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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아.”

       

       불로불사의 연구.

       

       베니의 말을 듣고 문득 내가 뿌려둔 마탑의 떡밥이 생각났다.

       

       엘프에는 이브라는 전대 여왕이, 신전에는 이단과 손을 잡은 교황이 에피소드의 주요 키워드였다면.

       

       마탑 떡밥의 주요 키워드는 실패한 불로불사였다.

       

       이 부분도 다른 설정들처럼 자세한 내용을 설정해 두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딱 하나. 확실하게 정해둔 것이 있다.

       

       바로 마탑의 변질.

       

       마탑은 마법을 기적에서 기술로 끌어내렸으며, 마법의 은혜를 보다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하였다.

       

       만약 그런 마탑이 어느 날 타락하여 사람을 위한 기술을 만든다며 사람을 갈아 넣으면 어떻겠는가.

       

       흔하다면 흔한 클리셰. 하지만 그런 만큼 잘만 쓰면 너도 나도 좋아하는 내용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구상한 것이 바로 마탑의 변질이다.

       

       제한된 불로불사를 완성하며 윤리와 도덕을 내다 버린 마법사들. 한때 판 그레이브의 자랑이었던 마탑은 악의 축을 불리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소중한 이를 위해 족히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높게 솟아있던 마탑을 향해 도전하여 기어이 무너뜨린다.

       

       상상만 해도 맛도리 아닌가.

       

       내가 그 마탑 변질의 첫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베니. 힘들지만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응.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하겠지만, 샤도우가 있으니 탈출 자체는 가능할 거야.”

       

       “…….”

       

       그 말이 왜 이리 불안하게 느껴진 걸까.

       

       베니의 존재는 너무나도 눈에 띈다. 작고 어린 외형. 징그러운 괴물. 그리고 이를 닮아가는 주인.

       

       크리피 위치라는 이명도 그렇고, 베니타스 베니베니라는 본명도 그렇고 눈에 안 띄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니라는 캐릭터를 설정한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쓰려던 소설이니 이 세상은 전부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미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세계가 아니라는 건 몸으로 몇 번이고 경험했으니까.

       

       다만, 베니의 특성은 너무나도 특별하고, 하필이면 그런 베니를 노리는 미친 마법사는 불로불사의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게 너무나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

       

       과연 이게 우연인 걸까. 어쩌면 꼭 여기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베니가 모르가나에게 당해 실험체로 전락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불완전하게나마 불로불사의 연구가 성과를 이루고, 마탑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만다.

       

       베니는 그런 내 불안을 알아챘는지 평평납작한 가슴을 쭈욱 펴며 웃어 보일 뿐이었지만.

       

       “걱정 마.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탈출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할 테니까. …이미 한 번 해봤던 거거든.”

       

       베니의 미소가 사납게 일그러지며, 입술 사이로 뾰족한 이빨이 드러난다.

       

       거칠어지는 호흡. 그 숨결을 따라 잠시 사라졌던 마력광이 일렁이며 베니의 주변을 맴돈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탈출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한다는 베니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베니에게 마법은 기적이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 준 동아줄이다.

       

       그리고 지금. 베니는 자신에게 내려왔던 첫 번째 기적을 재현하려 한다.

       

       내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마력을 줄기줄기 흘려대는 베니. 

       

       언뜻 보기에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2성 마법을 뽑으며 조금 나아진 마나 감응력에 잡히는 감각은 이를 부정했다.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 같은 마력이었으나, 동시에 베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력이었다.

       

       원초적인 힘.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잡아먹어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허공을 노려보던 베니가 이 모든 것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누구도 우리를 가둬둘 수는 없어.”

       

       정형화된 서클 마법이 아닌 원류에 가까운 마법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그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다.

       

       베니의 감정에 힘이 증폭되고, 울분에 찬 말 한마디 한마디가 푸른 마력의 옷을 입고 허공에 새겨진다.

