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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프리나가 유부녀 선언을 하고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그 후로 증명의 층에 남아있는 마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몇 번씩 원탁회가 열리곤 했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고.

        극지로 끌려가 버린 비나와 연락이 되지 않아 극마법 수업이 다시 열릴지도 불투명한 시점이었다.

        개강을 앞둔 평화로운 오후.

        새로 얻은 얼음 정수기의 포토카드를 갤러리에 뿌리던 나는 뭔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

        메릴릴릴사감

        [메릴랜드 관의 얼음 정수기를 새로운 모델로 바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진)

       

        한 호실 당 225골드만 분담해주시면 연구부와 협력해 싹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수결로 결정할 테니 소중한 한 표 부탁드려요!

       

        [찬성 643,111,554 / 반대 -552,532,666]

       

        — 갑자기?

        — 뭔? 정수기여?

        — 언제 갤러리에 투표 시스템 도입됐음? 개웃기네 ㅋㅋㅋㅋ

         ㄴ 숫자 보면 웃음기 싹 달아날걸

        — 225골드면 걍 트라팔가 호수에서 얼음물 떠올 대학원생 10명 사겠다 ㅅㅂ ㅋㅋㅋㅋㅋ

        — 아니 반대 눌렀는데 숫자가 미동도 없는데?

        — 씹 개표 꼬라지 봐라 ㅋㅋㅋㅋ

        — 주작기 on

        — 주딱주딱아…… 정수기가 대체 뭐라고…….

         ㄴ 저거 주딱 부계임? 

         ㄴ 그럼 비처녀 전 파딱이 갤에 뿌리고 간 똥이겠냐

         ㄴ 어허, 유부녀는 비처녀가 아니에요~

        ====

       

        아주아주 중요한 걸 까먹고 있는 듯한 기분.

        물론 세상에는 기숙사 생도들의 자금을 착복하여 신형 정수기를 도입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 따위 하나도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한 사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살살아.”

        — 살?

        “요즘 너무 평화로운 것 같지 않니?”

        — 주ㄷ닥ㅇㅣ ㄱㅏ만 있으ㄴㅣㄲㅏ

        “아니야, 분명 뭔가 놓치고 있다니까?”

       

        오랜 경험 상 이건 분명 무언가의 전조였다.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높아지기 시작하는 갤러리의 ‘농’도를 낮추기 위해 갤에 상주하는 시간을 2배로 늘렸으나 아직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원인을 모르고 아무 일도 없던 하루가 다 지나갈 때쯤.

        세탁물을 정리하던 나는 옷감 사이에서 튀어나온 작은 쪽지에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응? 이건…….”

       

        명함 사이즈의 구겨진 종이들.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바람 공략대’, ‘비너스 공략대’ 등 여러 공략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괄목할 점은 나는 지금껏 중층에서 활동하는 공략대에게 명함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다른 누군가가 받아온 것.

        그 주인은 빨래 더미를 뒤지자 곧장 찾을 수 있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드레스.

        그렇게 손세탁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건만 습관적으로 던지고 간 모양이었다.

        학기 초부터 가사 능력이 전무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보다 심각한 사항은 내가 지금껏 잊고 있던 중요한 문제가 그녀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맞다, 시간 날 때마다 괴롭혔어야 했는데.”

        — ?

        “요즘 바빠서 벨튀도 소홀히 했네. 이래서 안 된다니까 잠깐 눈을 떼면 혼자서도 쭉쭉 올라가잖아.”

        — 주ㄷ닥 악ㅁㅏㅇㅑ?

       

        어허, 악마라니.

        자고로 내가 마리엘의 등반에 제동을 거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무려 세 가지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신비의 파편을 지닌 그녀가 가만히 두면 나보다 높이 올라가 버린다는 것.

        이상한 말투에 요상한 머리 모양을 가지고 학파의 지원 따위 하나도 없으면서 마법의 재능만큼은 진짜였다.

        아직 이명을 얻은 건 아닌 듯하고 공략대의 러브콜을 받는 걸 보아 천변의 방 근처까지 간 모양인데 이건 전례 없이 빠른 거였다.

       

        두 번째는 역대 파딱들을 모두 포함해도 마리엘이 가장 재밌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

        새벽에 기숙사 벨을 누를 때마다 귀신이 빙의한 듯 쫓아오니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었다.

