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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적 1개 부대, F7로 진격했습니다.”

     

    “선봉 5군을 E4로.”

     

    보고를 받은 아셀라가 절도있게 기사들을 지휘했다.

     

    “선봉 4군을 D3로.”

     

    오프닝이 이어진다. 이 두 수에서 서로 어떤 전략을 취하는지 속살이 드러난다.

     

    권터는 나름 전략 이론에는 능하다.

     

    아셀라는 그 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단 1수도 낭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프닝의 배치를 머릿속에서 그려낸 아셀라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냈다.

     

    ‘고지대를 미리 점령해 이점을 가져갈 의도 같아. 내 선봉대는 발이 빠르니 먼저 파고들겠어.’

     

    ―채앵!

     

    멀리서 전투의 긴박한 쇳소리가 산 전역에 울려 퍼졌다.

     

    양측 군이 본격적으로 맞붙었다는 신호다.

     

    시작이다. 아셀라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턴에 주어진 5분이 지나자 보고가 들어왔다.

     

    “선봉 2군, 적 선봉대 1개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셋을 쓰러트리고 둘을 잃었습니다.”

     

    모의전이기에 전투는 비살상 무기로 진행된다. 쓰러지거나 기절해 탈락한 기사는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지 못한다.

     

    “정찰대인 모양이네. 이쪽이 다섯이었음을 생각하면 큰 이익은 아니야. 중갑병 1군, 고지대를 점령하겠어. H3으로!”

     

    아셀라의 명령에 따라 중갑기사들이 함성과 함께 산지를 뛰어 올라갔다.

     

     

     

    전투가 중반을 넘어가니 권터에게도 확연한 흐름이 보였다.

     

    “적군 생존자 서른, 아군 마흔하나입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권터가 승리를 직감하며 흥분했다.

     

    “점령한 고지대는 셋. 월광궁은 하나야. 무리해서 고지대를 점령하려다가 뒤통수를 맞았구나, 아셀라.”

     

    2병영의 기사들은 대체로 덩치가 크고 중갑을 선호한다.

     

    같은 숫자라면 평지에서 정면으로 붙었을 때 일성궁이 불리하다.

     

    때문에 권터는 가죽 경갑과 숏소드로 무장한 가벼운 기동대로 산지에서의 습격을 노렸다.

     

    “체스와는 달라. 공격 방향에 따라 승률이 달라진다고.”

     

    자신의 전략이 먹혀들었다. 이대로만 가면 이길 수 있다.

     

    숏소드를 쥔 권터의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콰과광!

     

    권터의 부대가 서있던 지형의 삼면을 둘러싸며 얼음벽이 생성됐다.

     

    “뭣!”

     

    얼음벽의 높이는 몇 미터는 되고 두께도 어지간해선 깰 수 없을 수준이었다.

     

    갇혀버렸다.

     

    “아셀라의 위치가 어디지?”

     

    “C7, 본대에서 세 칸입니다!”

     

    권터가 혀를 찼다.

     

    “고지대에서 밀려 본대가 고립되는 바람에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대였다. 아셀라는 직접 권터의 본진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습격당하면 끝이야. 이동해야 해. 본대, F10으로!”

     

    봉쇄된 삼면. 도망칠 방향은 동쪽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권터가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잠시.

     

    ―콰아앙!

     

    다시 거대한 얼음벽이 올라오며 무성한 나무를 이리저리 헤집어놓는다.

     

    다시금 이동할 방향이 한정됐다. 온 곳은 돌아갈 수 없으니 반대쪽뿐이다.

     

    “설마 아셀라.”

     

    권터는 아셀라의 의도를 눈치챘다.

     

    다음으로 이동해야 동쪽 지역.

     

    그곳에는 이미 무리한 돌진을 이어오던 월광궁의 선봉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미로에 가두려고…!”

     

    권터가 혀를 찼다.

     

    한 구역의 크기는 못해도 가로세로가 200 미터는 된다. 여기는 전장이지 조그마한 체스판이 아니다.

     

    그만한 구역 두 개를 통째로 얼음벽으로 둘러싸다니, 반칙이나 다름없지 않나.

     

    “저만한 마법을 어떻게 상정하냐고!”

     

    이만큼 정교한 빙결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할 수 있을 정도라니.

     

    괴물이다. 괴물을 상대하고 있단 걸 잠시 잊었다. 권터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셀라의 턴이 됐다. 그녀가 취할 수는 정해져 있었다.

     

    “오, 온다…!”

     

    멀리서 산 중턱을 내려오며 돌진하는 무리가 보인다.

     

    선봉에 선 기사는 투구 사이로 붉은 머리칼을 흩날린다.