       

       “누구도 우리를 상처 입힐 수 없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선언은 그 자체로 일종의 주문이라는 것을.

       

       안타까움 절반, 경외감 절반으로 눈앞의 베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자리 잡은 샤도우. 녀석의 몸이 거칠게 들끓으며 몸집을 부풀린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는 괴이한 분위기.

       

       내 앞에서는 숨겼던 이빨의 예기가 번뜩이고, 촉수는 한층 징그럽게 녹아내렸으며, 빨갛게 충혈된 눈은 수백 개로 분열하여 빼곡히 들어찬다.

       

       몬스터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견에 압도되어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 것도 잠시.

       

       허공에서 푸르게 타오르던 알 수 없는 문자가 순식간에 베니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전부 부서져 버려.”

       

       따악!

       

       짧은 한마디와 함께 손가락을 튕기는 베니.

       

       그녀의 손으로부터 푸른 파동이 퍼져 나오더니, 이내 한 점에 집중된 번개가 되어 공간 전체를 눈부신 뇌광으로 물들인다.

       

       “미친….”

       

       저게 대체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 안에 담긴 힘은 공간을 억지로 찢어발기기 충분하리라고.

       

       쩌적!

       

       실제로 허공이 갈라지며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찬 균열이 나타났다.

       

       창백한 번개가 균열을 완전히 부수기 위해 몰려든다.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의 격류에 몸을 잔뜩 긴장시키는 것도 잠시.

       

       이제 곧 찢어져 우리를 삼킬 거라 생각했던 균열은 여전히 잘만 버티고 있었다.

       

       그 안에서 회색 안개를 뿜어내면서 말이다.

       

       “아.”

       

       회색 안개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깨달았다. 저건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베니의 마법도, 균열에서 느껴지는 마법도 경외감이 느껴지는 것은 매한가지. 허나, 저 안개에서는 짙은 두려움과 거부감만이 들었다.

       

       죽음.

       

       저 안개는 잘 정제된 죽음 그 자체였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끝을 앞당겨 오는 사멸의 힘. 이질적인 신성의 잔향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죽음의 신의 성물이다. 같은 밀도의 권능이 아니면 저항하지 못하고 닿는 모든 것이 부스러지리라.

       

       다행히 마법은 권능의 한 갈래인 터라 베니의 번개는 죽음의 안개와 팽팽히 맞서고 있었지만.

       

       왜 베니가 성물의 힘으로 ‘고정’했다고 말한 건지 이해했다.

       

       저 힘은 아마 이 공간을 단절시킨 마법마저도 사멸시켰으리라.

       

       시작과 끝이 죽고 결과만이 남은 공간. 이를 파훼하는 것은 아무리 베니라도 쉬운 일이 아닐 터.

       

       뭐라도 도와야 하나 싶어 품속의 씨앗을 만지작거리는 때였다.

       

       -캬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닮은 소리와 함께 샤도우가 균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샤도우?! 멈춰!”

       

       당황해 샤도우를 불러보았으나, 내 말도 무시하고 산성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입으로 거칠게 균열을 물어뜯는 샤도우.

       

       억지로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순간. 베니가 그런 나를 말렸다.

       

       “괜찮아. 샤도우는 죽지 않아. …정확히는 죽지 못하는 거지만.”

       

       “……!”

       

       그렇다. 샤도우는 이미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섞고 억지로 생명력을 들이부어 움직이게 만든 무언가.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새로이 태어난 생명이 아니다. 그저 죽어있는 채로 움직이는 기형일 뿐이지.

       

       안개를 정면에서 맞이하는 샤도우. 자세히 보니 녀석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다. 아니, 오히려 힘이 더 넘치는 것 같았다.

       

       무수히 많은 눈은 충혈된 것을 넘어 핏빛으로 번들거렸으며, 촉수는 초당 수십 번의 속도로 분열하고 합쳐지기를 반복한 것은 물론, 이빨에 이르러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물어뜯듯 허공을 잡아챈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내가 아는 한가지 현상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폭주…?”

