가진 무술이 되었고, 태극권은 오로지 뜻을 담아 활권(活拳)이 되었다.

        ​

        내 말에 태허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

        “네 몸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묻어나고 있다네. 종국에는 자네를 집어삼킬 수 있는 짙은 살기 말일세. 무림인들에게 살기는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지만, 자네는 그보다도 더하군. ”

        ​

        …악명을 떨치는 마두라도 나보다 많은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으리라.

        ​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내 몸에 밴 피 냄새는 시체 썩는 악취보다도 더 진할 테니까.

        ​

        “그래서 제게 태극권을 가르치신 거였군요.”

        ​

        “맞다.”

        ​

        “허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길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태허진인은 내 물음에 곧바로 답해주었다.

        ​

        “가볍게 추수(推手)를 하자꾸나.”

        ​

        갑자기 대련이라니.

        ​

        나는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하는 태허진인의 모습에 똑같이 기수식을 취했다.

        ​

        수십년간 태극권을 연마한 무인과 이제 갓 태극권을 배운 초짜의 대련. 승산은 없다시피 하지만, 어차피 이것은 대련.

        ​

        중요한 것은 이 대련에서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뿐.

        ​

        “한 수 부탁드립니다.”

        ​

        “그래, 선공은 양보할 테니 한번 와 보거라.”

        ​

        그의 말에 나는 땅을 박차 거리를 좁혔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TMI:

    추수(推手)는 태극권에서 대련을 말합니다.

    이유극강(以柔克刚)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로서 노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메인 소재가 태극권이라 한자 비중이 조금 커졌습니닷.

    아무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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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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