     

    소문이 무성한 소드익스퍼트, 타냐가 틀림 없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냐가 정중한 말과 다르게 난폭하게 검을 휘둘렀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셀라의 턴은 3분이나 남았다.

     

    그동안 권터의 본대는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기사들, 3분만 버텨!”

     

    조금만 있으면 다시 권터의 턴이 돌아와 도망칠 수 있다.

     

    기동대를 불러 방어에 써도 된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친다.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돌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흡!”

     

    타냐의 검기는 예리하고 정확했다. 틀어내는 발목과 휘두르는 궤적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다.

     

    “크억!”

     

    타냐의 가검에 얻어맞은 기사들이 검기의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그녀의 실력은 소문대로 황제의 친위대 소드마스터들에 근접할 정도였다.

     

    그저 버티기를 한창, 마법으로 증폭된 호루라기 소리가 산 전역에 울렸다.

     

    “턴, 턴이 왔어…! 기동대! F7까지 최대한 달려와라!”

     

    권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지금껏 펼쳐온 전략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적군을 끊어내느라 여기저기 넓게 배치된 진형이 이 위기를 초래했다.

     

    5분 후, 전장에 기동대가 도착했다. 거리가 멀어서 이동에 모든 시간을 소모해 버렸다.

     

    그래도 위기는 넘겼다.

    이들을 돌파하고 다음 지역으로 탈출하려 권터가 마음먹은 순간.

     

    ―쾅!

     

    권터의 등에 얼음 덩어리가 작렬했다.

     

    “정신 못 차린 꼴이 꼭 물가에서 건져낸 연어 같구나, 권터.”

     

    얼음벽 마법을 해제하며 아셀라가 자신만만하게 걸어 들어왔다.

     

    승리를 확신하는 아셀라의 표정을 보니 권터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모의전에서 기사 외의 다른 전략을 써오다니, 반칙이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사령관도 전력 중 한 명인 이상 최대한 능력을 써야 하지 않겠어?”

     

    “그, 그게 반칙이라고! 머리싸움으로는 내가 나이도 어린 네게 질 리가 없는데!”

     

    “한심하긴. 나이 말곤 자랑할 게 없는 모양이구나.”

     

    아셀라가 냉정하게 말하며 지팡이로 권터를 가리켰다.

     

    그녀의 본대에 편성된 열 명의 기사가 일제히 몸을 던졌다.

     

    하나둘 쓰러지는 자신의 호위기사들을 보며, 권터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나이 말고 자랑할 게 없다고?”

     

    그가 이를 뿌득 갈며 소리쳤다.

     

    “어미를 잘 만나 재능 빨로 이기는 주제에!”

     

    “푸핫.”

     

    아셀라는 진심에서 우러난 비웃음으로 회답했다.

     

    재능의 대가가 얼마나 괴로운지, 친모인 카밀라는 얼마나 고통을 줬는지, 자신이 마법을 익히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당연히 그런 것은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전 같으면 황실에 대한 증오가 늘어날 발언이었지만, 아셀라는 여유가 넘쳤다.

     

    지금은 그 모든 걸 공감해 줄 사람이 있다.

     

     

    그녀는 모욕을 받아넘기며, 오히려 적을 도발할 문장을 던졌다.

     

    “너, 헤이케랑 친남매 아니었어?”

     

    “이…!”

     

    아셀라가 대놓고 비교해오니 권터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아바마마도 보고 계신데…!’

     

    분하지만 타개할 방책도 없다.

     

    일성궁의 기사들이 월광궁에게 밀려 하나둘 쓰러져간다.

     

    기사단장마저 정신을 잃고 자신의 발밑에 머리를 고꾸라박자, 권터는 최후의 수단을 쓸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능하지 않아!”

     

    권터가 품에서 병을 꺼내 들었다.

    리비오가 넘겨줬던 그 물건이었다.

     

    이걸 쓰면 직접 싸워서라도 아셀라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황실이 문제야! 나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천재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너희 같은 괴물들과 어떻게 경쟁하라는 거야!”

     

    권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셀라는 그런 권터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일갈했다.

     

    “괴물 소굴에서 혼자 백조로 태어난 줄 알았니? 먹물을 온 깃털에 묻혀서라도 날아오를 포부는 있어야지. 내가 네 자리에 있었으면 이 황궁 따위는 진작 먹어치웠어.”

     

    “윽…!”

     

    권터가 이를 악물었다.

     

    ‘더는 못 참아!’

     

    ―쨍그랑!

     

    그가 병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줘 산산조각냈다.

     

    ―화악!

     

    안에 들어있던 검은 기운이 퍼지며 그를 감싸듯 덮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먹어치워주마, 아셀라!”

     

    주문이 권터를 감싼다.

     

    순간, 그는 몸 안쪽부터 불타오르는 힘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오…!”