       

       계층 수호자나 심층의 몇몇 강력한 몬스터에게서나 보이는 현상.

       

       몸을 잠식한 광기가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오는 일종의 몬스터 전용 필살기.

       

       새삼 깨달았다. 샤도우가 저래 보여도 온갖 몬스터의 광기를 농축해 만든 액기스 같은 존재라는 걸.

       

       그 안에 품고있는 광기의 축복은 심층의 계층 수호자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으리라.

       

       동시에 둘이 힘을 합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모르가나가 왜 그리 베니에게 집착했는지도 알것 같다.

       

       베니는 실험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는 불로의 존재가 되었지만, 심장이 멎고 목이 베이면 죽는 필멸자이기도 하다.

       

       반면 샤도우는 베니가 없다면 존재조차 유지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신세지만…숙주만 있다면 죽기는커녕 광기를 불태우며 점점 강해지는 불사의 괴물이다.

       

       하나하나는 불완전할지 모르나, 둘을 합쳐두면 불로불사라고도 할 수 있으니 모르가나가 그렇게나 환장한 거겠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꽉 주며 균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자니.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무언가가 불꽃처럼 주변을 둘러쌌다가 사라진다.

       

       그렇게 아지랑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조금 전과 동일한 풍경.

       

       단, 이번에는 통로 저편에 못 보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전통적이지만 화려한 마법사 로브를 걸친 중년의 여인.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베니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여전히 날카로운 상어이빨을 드러낸 채로.

       

       “야이 썅년아! 젖 달고 있는 년이 좀스럽게 2층에서 함정이나 파고 부끄럽지도 않아? 네년 덕분에 불쌍한 남자애 하나가 죽을 뻔……어? 요, 요나? 어디 갔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다 말고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는 베니.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쉿! 은신 중.”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쉿! ㅇ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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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EP.105





       “아.”


       


       불로불사의 연구.


       


       베니의 말을 듣고 문득 내가 뿌려둔 마탑의 떡밥이 생각났다.


       


       엘프에는 이브라는 전대 여왕이, 신전에는 이단과 손을 잡은 교황이 에피소드의 주요 키워드였다면.


       


       마탑 떡밥의 주요 키워드는 실패한 불로불사였다.


       


       이 부분도 다른 설정들처럼 자세한 내용을 설정해 두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딱 하나. 확실하게 정해둔 것이 있다.


       


       바로 마탑의 변질.


       


       마탑은 마법을 기적에서 기술로 끌어내렸으며, 마법의 은혜를 보다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하였다.


       


       만약 그런 마탑이 어느 날 타락하여 사람을 위한 기술을 만든다며 사람을 갈아 넣으면 어떻겠는가.


       


       흔하다면 흔한 클리셰. 하지만 그런 만큼 잘만 쓰면 너도 나도 좋아하는 내용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구상한 것이 바로 마탑의 변질이다.


       


       제한된 불로불사를 완성하며 윤리와 도덕을 내다 버린 마법사들. 한때 판 그레이브의 자랑이었던 마탑은 악의 축을 불리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소중한 이를 위해 족히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높게 솟아있던 마탑을 향해 도전하여 기어이 무너뜨린다.


       


       상상만 해도 맛도리 아닌가.


       


       내가 그 마탑 변질의 첫 희생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베니. 힘들지만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응.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하겠지만, 샤도우가 있으니 탈출 자체는 가능할 거야.”


       


       “…….”


       


       그 말이 왜 이리 불안하게 느껴진 걸까.


       


       베니의 존재는 너무나도 눈에 띈다. 작고 어린 외형. 징그러운 괴물. 그리고 이를 닮아가는 주인.


       


       크리피 위치라는 이명도 그렇고, 베니타스 베니베니라는 본명도 그렇고 눈에 안 띄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니라는 캐릭터를 설정한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쓰려던 소설이니 이 세상은 전부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미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세계가 아니라는 건 몸으로 몇 번이고 경험했으니까.