       

        여기까지 내 설명을 들은 살살이는 주저 없이 내가 쓴 얼음 정수기 투표 글을 썰어버렸다.

       

        “앗!”

        — 죽ㅇㅓ

        “그러지 말라니까. 아직 세 번째 이유가 남았잖아.”

        — 반으로 갈ㄹㅏㅈㅕ서 죽ㅇㅓ

       

        살살이의 검격을 피해 사감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그 길로 곧장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마리엘의 등반을 방해하는 세 번째 이유.

       

        그건 내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마탑을 무너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

       

        연구부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선이 붕괴한 여파는 단순히 30층의 시련 하나가 사라진 데 그치지 않았다.

        내가 사라진 여파가 세계의 변동폭을 수정하기에는 너무 컸기 때문에 자잘한 변화가 그대로 남은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현상이 몇몇 마법사들의 급격한 잠재력 상승.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내가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마리엘일 것이 틀림없었다.

       

        “뭔가요, 갑자기 찾아와서.”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반기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이채로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기숙사의 높은 습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뜨던 머리카락은 차분히 가라앉았고 악역영애 같은 말투에도 묘한 가시가 돋았다.

        내가 명함에 대해 물어보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책상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의 쪽지들이 먼지를 맞고 있었다.

       

        “증명의 층에서 의뢰를 받던 중에 얻은 인연이어요.”

        “이게 다 말입니까?”

        “예, 공략대는 실력만 된다면 소속따위 문제 삼지 않으니까요. 천변의 방을 통과하는 것만큼 철저한 검증도 없는 것이에요.”

       

        공략대는 중층부터 활동하지만 영입 제안은 증명의 층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실력 좋은 마법사를 발굴해서 40층 공략에 도움을 주면 전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어서다.

        금술의 일종인 시간 조작을 주로 사용하는 마리엘이 두각을 드러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대화 중에도 분탕글을 쓸 때마다 부계정들이 속절없이 썰려 나가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로 위험한 단계까지 온 게 분명했다.

        나는 한시라도 빠르게 작전을 속행하기로 했다.

       

        “가, 갑자기 뭔가요……!?”

        “가만히 있어 보세요.”

       

        우선 열빗으로 그녀의 요상한 머리 모양을 다시 잡으며 위치노트를 두들겼다.

        관리자 계정으로 오랫동안 수면 아래 묻어둔 프로토콜 ‘인외마경(人外魔境)’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갤러리에 잠적하고 있는 분탕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극약처방.

        그 위험성은 매번 무고한 파딱들이 고장 날 정도로 컸지만 이제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작년에 썼던 글을 복사하여 몇 가지 추가사항을 더한 뒤 공지에 붙여 넣었다.

       

        ====

        관리자

        [‘투기장 시스템’ 오픈 공지]

       

        금일 이 시간부로 갤러리에 투기장이 열림을 안내 드립니다.

       

        투기장은 게시판 탭 위에 자동으로 추가되며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 게시글에 달린 댓글에 10개 이상의 답글이 달리는 경우 

       

        2. 1000개 이상의 추천을 받은 개념글에 3분의 2 이상의 비추천이 달리는 경우

       

        3. 게시글 하나에 1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는 경우

       

        해당 글은 투기장 탭으로 이동되며 승리하신 분들께는 파딱 해제권과 함께 소정의 포인트가.

        패배하신 분들은 ‘겁쟁이들의 쉼터 VIP고객’ 칭호가 수여될 예정이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그럼 뿅.

        ====

       

        투기장.

        처음에는 키배에 목말라 있는 갤러리 유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예컨대 1번 같은 경우 한 주제에 대해 서로 치열하게 다투다 10분 이상 다음 댓글이 달리지 않으면 자동으로 패배가 확정된다.

        그렇게 되면 승자가 결정되며 패자는 투기장 탭에 영구 박제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약점만 보이면 서로 물어뜯는 유저들에게 아예 판을 깔아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고로 가장 많이 이긴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검투사 칭호를 내려주는데, 초대 우승자는 나였다.

       

        ====

        [투기장 떴냐!!]

       

        다들 꽉 잡아!!!

       

        — 아 ㅋㅋㅋㅋ

        — 작년에 그 꼴을 보고도 또 여는 주딱 찬양해

        — VIP 쉼터 게시판 진짜 만들었네 ㅋㅋㅋ 하여간 일 처리는 빨라

        — 투기장이 뭐임?