     

    리비오가 준비한 필살의 주문이니 효과가 대단할 것은 분명했다.

     

    이 힘이 있으면 설령 강한 기사와 마법으로 무장한 아셀라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권터의 자신감이 하늘 끝을 찌르던 때였다.

     

    “어어…?!”

     

    무언가 잘못됐다.

     

    검을 쥔 권터의 손이 울룩불룩 뒤틀린다.

    근육이 폭발할 듯 단단해지고 확장한다.

    옷을 찢어버릴 기세로 몸이 커지고 있었다.

     

    “권터, 뭘 쓴 거야?”

     

    아셀라가 눈을 찌푸렸다. 분명 손대선 안 될 금단의 주문을 썼다.

     

    “아셀라아아아!”

     

    권터의 몸이 거대해지며 눈이 붉게 빛난다.

     

    그 기괴한 모습에 아셀라가 겁먹은 순간.

     

    “내 이럴 줄 알았지.”

     

    타냐의 곁에 있던 한 중갑기사가 아셀라의 앞을 막아섰다.

     

     

     

    ***

     

     

    나는 한참이나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탓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래도 타냐가 이끌어준 덕에 선봉대에서 무리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아셀라를 등진 채 괴물처럼 변이하고 있는 권터와 마주선다.

     

    타냐 역시 바로 상황을 깨닫고 지원하러 날아 들어왔다.

     

    “선생님, 이건.”

     

    “주술이야. 강화 효과를 가진 저주지.”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코끼리 다리만큼 굵어진 권터의 주먹이 날아 들어왔다.

     

    ―카가각!

     

    다행히 타냐가 빠르게 반응해 권터의 팔을 쳐냈다. 깜짝 놀랐네.

     

    “오오오오!”

     

    권터가 아직 강화된 신체에 익숙하지 않은지 몸을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나는 아셀라를 뒤로 밀었다.

     

    “황녀님, 일단 피하십시오. 위험합니다.”

     

    “공자?! 여기서 뭐 해!”

     

    아셀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 바꿨는데.”

     

    “내가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줄 알아? 공자야말로 당장 여기서 나가!”

     

    “그건 죄송합니다만, 사정이…”

     

    “이번 건에서는 손 떼라고 했지. 왜 그렇게 멋대로 행동해?!”

     

    “실제로 제가 필요해지셨잖아요. 타박은 나중에 해주세요.”

     

    팍!

     

    아셀라는 분이 안 풀렸는지 지팡이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용서 안 할 거니까 당장 이탈해. 의사가 전투 한복판에서 뭐 하는데…!”

     

    “아뇨, 싸우지 마시고 두 분 다 피하시죠.”

     

    타냐가 우리 앞으로 몸을 날리며 방어태를 취했다.

     

    ―콰앙!!

     

    권터가 온몸을 던져 우리를 덮쳤다.

     

    그의 발이 찍은 지면이 갈라지며 지뢰가 터진 듯 흙이 하늘을 날았다.

     

    하지만 나와 아셀라는 타냐 덕에 멀쩡했다.

     

    다른 기사들도 몰려들어 권터를 우리에게서 떨어트린다.

     

    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나는 아셀라를 설득했다.

     

    “황녀님, 권터는 주술이라고 하는 저주에 걸린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침착하게 설명했지만 아셀라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왜 말을 안 들어? 공자만 할 수 있어? 내가 제압해도 될 일이잖아.”

     

    “제가 방법을 알아요.”

     

    “쓰러트리면 그만이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아셀라가 비명을 토해내듯 외쳤다.

     

    그녀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다.

     

    그야… 신하인 동안 내 목숨은 아셀라의 것이니 맘대로 쓰면 안 되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격하게 싫어할 이유가 있나.’

     

     

    …설마 진짜로 아셀라가 나를 걱정하나?

     

    그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가?

     

    만약 진짜로 그렇다면.

     

    ‘아셀라는 내가 아는 황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마주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단순한 분노가 아닌 원망이 섞여있다고 느껴졌다.

     

     

    콰앙! 전투의 폭풍이 몰아친다.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요대 주머니에서 휴고가 만든 장비를 꺼냈다.

     

    “안 죽어요. 이게 있으면 저주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어요.”

     

    “파악해서 어떡하려고?”

     

    짤그랑.

     

    나는 목가에 손을 넣어 늘 걸고 다녔던 그 아티팩트를 꺼냈다.

     

    [어둠 화신의 아뮬렛].

     

    마나를 흘려넣으니 스킬창에 두 줄이 추가됐다.

     

     

    [특수 스킬 사용 가능]

    [주문 : 저주 생성]

    [주문 : 저주 조종]

     

     

    내가 아셀라에게 대답했다.

     

    “가지고 놀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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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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