       


       다만, 베니의 특성은 너무나도 특별하고, 하필이면 그런 베니를 노리는 미친 마법사는 불로불사의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게 너무나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


       


       과연 이게 우연인 걸까. 어쩌면 꼭 여기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베니가 모르가나에게 당해 실험체로 전락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불완전하게나마 불로불사의 연구가 성과를 이루고, 마탑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길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만다.


       


       베니는 그런 내 불안을 알아챘는지 평평납작한 가슴을 쭈욱 펴며 웃어 보일 뿐이었지만.


       


       “걱정 마.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탈출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잘할 테니까. …이미 한 번 해봤던 거거든.”


       


       베니의 미소가 사납게 일그러지며, 입술 사이로 뾰족한 이빨이 드러난다.


       


       거칠어지는 호흡. 그 숨결을 따라 잠시 사라졌던 마력광이 일렁이며 베니의 주변을 맴돈다.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탈출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한다는 베니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베니에게 마법은 기적이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 준 동아줄이다.


       


       그리고 지금. 베니는 자신에게 내려왔던 첫 번째 기적을 재현하려 한다.


       


       내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마력을 줄기줄기 흘려대는 베니. 


       


       언뜻 보기에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2성 마법을 뽑으며 조금 나아진 마나 감응력에 잡히는 감각은 이를 부정했다.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 같은 마력이었으나, 동시에 베니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마력이었다.


       


       원초적인 힘.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잡아먹어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허공을 노려보던 베니가 이 모든 것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누구도 우리를 가둬둘 수는 없어.”


       


       정형화된 서클 마법이 아닌 원류에 가까운 마법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그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다.


       


       베니의 감정에 힘이 증폭되고, 울분에 찬 말 한마디 한마디가 푸른 마력의 옷을 입고 허공에 새겨진다.


       


       “누구도 우리를 상처 입힐 수 없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선언은 그 자체로 일종의 주문이라는 것을.


       


       안타까움 절반, 경외감 절반으로 눈앞의 베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자리 잡은 샤도우. 녀석의 몸이 거칠게 들끓으며 몸집을 부풀린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는 괴이한 분위기.


       


       내 앞에서는 숨겼던 이빨의 예기가 번뜩이고, 촉수는 한층 징그럽게 녹아내렸으며, 빨갛게 충혈된 눈은 수백 개로 분열하여 빼곡히 들어찬다.


       


       몬스터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견에 압도되어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 것도 잠시.


       


       허공에서 푸르게 타오르던 알 수 없는 문자가 순식간에 베니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전부 부서져 버려.”


       


       따악!


       


       짧은 한마디와 함께 손가락을 튕기는 베니.


       


       그녀의 손으로부터 푸른 파동이 퍼져 나오더니, 이내 한 점에 집중된 번개가 되어 공간 전체를 눈부신 뇌광으로 물들인다.


       


       “미친….”


       


       저게 대체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 안에 담긴 힘은 공간을 억지로 찢어발기기 충분하리라고.


       


       쩌적!


       


       실제로 허공이 갈라지며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찬 균열이 나타났다.


       


       창백한 번개가 균열을 완전히 부수기 위해 몰려든다.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의 격류에 몸을 잔뜩 긴장시키는 것도 잠시.


       


       이제 곧 찢어져 우리를 삼킬 거라 생각했던 균열은 여전히 잘만 버티고 있었다.


       


       그 안에서 회색 안개를 뿜어내면서 말이다.


       


       “아.”


       


       회색 안개에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깨달았다. 저건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베니의 마법도, 균열에서 느껴지는 마법도 경외감이 느껴지는 것은 매한가지. 허나, 저 안개에서는 짙은 두려움과 거부감만이 들었다.


       


       죽음.