         ㄴ 일단 주딱이 공지에 뿅 썼으니 좆됐음

        — 올해는 포인트도 있으니 ㄹㅇ난리 날 듯

        — 현생 살러 가요~

         ㄴ 현생? 지금 갤러리 유저들 무시하는 거임?

        ====

        ====

        [저녁반 새끼들 지금까지 평화로워서 좋았지?]

       

        우리 메테오가 무슨 마법인지부터 이야기해 볼까?

       

        — 크아아악!!

        — 바로 새벽 떡밥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 좆됐네 ㅋㅋㅋㅋ

        — 으음, 이거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주제거든요

        — 근신당해도메테오 : 메테오는 얼음마법이에요

         ㄴ 근신당해도메테오 : 반박하려면 들어와도 좋아요

         ㄴ 아 씨발 바로 튀어왔잖아 ㅋㅋㅋㅋㅋ

         ㄴ 진짜 귀신같네 ㅋㅋㅋ

         ㄴ 얼죽메 ㅎㅇ

        ====

        ====

        [민트초코 vs 가지튀김]

       

        전자 추천 후자 비추

       

        [추천 449 / 비추천 330]

       

        — 가지는 음식이 아니에요

         ㄴ 민초는 치약인데?

         ㄴ 응 튀기면 뭐든 맛있어~ 

         ㄴ 주딱도 민초 좋아한다는데 니가 뭘 안다는 거임

        — 바로 어그로 튀어나오죠? ㅋㅋㅋ

        ====

        ====

        [투기장 탭에 파딱 시체 매달려 있으면 좋을 것 같으면 개추]

       

        어딘가 허전해서 미관상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추

       

        [추천 1244 / 비추천 1244]

       

        — 홀린 듯이 개추

        — 너 이 자식 방금 개추라고

        — 원활한 진행을 위해 비추 낭낭하게 넣어 드립니다~

        — 최단시간에 투기장 탭 ㅊㅊ

        — 근데 이럼 누가 이기고 지는 거임?

         ㄴ 파딱이 댓글 달면 융단폭격 맞고 패배함 ㅋㅋㅋ

        ====

       

        “으득……! 이, 이 악질적인 인간이이……!!”

       

        쏟아지는 분탕글의 향연.

        예상대로 마리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마리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지만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다.

       

        다른 것들도 몇 개 풀어볼까?

        아직 ‘갤러리 4대 재앙’이나 ‘파멸의 날’프로토콜도 남아있는데.

       

        눈물을 흘리며 24시간 갤러리에 묶인 채 분탕들과 싸우는 마리엘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딱 하나만 더 넣을까 마음속으로 끝없는 갈등을 하며 복도를 걷던 도중.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거기 당신. 클락 데스몬드 맞죠?”

        “네.”

       “프리나의 바깥양반이라고 들었는데요.”

        “으음, 그건 아닙니다.”

       

       나는 즉시 사실을 부정했다.

       어째서인지 프리나가 갤러리에 당치도 않은 유부녀 인증을 하고부터 주변에서 종종 이런 반응이 나오곤 했다.

       아마 ‘해주학파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상대에게 명함 대신 청첩장을 돌려야 한다’는 새로 생긴 학파규칙과 맞물려 벌어진 현상이겠지.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공략대와 접촉한 적이 없었으므로 주머니에 넣어둔 청첩장을 건넬 일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다는 아니지만 가정을 꾸리면 등반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밤색 머리의 여인은 안심한 듯하더니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드디어 써볼 일이 생겼나 싶어 청첩장을 건네주니 썩은 표정과 함께 거절의 의사만이 되돌아왔다.

       

        “이미 받았으니 안 주셔도 돼요. 그보다 이거 진짜 가야 돼요?”

       “청첩장 말인가요?”

       “장소가 대미궁으로 적혀있는데…… 어쨌거나 그건 나중에 둘이 알아서 조율하든 마시든 하시구요.“

       

       이제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저쪽은 나를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가면 너머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실프 공략대의 마가렛이라고 합니다. 잠시 이야기 괜찮으실까요?”

       

       마가렛 라미.

       프리나의 친구이며 교국의 병사들과 대치했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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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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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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