       


       저 안개는 잘 정제된 죽음 그 자체였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끝을 앞당겨 오는 사멸의 힘. 이질적인 신성의 잔향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죽음의 신의 성물이다. 같은 밀도의 권능이 아니면 저항하지 못하고 닿는 모든 것이 부스러지리라.


       


       다행히 마법은 권능의 한 갈래인 터라 베니의 번개는 죽음의 안개와 팽팽히 맞서고 있었지만.


       


       왜 베니가 성물의 힘으로 ‘고정’했다고 말한 건지 이해했다.


       


       저 힘은 아마 이 공간을 단절시킨 마법마저도 사멸시켰으리라.


       


       시작과 끝이 죽고 결과만이 남은 공간. 이를 파훼하는 것은 아무리 베니라도 쉬운 일이 아닐 터.


       


       뭐라도 도와야 하나 싶어 품속의 씨앗을 만지작거리는 때였다.


       


       -캬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닮은 소리와 함께 샤도우가 균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샤도우?! 멈춰!”


       


       당황해 샤도우를 불러보았으나, 내 말도 무시하고 산성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입으로 거칠게 균열을 물어뜯는 샤도우.


       


       억지로라도 떨어뜨리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순간. 베니가 그런 나를 말렸다.


       


       “괜찮아. 샤도우는 죽지 않아. …정확히는 죽지 못하는 거지만.”


       


       “……!”


       


       그렇다. 샤도우는 이미 죽은 이들의 시체를 섞고 억지로 생명력을 들이부어 움직이게 만든 무언가.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새로이 태어난 생명이 아니다. 그저 죽어있는 채로 움직이는 기형일 뿐이지.


       


       안개를 정면에서 맞이하는 샤도우. 자세히 보니 녀석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다. 아니, 오히려 힘이 더 넘치는 것 같았다.


       


       무수히 많은 눈은 충혈된 것을 넘어 핏빛으로 번들거렸으며, 촉수는 초당 수십 번의 속도로 분열하고 합쳐지기를 반복한 것은 물론, 이빨에 이르러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물어뜯듯 허공을 잡아챈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내가 아는 한가지 현상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폭주…?”


       


       계층 수호자나 심층의 몇몇 강력한 몬스터에게서나 보이는 현상.


       


       몸을 잠식한 광기가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오는 일종의 몬스터 전용 필살기.


       


       새삼 깨달았다. 샤도우가 저래 보여도 온갖 몬스터의 광기를 농축해 만든 액기스 같은 존재라는 걸.


       


       그 안에 품고있는 광기의 축복은 심층의 계층 수호자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으리라.


       


       동시에 둘이 힘을 합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모르가나가 왜 그리 베니에게 집착했는지도 알것 같다.


       


       베니는 실험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는 불로의 존재가 되었지만, 심장이 멎고 목이 베이면 죽는 필멸자이기도 하다.


       


       반면 샤도우는 베니가 없다면 존재조차 유지할 수 없는 불안정한 신세지만…숙주만 있다면 죽기는커녕 광기를 불태우며 점점 강해지는 불사의 괴물이다.


       


       하나하나는 불완전할지 모르나, 둘을 합쳐두면 불로불사라고도 할 수 있으니 모르가나가 그렇게나 환장한 거겠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꽉 주며 균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자니.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무언가가 불꽃처럼 주변을 둘러쌌다가 사라진다.


       


       그렇게 아지랑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조금 전과 동일한 풍경.


       


       단, 이번에는 통로 저편에 못 보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전통적이지만 화려한 마법사 로브를 걸친 중년의 여인.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베니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여전히 날카로운 상어이빨을 드러낸 채로.


       


       “야이 썅년아! 젖 달고 있는 년이 좀스럽게 2층에서 함정이나 파고 부끄럽지도 않아? 네년 덕분에 불쌍한 남자애 하나가 죽을 뻔……어? 요, 요나? 어디 갔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다 말고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는 베니.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쉿! 은신 중.”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쉿! ㅇ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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